2008/10/05 13:18 : 그리고 낯선 어느 곳에

남국에서는 밤에 비가 내린다. 해가 뜨면서 산호초에서 증발된 수분들이 하루종일 공기 중에 스미면서 습도는 점차 높아진다. 저녁 9시 정도가 되면, 허파에 물이 들이찰 만큼 공기 속에 물기가 출렁대기 시작한다. 태양에 그을었던 대기의 온도는 밤이 되어도 떨어질 줄 모르고 가마처럼 들끓기 시작하여, 사람들의 몸에 땀처럼 이슬이 맺힌다. 그러면 '비가 내릴 때가 되었는데...' 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기다린다.

11시가 되면, 사아아~ 야자수와 파초들 위로 비가 뿌리며, 습기에 결박되었던 바람이 분다. 비는 30분 정도 내린다.

담배를 피우기 위하여 그는 발코니로 나갔다. 이미 비가 그친 후라 바람이 불었고, 공기는 한결 가벼웠다. 산호초 위의 바다는 잔잔하여 별빛마저 비칠 듯 했다. 산호초 위를 넘어온 바깥 바다의 거친 파도가 켜를 이루고 달려와, 해변에서 거품을 물고 자멸하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아내와 딸은 깊은 잠에 들었다. 그늘조차 없는 낮의 집요한 태양빛과 열기, 섬이 드러낸 온갖 색들의 가혹한 폭격에 육신은 물론 정신마저 얼얼해졌을 것이다. 저녁을 먹은 후 아내와 딸은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 수영장에서 멱을 감았고, 간만에 다가온 달콤한 피로감에 겨워 잠에 골아떨어지고 말았다.

밤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사이판에 내렸을 때, 그의 이빨에 묵직한 통증이 왔다. 피로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호텔에 들어가 잠에 들어도, 바위덩이같은 통증이 자신을 짖누르고 있어 밤새도록 뒤척이며 신음을 뱉아냈다.

얼굴의 절반 쯤 마비된 채 아침에 깨어나 발코니의 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온 몸을 감싸안았다. 햇빛이 세력을 펼치지 않은 섬의 아침은 알 수없는 새소리와 연노랑색의 모래와 바다빛으로 밝아오기 시작했고 해변의 모래밭의 야자수들이나 열대의 나무들의 그림자가 점차 뚜렷해지며, 초록빛이 떠올랐다.

온갖 곳에 맺힌 이슬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기 시작했다. 호텔방을 나서서 해변으로 갔다. 파도가 발목을 적셨지만, 미적지근할 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발광하는 호텔의 회랑을 따라 거닐었다. 담쟁이와 같은 식물이 기둥을 타오르고, 잎사귀 사이로 올챙이만한 녹색 도마뱀이 보였다. 도마뱀은 3센티 정도 달려가다 멈춰서 두리번거린 후 다시 3센티씩 옮겨가면서 기둥을 타고 올랐다.

비록 치통으로 아팠지만,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관광가이드가 왔고 섬의 이곳 저곳을 둘러본 후, 만세절벽으로 갔다. 바람이 부는 절벽 위는 폭양 아래 암석과 붉게 드러난 흙으로 황폐했다. 단일한 색으로 잘라진 벼랑의 끝에 태평양이 둥그렇게 보였다. 그 풍경은 단순하여 가혹했다. 이런 풍경 속에 머물면, 찬란함 때문에 자신의 삶이 송두리채 흔들릴 것 같았다. 약간의 피로를 느끼며 벼랑가로 다가갔다. 거기에 모든 바다의 중심이 있었다.

눈 아래 보이는 바다는 거대한 몸체를 세우며 일어나 아가리를 벌리고 그에게 다가왔다. 절벽 아래의 단애에 소리치며부딪는 육중한 바다의 근육과 치솟는 물보라를 보자, 생명보다 더 가혹한 바다의 고통이 가슴에 먹먹했다. 원초적인 바다는 심연의 색으로 자신의 속살을 드러냈다. 바다의 색은 세상이 간직한 모든 푸른색이 그곳에서 응축되고 폭발할 듯한 색이라서 주위의 빛과 색들을 모조리 빨아들여 차라리 캄캄했다.

더 이상 바다를 바라보면 그 속으로 빨려들까 무서워 절벽에서 벗어났다.

남쪽으로 길게 이어진 절벽의 끝이 푸른 바다와 마주치며 한낮의 폭양 아래 녹아 사라지는 것을 한숨을 쉬며 보았다. 벼랑의 한군데 묘석이 있었다. 그 절벽에서 옥쇄를 한 황군에 대한 충혼비였다. 대양이 파랗게 침묵하는 그곳에서 충혼비는 돌멩이에 불과했고, 쓰여진 글들은 감각의 제국 앞에서 한낱 유치한 낙서에 불과했다.

가이드가 모는 낡아빠진 닷지는 언덕을 몇개 지나 대일본제국 사령부 앞에 섰다. 차에서 내릴 때 치통으로 머리 속까지 얼얼했다. 잇몸이 부어올라 윗니와 아랫니가 간혹 부딪혔고 그때마다 통증이 안구를 찔렀다. 그는 잠시 암벽에 기대어 지어진 사령부의 폐허를 본 후, 더위를 식히고자 그늘 아래에서 야자열매의 과즙을 조심스레 마셨다.

그늘 저편에 열기와 습기에 뒤섞인 시간 속에 청회색으로 부식되어가는 야포가 보였다. 매미가 울었다. 평화를 느꼈다. 모든 것이 정적 속에 서서히 녹아가며, 아무런 애착도 없이 시간이 흘러가고, 모든 것이 정물화되어가는 그 시간 속에서 그 평화라는 것이, 졸음처럼 나른하게 다가왔다.

조금 늦은 시간에 한식집에 들어가 깍두기를 씹다가 이빨을 건드리고 말았다. 격심하게 다가오는 통증 때문에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내와 딸은 많이 아프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참을 수 있다고, 이젠 괜찮다고 하며, 물에 밥을 말아 후르룩거리며 먹었다. 통증 때문에 마비가 왔는지, 입술 한쪽에서 물이 새어나왔다.

오후에는 시내관광을 하자고 했다. 아내와 딸 만 보낸 후, 에어컨을 틀어놓고 그는 침대에 누웠다.

망사 커튼 사이로 한낮의 반사광이 스며들어 방 안은 하얗게 들끓었다. 아픈 이의 반대쪽으로 모로 누워 때론 자고 때론 통증에 깨며, 오후가 지나가는 무늬를, 하늘의 색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잠을 자면서도 산호섬의 풍경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보였다. 선잠을 자다 깨어 베란다로 나가면, 산호초에 둘러쌓인 바다는 시간에 따라 녹색, 노란색, 하늘색으로 변했다. 썰물 때면 바다 가운데 산호초가 드러났다. 바깥 바다에서 몰려온 파도가 하얗게 산호초 위에 깨졌다. 진통제 때문에 깨어있는지 잠을 자고 있는지 선명치 않았지만, 오후는 점차 타들어갔다.

어둠이 내릴 무렵 아내와 딸이 햇볕과 더위에 그을은 달작지근한 살냄새를 풍기며 들어왔다. 그리고 조잡스런 토산품들을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저녁을 먹고 풀장으로 갔다. 물은 미적지근하고 바람이 불어도 춥지가 않았다.

딸과 아내는 피로했는지 침대에 누워 티브이를 보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그도 피로감을 느꼈지만, 낮잠 탓에 잠은 오지 않았다. 이빨의 통증이 많이 나아져 책상 위의 불을 켜고 책을 읽으려고 했다.

번개가 번쩍했다. 베란다의 문을 열자, 공기는 미동도 않고 양서류나 풀벌레 소리도 그쳤다. 모든 것에 침묵이 깃들어 있는데, 풀장 옆의 바에서 내어놓은 테이블 주변에는 늦게까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한쪽 구석에선 외국에서 온 가수가 감미로운 노래를 불렀다.

몇번인가 아득한 바다 위로 섬광이 스친 후, 사아아~ 하고 비가 내렸다.

열대의 비는 후두둑하고 한두방울 빗방울이 듣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가는 비가 야자수와 파초 그리고 대지 위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한동안 비는 내리다가 문득 그쳤다. 그리고 수평선 아래까지 차곡차곡 별들이 나타났고, 공기는 한결 가벼웠다.

그 밤의 침묵 가운데, 외로운 지구가 자전하며 으깨지는 소리가 자신의 핏줄 속에 스미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조용한 화음을 이루었고, 대지가 빗물 속에 식어가는 냄새와 바다가 뿜어내는 염분이 뒤섞인 소독약과 같은 내음, 거기에 여름 밤을 채우는 별빛이 버무려졌다. 세상이 고요히 선회하는 막막한 하늘을 보며 가벼운 자살의 충동을 느꼈다. 마음 속은 한줄기 그림자도 없이 투명하고 고요하여, 생을 마치기에 적합한 시간이라는 명료함이, 죽음을 열망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즉 행복한 죽음을.

하지만 죽음은 이상이고, 자신은 뚜렷하게 시시각각 살아갈 뿐이라는 변덕스러운 현실은 침대 위로 그를 내동댕이쳤다.

다음날 사이판을 배회하다 마나가하 섬으로 갔다. 도선장에서 바라본 산호섬은 관광여행사의 광고전단에 실린 남태평양의 섬보다 유혹적이었다. 산호초 위로 배는 나아갔다. 뱃전에서 본 바다는 투명하고, 바닥은 낮아 어항 속을 들여다 보는듯 했다. 갖가지 색의 산호더미와 바스러진 산호조각의 아이보리색 바닥 위로 열대어들이 보였다. 산호초가 끝나는 지점부터 바다는 진파랑으로 수평선까지 이어졌다.

반바지에 슬리퍼, 그리고 그을린 팔과 어깨가 드러낸 승객들은 바다에서 번져가는 무수한 색조에 압도된 듯 술렁이거나, 뱃전을 스치는 바람을 맞이하며 순간에 깃든 풍요로움에 만족한 미소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남국이 간직한 풍요로움은 크레파스로 그린 듯 각각의 색으로 뚜렷했다. 그림자도 없이 온갖 색으로 버무려진 이 곳은, 자연의 유혹과 쾌락으로 가득해서, 빠져들지 못한다면 금새 권태로와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배에서 내려 모랫길을 걸어 반대편 해변으로 갔다. 모래밭에서 반사되는 햇빛과 열기, 다시 그 위에 쏟아지는 폭양이 뒤섞여 섬 전체가 빛으로 들끓었다. 눈이 부셔서 풍경과 섬을 배회하고 있는 반쯤 벌거벗은 사람들의 건강하고도 늘씬한 몸매를 훔쳐볼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수영을 그는 즐기지 않았다. 차가운 물이 싫었고, 쉽게 피로했다. 해변의 그늘 밑에 머물려고 생각했지만, 낮의 열기는 그를 바다 속으로 떠밀었다.

산호초 안에 담겨진 바닷물은 햇볕에 데워져 미지근했다. 자신의 몸을 스쳐지나는 열대어의 떼들에게 과자부스러기를 떼어주곤 했다. 그러면 열대어들은 손가락마저 집어삼킬듯 달려들었다. 바닷물이 입 안에 스미자 잇몸이 쓰라렸다. 한시간 이상 바닷물 속에 있었지만, 차갑거나 피로하지 않았고 잠이 올 정도로 포근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산호에 긁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결국 발에 상처가 났다. 가족들에게 좀더 놀라고 하고, 햇빛을 받아 명멸하는 바다 위로 오후의 빛깔들이 뒤덮히는 것을 보았다.

호텔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도선장으로 갔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 남국의 태양에 그을린 사람들의 건강한 몸을 보았다. 서쪽으로 지는 오후 해는 제방 위에 기다란 그림자를 그렸다. 모두들 약간의 피로에 얼룩진 몽환적인 표정으로 건너편 사이판의 섬 그림자가 짙어지며, 서쪽 하늘이 금빛으로 발광하는 오후를 맞이했다. 그때 후끈한 바람이 불었다.

섬에서의 시간은 무척 느리고, 무한한 자연과 광경들을 감내하기에 자신의 감각기관들이 너무 나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평화와 시간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화되는 색조, 무더운 바람을 감내하기에 자신은 단순히 도시의 소시민이라는 것, 그리고 잠시 임차한 자유를 반납하고 도시의 그림자 안으로 기어들어가 하얗게 자신의 몸을 탈색시켜야 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아쉬워 했다.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이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태고로 부터 때묻지 않은 영혼이 필요할 것 같았다. 열기와 습기 속에서 시간이 지나는 무료함을 용해시킬 수 있는 강인한 인내심을 간직한 채, 이 섬 위를 감싸고 있는 신의 은총들을, 그 빛의 향연 속으로 몰아(沒我)되어 들어가야 하는 지 모른다. 자신은 이 태양의 섬에 어울리지 않았다. 더 이상 자연의 광휘가 풍요로운 안식을 자신에게는 던져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태양보다는 그늘이, 도시의 단순한 윤곽이 자신에게 어울렸다. 섬의 찬란한 풍광이 자신을 뒤흔들며 일깨웠던 것은, 사실은 권태였다. 섬의 풍경들에 환호할 때마다, 서울에 남겨두고 온 허접스런 일상이 떠오르며, 순간에 매몰되는 것을 훼방하곤 했다. 결국 자신의 안식은 도시의 쓰레기 같은 일들과 세속적인 고민거리를 끌어안고 사는 것이었다. 관광이란 결국, 황폐한 거실에 붉은 꽃이 핀 화분을 하나 들여놓는 것이며,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못마땅한 과정일 뿐이다.

서울로 돌아가면, 우선 이빨부터 처치해야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배가 도선장에 다가왔고, 배에 올라탄 시커멓게 그을린 멋진 사내가 제방으로 밧줄을 던지며 뭐라고 소리쳤다. 후끈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맞이하며 바닷물이 말라 소금끼가 번져간 자신의 팔뚝을 보았다. 순간은 순간에 놓아두자는 생각도 했지만, 자신에게 다가왔던 풍요로운 고통들을 몸 속 깊이 아로새겨놓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햇빛은 사그러들고 안식과 같은 어둠이 수평선에서 까맣게 타들어오기 시작했다.

⋅베이스 : 사이판에서, 평화에 대해서...

2008/10/05 13:18에 旅인...face
2008/10/05 13:18 2008/10/0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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