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18 16:56 : 그리고 낯선 어느 곳에

어느 시외버스정류장에 도착하여 낡은 시각표를 올려다보며 K읍으로 가는 버스가 떠날 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할 일 없이 뒷골목을 걷거나 아니면 그 동네의 골목이 끝나는 지점을 알아보기 위하여 낡은 건물의 이층에 있는 다방에 올라가기도 했다. 대부분의 마을들은 우체국과 예전에는 정미소였던 타르로 방부처리된 까만 나무건물과 누렇게 도색된 농협창고가 있었고, 미루나무나 플라타너스의 초록잎 사이로 매미가 울거나 바람이 불었다.

이제 기차와 시외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는 일은 드물다.

집에서 서울역으로 가고 또 어느 도시에서 기차를 내려,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다시 도보나 택시를 이용했던 지루했던 멈춤의 시간들이, 자신의 차를 갖게 되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멈춤의 시간에 맞이할 풍경이나 시외버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소음과 차창에 기대어 땅거미를 바라보거나 버스의 뒷꽁무니에 피어오르던 신작로의 먼지를 더 이상 맞이할 수 없다.

속도위반의 벌금을 감수하면서도 네비게이션 달기를 주저하는 것은, 아직은 네비에서 흘러나오는 미스 김의 목소리를 따라 몽롱하게 어디로 이끌려가기보다 나 자신의 판단에 따라 어디로 가고 싶다는 소박한 욕망 때문이나, 이런 나의 고집은 천안에서 우리나라의 이정표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21번 국도를 타기 위하여 시내를 결국 ㄷ자로 관통했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행정을 이십분 쯤 지체시켰다.

신도로와 구도로가 얽히고 섥히는 21번 국도의 중간 쯤. 도고의 파라다이스 스파 앞에 내렸을 때, 겨울비가 내렸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은 낮은 구릉과 들을 따라 적들처럼 내습했고, 대나무가지 끝에 펄럭였다.

스파라는 것을 처음 가 본 나와 아내는 야외에서 겨울비를 맞으며 열탕의 열기를 누리는 호사를 누렸다. 야외의 열탕 안에서 바라보는 천안 예산 간의 들의 구릉은 낮고 부드러웠다.

스파를 마친 우리는 다시 21번 국도에 올라 대천으로 향했다.

길은 맑은 날도 좋지만 비 오는 오후의 길도 아름답다. 맑은 날의 풍경은 빛 속에 오히려 흐릿하고 너른 반면, 비 오는 날이면 풍경은 안개와 구름과 흐릿한 미광 아래 오목하게 가라앉아 있다가 다가가면 문득 집과 도로와 나무 그리고 들과 산의 모습을 보여준 뒤, 다시 흐릿한 수분 속으로 침몰한다. 매순간 깨어나고 잠드는 풍경들은 순간적이며 뚜렷하여 애틋하다.

대천으로 접어틀자 저녁으로 무엇을 먹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을 것이라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조개구이와 회. 이 척박한 보편성 아래, 어느 지역의 고유한 맛을 본다는 것은 어렵다. 대천항에서 회를 떠서 숙소에 든다.

저녁을 먹고 나간 비 그친 해변의 바람은 차고, 백사장 안쪽까지 바다가 꽉들어찼다. 바다냄새는 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이 맑다. 하지만 콘도에서 내려다 본 들 위로는 안개가 잔뜩 끼어있다. 안개라기보다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못하는 부유하는 것들. 기름과 점착성 물질들.

끈적이는 아침을 보자, 기분이 나빴다.

아내와 나는 방 안에서 TV를 보다 일어나 짐을 챙기고 숙소를 벗어난다. 서울로 가려다 해변의 여인의 광장 쪽을 들렀다 가기로 했다.

풍경을 바라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결국 열정인 것이다. 여인의 광장에 차를 세우고 바라본 바다는 찌들은 해무에도 불구하고 맑았다. 날은 맑은데, 풍경이 흐릿하다는 것은 글씨가 뚜렷함에도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장을 읽을 때, 가슴 안에 먼지와 기름때가 들어차는 느낌이다. 백사장의 모래알은 상아빛으로 반짝인다.

바다를 내려다 보는 모래언덕 위로 집과 건물들이 있다. 아직 색이 뚜렷하지만, 이미 폐가라는 것은 깨어진 유리창 한장 사이로 보이는 어둠의 깊이와 담벼락 사이에 놓인 빗물에 젖은 이불 한 채로 충분히 설명이 된다. 이곳은 길다란 대천해수욕장의 정중앙이다. 아마 해수욕장은 이곳을 중심으로 발전이 되다가 해변의 한쪽 끝에 콘도와 모텔 등이 들어서자, 민박과 여관이나 있던 이곳은 한적한 곳이 되었고, 마침내 재개발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광장 앞 백사장에는 원형의 해변무대가 있다. 해변무대는 얼마나 몰취미한 작자들에 의해서 해변이 운영되어왔던 것인가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추악함이란 그런 것이었다. 오늘 하루 만의 양식에 대한 탐욕을 위해서 세상이 간직한 아름다움 쯤은 아낌없이 소모하겠다는 몰염치를, 시멘트의 균열과 떨어져나간 타일의 흉칙함으로 그들은 대변하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무너짐 그 사이로 흘러나와 추악함의 냄새를 피우더라도... 그리하여 엉성하고 위태롭다 하더라도 사라지리라는 예감은 분명히 매혹적이다.

아직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은 21번 국도를 역행하여 벼루를 하나 사기 위하여 청라면(한국의 명연 남포연으로 유명하며 그 중 최상인 백운상석을 취급하는 공방이 있다고 함)으로 갔으나, 공방을 찾지 못했다.

광천으로 가서 토굴 새우젓과 각종 젓갈을 사고 토굴에 한번 들어가 보았다. 이 곳에서는 1Kg에 오천원하는 추젓(가을 새우)도 1년을 숙성시킨다고 하며, 오젓(5월의 새우)이 만원, 육젓(6월의 새우)이 2만원, 최상급은 3만원이란다.

본시 집 안이 남쪽이라 새우젓의 용도를 단지 김장이나, 순대나 곱창 찍어먹는 것에나 쓰는 정도로만 알았던 나는, 새우젓이 소금 간에 비하여 깊이가 있으면서도 멸치젓이나 간장처럼 냄새가 짙지 않아 콩나물국의 간을 하는데 적절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예산에서 식당을 찾다가 추사의 고택을 들러본다는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결국 천안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후 귀경.

2009.02.20

후기

벼루 중 제일 하찔도 남포연이요, 최상찔도 남포연이라고 한다. 충남 보령군 남포 성주산에서 생산되는 검은 돌로 된 벼루를 남포연이라 하며, 초등생이 쓰는 천원 이천원 짜리도 남포연이다.

벼루 중 최상품은 중국의 단계연이고, 그 다음이 흡주연이며, 우리 남포연의 석질은 흡주연 이상이라 한다. 하지만 산지의 벼루돌도 천차만별이다. 같은 벼루돌이라도 굳어서 간 먹이 벼루돌에 스미지 않아야 하며, 먹이 잘갈려야 하며, 석질에 따라 묵을 달리 써야 한다. 그래서 벼루를 두드려 보아 소리가 경쾌하게 들릴 정도로 굳어야 하며, 먹이 잘갈릴 수 있도록 돌에 무늬결이 있다면 명연의 자격이 있다. 남포벼루에서는 은사(銀沙)가 백운(白雲) 모양으로 깔린 백운상석을 최상으로 친다고 한다.

들러보려고 한 청라면의 벼루공방의 벼루가격을 알아보니 가장 싼 것이 10~30만원, 고급은 300만원 대라고 한다. 중국의 괜찮은 단계벼루 수입품이 30~40만원이니 공방을 찾지 못한 것이 다행인 셈이다.

2009/02/18 16:56에 旅인...face
2009/02/18 16:56 2009/02/18 16:56
─ tag  , , ,
Trackback URL : http://yeeryu.com/trackback/695
◀ open adayof... Homo-Babiens ▶▶ close thedayof... Homo-Babie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