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10 14:58 : 그리고 낯선 어느 곳에

아내는 값싼 비행기표에 팔려 시어머니와 함께 상해로 갔다. 그리고 월요일은 예정된 년차사용일, 종업원에게 회사가 강매한 휴일이다.

안질 때문에 아팠던 눈이나 푹 쉬게 할까 했으나, 토요일 한나절을 쉬니 눈이 웬만하다.

텅빈 집에서 아들과 밥먹고 설겆이하는 것도 그렇다. 일요일 아침, "바다 좀 보고 오마."라고 한 뒤 "오늘 오실 거예요?"를 묻는 녀석에게 "잘 모르겠다. 가 보고 전화할께."라며 집을 나섰다.

42번 국도

서울의 동쪽 끝에서 출발한 차는 결국 영동 새말 나들목에서 42번 국도로 덜렁 내려서고야 말았다. 아직 이월의 기억에 젖어있던 나는, 전재를 넘어 안흥으로 내려서는 언덕길에서 가난한 봄을 만난 것 같다. 길 가의 허물어져 가는 스레트 지붕의 푸른색칠을 한 찐빵집에서 다섯개에 이천원하는 찐빵을 천원을 주고 두개를 산다. 혼자 가는 길에는 빠지는 것은 있어도 덤은 없는 셈이다.

찐빵을 물고 길을 보니 볕이 한창이고, 산골이라도 길은 아득하다. 찐빵의 맛은 순하고 따스해서 찰지다.

42번 국도의 규정속도인 60킬로로 달리며, 쫓아오는 차를 먼저보내거나 앞서 가는 차와 거리를 벌린다. 길 끝에서 그 끝까지 텅비었다. 그제서야 길이 보이고 산이 보이더니, 봄이 보인다.

평창을 지나고 국도를 잠시 벗어나 뇌운계곡으로 가 본다. 이제 산골에는 산촌은 없다. 민박과 팬션이 있을 뿐이나, 눈 녹은 계곡의 개울은 잠잠하고 맑다. 산허리에는 흐릿한 자색이 감돈다. 봄이 오는 가지에는 물이 오르는지 짙은 갈색으로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비행기재와 반점재를 지나 정선을 스쳐 조양강을 따라 아우라지에 다다른다. 동해로 가려던 여정을 잠시 접고 구절리역을 향하여 좌회전한다.

1983년인가 1984년인가 아니면 그 이전인가? 직장에 자유를 담보로 찔러넣은 나는, 가판대에서 열차시각표를 사들고 중앙선 아니면 전라선의 역과 역 사이, 하행선의 출발시간과 시외버스정류장의 어디향 버스의 발차시간 간격을 가늠하며 보내다, 결국 청량리발 중앙선을 타고 제천역에서 내려 구절리로 가는 열차를 갈아탄다. 영월을 지나자 선로 위로 꺼먼 탄가루가 날렸고, 기차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의 길과 시멘트 담벼락은 휘날린 채탄분진이 켜켜로 앉아 잿빛이었다. 사북에 다다르기 전 증산에서 부터 삐그덕거리며 U자를 그리자 협곡 건너편에 보이던 선로 위에 열차는 올라섰고 거기서 부터 태백선과 정선선이 갈라지는 것이었다. 협곡 사이로 보이던 강이 거꾸로 흘렀다. 탄광지역인 고한 사북에서 흘러내리는 꺼먼 탄물과 또 다른 산 사이의 맑은 개울물이 합류하되 섞이지 못하여 희고 검은 띠를 그리며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산하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산골 곳곳에 잿빛에 짓눌린 마을과 삶에 먹먹했던 가슴이, 열차가 산굽이를 돌고 정선의 너른 들을 보자 가라앉았다.

하지만 들이 넓은 것은 아니었다. 첩첩 산 중에 강이 넓은 것일 뿐.

나의 열차표는 정선까지 였다. 당시 그 곳에 살던 사람들도 모르던 정선 소금강을 가기 위한 것이었지만, 조양강을 보자 그만 아우라지, 구절리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후로 늘 길 옆에 놓인, 그 길을 놓치고 만다. 한번은 홍수 때문에 길이 끊어졌다고 했고, 또 한번은 도로공사 때문에 폐쇄되었다고 했다. 하여 북평에서 여량, 임계를 지나 동해로 가는 길은 나에게 닫혀진 길이었다.

구절리로 가는 길은 도로가 포장이 되었어도, 산골로 가는 기분이 들게 호젓했다. 끊어질 듯 산구비를 도는 단선의 선로와 개울과 구비도는 도로. 하지만 길이 끝나는 곳에 더 이상 산골은 없다. 사람과 차량과 음식점과 급조된 관광상품들 뿐이다.

구절리역은 1974년 개통되었으니 역사가 짧다. 삼등완행열차 비둘기호가 마지막(2000.11.14일)까지 달렸던 역이며, 청량리에서 한번 뿐인 밤 10시에 떠난 열차는 통금인 새벽 3시 14분에 구절리역에 닿았고, 기관사가 소변보고 차 한잔 할 시간도 못되는 새벽 3시 50분에 청량리를 향하여 다시 기적을 울렸다고 한다. 자정을 넘겨 자미원, 증산, 정선 등에서 내린 삼등승객들이 갈탄을 부삽으로 역사의 난로에 부어넣고 손과 얼굴을 쬐며 통금싸이렌을 기다린 그 밤들이 별빛만큼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구절리역이 폐쇄(2004.9.23)된 것은 석탄산업합리화 조치 이후 구절리역의 적자상태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 천재지변 때문이다. 2002년 8월 태풍 루사로 정선선의 일부가 유실되고 구절리역의 영업이 중단되었다가 2004년 2월에야 복구, 영업을 재개하였으나 그 해 산사태로 9월 23일 다시 영업을 중단하게 되고, 2006년 여름부터 레일바이크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역은 더 이상 여객운송과 관계가 없는 역이 아닌 역이 되어버렸다.

구절리역을 깜빡 스쳐지난 나는, 길 끝 양지바른 언덕에 피어나는 봄을 잠시 보았다.

구절리역에서 보니 레일바이크는 2인 18,000원, 4인 26,000원. 혼자 타려면 2인 요금을 내고 두사람의 힘으로 페달을 밟아야 한다. 구절리 → 아우라지 7.2키로 구간이며, 아우라지에서 풍경열차(레일바이크를 탄 사람은 무료)를 타고 돌아올 수 있다. 구절리에는 정선기차팬션이 있는데, 1박에 통일호, 무궁화호(22평방미터: 2인실)는 7만원, 새마을호(33평방미터: 4인실)는 7만원이다.

구절리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으나, 적당한 식당이 없어 여량(아우라지)으로 내려가니 마침 콧등치기 국수집이 있다. 콧등치기 국수는 화전민이 먹던 메밀로만 만든 국수이다. 찰기가 없는 메밀로 국수를 만들다보니 면발을 가늘게 하지 못해 굵직한 국수가락이 콧등을 친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 이 국수는 맛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이 국수가 맛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산붕에 불을 놓아 옥수수, 귀리, 조, 메밀 등을 키워 양식을 하던 화전민이 끼니를 넘기던 음식이다. 맛이 있다는 것은 그 시절 가난했던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다. 간혹 잘 삭은 열무줄기가 무덤덤한 국수 맛을 도울 뿐이다.

홀로 먹는 콧등치기 국수의 담담한 맛이라니, 그것도 맛은 맛이다.

아우라지는 송지천과 골지천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구절리에서 흘러내리는 송지천은 숫개울이고 중봉산에서 내리는 골지천은 암캐울로 아우라지에서 살을 섞고 그만 조양강이 된다. 이 합수 지점에 산골이라도 들도 있고 비옥해서 양식이 남는다고 동네 이름을 여량(餘糧)이라고 한 모양이다. 송지천이 흐르는 송천의 소나무가 좋아 경복궁 중건 시 벌목을 하여 송지천에 띄우면 아우라지를 거쳐 조양강, 동강을 지나 영월에서 남한강을 타고 단양으로 흘러내려 충주로 북상. 여주를 거쳐 양수리를 지나 한강 광나루에서 건져올려 달구지로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골지천을 따라 다시 동해로 간다. 가다가 졸려 임계를 지난 후, 도로변에서 차를 세우고 잠시 낮잠. 깨어나 갈고개, 백봉령(780m)을 넘으니 산 아래 저쪽은 바다인 듯, 구비구비 언덕 아래 흐릿한 오후의 햇살 밑으로 풍경은 지워져 있다.

7번 국도

우리의 국도는 1,3,5.7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남북으로 종단한다. 그래서 7번 국도는 백두대간의 동쪽 허리를 비집고 바다 옆을 숨가쁘게 달린다. 도로 옆의 산은 가파르고, 바다는 푸르다. 그래서 예전에는 들이 없는 동해바닷가의 마을들을 가르켜 공망이 들었다고도 했다.

亡이란 텅비어서 사라짐을 뜻하는 데, 이 공망이 든 지방에 살면 거만의 부자도 당대에 모든 부를 잃고 간신히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채나 건사하면 다행이라는 것이다. 택리지에서는 삼척을 공망이 든 곳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석회암의 카르스트 지형인지라 땅 밑 곳곳에 빈 곳(동굴)이 많아 공망이 들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말은 되는 것 같다.

무릉계를 스쳐지나 동해시 외곽 7번 국도에 올라섰을때, 이미 4시였다. 서울에서 숙소를 예약하지 않은 탓에 방을 정해야 된다는 생각에 추암해수욕장으로 접어들어 세번인가 묵은 적이 있는 겨울연가의 그 민박집으로 갔다.

많이 변했다. 한적하던 해변으로 가던 길은 가게들이 늘어서고, 민박집으로 개울을 건너던 볼품없던 시멘트 다리에는 아치형 붉은 난간이 놓여 바다를 가리고, 어랍쇼! 민박집 뚝 밑, 개울이 바다와 섞이는 지점에는 나무잔교를 세워올렸고 그 위에는 카페가 있었다. 서구풍의 빨간파라솔이 테이블 위에 펼쳐졌고, 그 위의 민박집의 촌스런 주홍색과 대조를 보였다.

민박집으로 올라가 방을 얻으려 했지만 아무도 없었고, 전화를 해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민박집 얕은 담 아래로 보이던 개울과 바다는 붉은 파라솔로 바뀌었다. 해수욕장은 전보다 더 흥청거렸지만, 민박집 주인이 그만큼 잘살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민박집에서 바로 갈 수 있던 해암정은 가게들로 가로막혀 한참을 둘러가야 했다. 다른 민박집에 들고 싶은 생각은 없는 까닭에 해암정을 본 후 다시 울진 쪽으로 차를 몬다.

등대에서 하루를 지낼까 했다. 숙박을 할 수 있는 등대가 두군데인가 세군데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다 남해에 있고, 동해에는 없다. 동해에 있다면 울기등대와 같이 규모도 크고 숙소같은 부속시설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삼척을 지나고 임원을 지나 등대가 나란히 서있는 포구가 보였다. 그곳에서 민박을 정할까 하다가 민박에서 바다가 보이지 않고 제방만 보여 다시 울진으로 향한다.

결국 울진을 지나, 망양정으로 갔다.

민박을 정할까 했으나,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불은 꺼져 있어 팬션에 일박을 물으니 일요일 저녁도 5만원이란다. 팬션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불어온 바람인지 몰라도 공망 살 든 동해바닷가의 공터에 프라스틱 목재로 집짓고, 색깔 듬뿍 든 종이로 도배하고 "일박에 7만원 토요일 밤은 10만원, 성수기는 그 값에 1.5배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제 동해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곳은 공망은 커녕 금싸라기 아니던가? 하지만 이미 좋은 자리는 민박이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민박에 들고자 했으나, 너무 썰렁해서 팬션에 들기로 한다.

방을 정하고 식사를 하러 갔더니 손님이 없는 일요일 저녁에는 식당이 문을 닫았고, 딱 한 곳 복지리를 하는 곳이 있어 갔더니 1인분은 안한다고 거절. 홀로 다니는 것도 서러운 데, 굶을 수는 없어서 숙소로 돌아와 라면을 끓인다.

창 밖은 이미 밤이다.

망양정의 해변을 가로막고 있는 제방 너머 파도소리에는 바람소리가 깃들어 파도소리에도 휘휘소리가 감긴다.

하루종일 운전을 해서인지 피곤하다. 샤워를 하고 열시도 지나지 않아 잠자리에 든다.

36번 국도

왕피천이 바다로 흘러드는 망양정은 7번 국도 옆, 36번 국도의 끝이다. 아마 여기에서 숙소를 정한 것은 알렙님의 <36번 국도>라는 글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섯시가 못되어 여지없이 깨어났고, 아직 창 밖에는 바람소리 뿐이다. 미명이 다가오자 바다 위의 옅은 구름 때문에 일출을 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시 라면을 끓여먹고 8시에 출발. 망양정에 올라 바다를 한번 바라본 후, 왕피천을 거슬러 36번 국도로 오른다. 한국의 그랜드 캐년이라는 불영계곡의 깊이를 감안할 때, 바다로 흘러드는 왕피천의 모습은 시시하다. 태백산맥의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61키로로 짧지만, 감입곡류(嵌入曲流)로 계곡을 사행하는 하천이며, 청정생태하천으로 은어가 잡힌다.

36번 국도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은 깊고 통고산의 그림자 때문인지 봄빛이 번지지는 않은 것 같다. 불영사를 지나고 왕피리를 지나 구름을 밟는다는 고개인 답운재를 지나자 좁아지던 하늘이 열리며 분천이다. 그 동네에는 내가 일곱인가 여덟인가 할 때 강릉을 가기 위하여 타고 간 영동선이 지나는 분천역이 있다. 산골임에도 하늘이 오목하고 넓어 동이 盆자에 하늘 天, 盆天이리라 생각했다. 지명을 간신히 찾아보니 汾川이다.

汾, 洛, 渭, 河는 중국 고대의 북방계 하천의 이름이다. 중국 산서성 분수 가에서 요순시대가 열리고, 섬서성 낙수 가에서 하은 왕조가 시작한다. 그리고 섬서의 위수에서 주나라가 열린다. 본시 북방의 강은 삼수변이 붙는 단자의 이름이었지만, 후일 왕조체제의 군신의 위계질서가 도입되며, 분 락 위가 합하는 河는 하천들의 宗이 되어 황하가 되고, 분수, 낙수, 위수로 이름이 변한다. 이 하천명들이 분천 낙천, 위천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수입되는데, 분천이 여기이고, 낙천은 청량산의 서면을 굽이도는 도산구곡을 말한다.(하지만 분천과 낙천은 동일 하천의 윗물, 아랫물의 이름이다) 이 개울은 낙동으로 합하고, 위천은 멀리 지리산골 함양 읍네의 남쪽으로 흐르는 개울인데. 위천은 경호강으로 합하고, 진양호에서 남강으로 합한 후 칠서 즈음에서 낙동에 합한다.

오목한 하늘 아래, 낙동강의 지류인 분천이 들 저편을 지즐대며 감아돈다.

분천은 알렙님이 그의 <36번 국도>에 말한 소천면에 있다. 그는 소천에서 길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참을 잘못갔다. 그는 춘양에서 36번 국도를 벗어나 35번 국도로 남행한 모양이다. 이나리는 춘양에서 흘러내린 운곡개울과 분천에서 흘러내린 낙동개울이 합한다는 뜻이다.

개울이 합하는 모습도 다른 모양이다. 양수리에서는 남북한강이 싸우듯 머리를 들이밀어대니 두물머리라고 하는 모양이고, 아우라지에서는 남녀가 서로 어울어지듯하고, 이나리에서는 두물이 나란히 수줍은 듯 합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적막한 푸른목숨을 이끌고 이나리강에 닿은 알렙님은 물안개를 보며, "저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한참을 잘못 온 것이다."라고 겨울 저녁을 향해 운다.

하지만 36번 국도 위에 자신의 여로를 제대로 짚어온 자는 드물다. 그리하여 춘양에서 35번 국도로 북상, 봄볕을 잡고자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봉화, 영주를 지나 풍기에서 단양으로 한가한 죽령 옛길을 넘는다. 죽령의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본 남쪽은 봄이 오는 지 쏟아지는 빛무리 아래 드넓다.

단양에서 중앙고속도로에 접어들어 집으로 간다.

20090308~20090309

2009/03/10 14:58에 旅인...face
2009/03/10 14:58 2009/03/10 14:58
─ tag  ,
Trackback URL : http://yeeryu.com/trackback/696
◀ open adayof... Homo-Babiens ▶▶ close thedayof... Homo-Babie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