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연하는 글

죽음에 대한 나의 모든 공포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

– A.Camus –

무덤덤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보잘 것 없긴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더듬거리며, 자신이 맞이한 세상을 말하고, 누군가 그것을 읽어준다는 사실은, 최초로 편지를 쓰고 난 후, 답장을 받은 것처럼 나를 들뜨게 했다.

스스로 쓰고 읽는 일기가 자신의 체험과 감정들을 충실하게, 또는 자발적 약속에 대한 의무감으로 기록해 나가는 부단한 內燃이라면, 사이버의 공간 속에 쓰여지는 글은 닫혀진 사색이 아니라, 미미하기는 하지만 대화이며, 외부에 반쯤 열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외부의 온기에 기생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만큼 수줍은 사교이자 外燃하는 것이다.

익명의 이웃의 관심 속에서 글을 써나가던 나는 조금씩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윤리적인 문제는 아니다. 이른바 文才가 부족한 탓도 아니다.

글을 쓰면서, 소재를 찾기 위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지고, 때론 달아나려는 느낌을 잡아 가둬두려고 하기도 했고, 때론 멋진 글(훌륭하다는 것은 아니다)이 나오기도 했다. 때론 다른 이웃의 글이나 산문집에 기재된 어느 문구에 매혹되어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 글에는 뿌리가 없다. 그것이다.

써야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며칠동안 아주 묵은 책들을 읽고 있다. 알베르 까뮈의 책들. 아직도 그 내용과 의미가 잡히지 않는 그 책들. 문장의 하나 하나, 문맥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그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오래된 오해의 허물을 벗기고 있다.

삶에 대한 숭배와 자연에 대한 경배 그리고 죽음은 삶이 내다버린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는 젊었던 작가의 가슴에 깃든 열정의 그늘이 절망이지, 절망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 그래서 티파사에는 꽃이 피고, 제밀라에는 바람이 분다는 주술에 깃든 예언.

그의 예언을 들으며 나는,

한번도 모질게 사랑하거나, 열정적으로 미워한 적이 없다는 처참한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세상에 대하여 허무하다고, 절망스럽다고 아우성칠 하등의 권리도 나에겐 없다는 사실을, 애처롭게 부정하면서도, 간신히 알았다.

결국 나의 수치심은 열정없는 삶이 결코 짤 수는 없다는 것. 그 싱거움으로 부터, 구체적인 삶의 무늬를 그릴 수 없으며, 꽃 피고 계절이 지나는 풍경을 더 이상 담아낼 수 없다는 것. 추상화되어 마침내 투명해지고 허무해진 나의 일상들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가 천국을 지향하다, 맞이한 일상의 지옥이다.

하지만 한번도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하지 못했다. 비굴했던 자신의 일상을 장롱 안에 버젖이 걸어놓고, 글이 부끄럽다며 내가 써놓았던 글들을 모두 모아 야반도주를 했고, 조용히 숨어살다가 그만 지나던 익명의 사람에게 걸려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 곳으로 되돌아가 잠망경을 올리고, 예전에 써놓아 곰팡이가 쓴 글들을 조금씩 소진해가면서, 써지지 않는 글을 간신히 쓰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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