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03 14:55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그 날은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좀 피곤했다고 할까요? 반스이거리(晩翠通り)에 있는 바이어 사무실에서 정중하면서도 아무런 실속없는 상담을 끝내고, 센다이니시도로(仙台西通り)와 코쿠분쵸(國分町) 거리가 교차하는 횡단보도에 서 있었죠. 출장 중 해야 할 상담은 모두 끝났고, 하루가 저물어 가는지 하늘은 드높고 푸른데, 거리에는 어둠이 깔리고 상점의 불빛들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을바람은 선선했고, 할 일이 끝난 저는 거리가 내다보이는 창 가에 앉아 사케나 한 잔 할 생각이었습니다. 한국처럼 길 가로 테이블을 내놓았다면 더 좋았겠죠. 코쿠분쵸 쪽의 골목에 그런 술집이 없을까 하며 둘러보고 있을 때, 신호등이 바뀌었습니다.

횡단보도의 절반 쯤 건넜을 때, 맞은 편에서 자전거가 쏜살같이 달려 내려와 제 옆을 스쳐 지났습니다. 놀란 저는 자전거 위의 여자를 보았습니다. 순간 여자의 눈과 마주쳤죠. 눈이 마주 친 시간은 0.1초 쯤 되었을까요? 가슴이 갑자기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여자의 눈동자가 하늘의 반 쯤 가릴 정도로 커다랗게 보였습니다. 꼭 여자의 눈동자 안에 들어선 느낌이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여자의 가슴 속에 깃든 세월과 거기에서 피어난 온갖 감정들을 다 알 것만 같았습니다.

혹시 그런 것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제 가슴 속에 깃들었던 슬픔이나 기쁨들, 거친 생활 속의 무료함들이 그 눈동자 속에 용해되고 제자리를 잡을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이랄까요?

그 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정신을 차린 저는 떨어트렸던 서류가방을 집어들고 허겁지겁 맞은 편 보도로 올라서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지 말았어야 했어요. 다시 그 여자를 보기 위하여 돌아섰을 때, 그녀는 코쿠분쵸의 골목길 남쪽, 어둠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생애의 갈림길에서 그릇된 방향으로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신호등이 몇번인가 바뀔 동안 그녀가 사라진 골목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낯선 땅에서 찰라와 같은 시간에 한 여자를 보고 느낀 감정을 단 한마디의 말, 즉 사랑으로 호도해버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보다 저의 생애가 그 눈동자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풍요나 행복으로 인도해준다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뭔지 알 수 없지만, 그 눈동자만 바라보고 있으면 된다는 단 하나의 욕망에 사로잡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자는 골목을 지나 낯선 섬나라의 어딘가로 스며들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횡단보도를 다시 건너는 것, 여자가 사라진 골목의 이쪽 저쪽을 살핀 끝에 피로감에 어쩔 수 없이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정식과 정종을 시켜 먹는 것이었습니다. 늦게 호텔로 돌아간 저는 다음날 아침 다시 그 횡단보도에 서서 동서남북을 잠시 살핀 후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돌아온 지 두 달이 지난 십이월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 두달동안 우리의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이름조차 모르는 여자 때문에 이년동안 사귀어왔던 여자와 파혼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이죠.

결혼 후에도 한동안 황단보도 앞에 서거나,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에서 저물어가는 가을 하늘을 마주하게 되면, 그녀의 눈동자가 불쑥 떠올라 골목을 가득히 채우곤 했습니다. 하지만 떠오르는 모습이라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반짝이던 왼쪽 눈동자와 속눈썹에 맺힌 물기와 같은 것, 약간 찡그려진 눈썹이 이마 위로 치켜올라간 모습, 그리고 약간 빛이 나는 것 같은 코 끝일뿐, 이상하게도 오른쪽 얼굴이나 입술과 턱 같은 것은 아무리 해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그런 기억조차 가물해지고, 나날의 업무와 아이들을 키우느라 신경이 날카로와진 아내의 잔소리에 치여, 아무런 보람도 기대도 없는 나날을 하루하루 지워가고 있었습니다.

올해 봄인가? 아파트 단지 안을 거닐면 누군가 저를 훔쳐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지 그렇게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몰래 저를 본다면 아마 뒷통수가 근질거리거나 뭔지 모를 불안감에 빠져들었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눈길은 아파트 곳곳에 있어서 방향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버스를 타기 위하여 정류장에 서 있거나, 휴일날 자전거를 타고 도로 위를 달릴 때, 따스한 눈길로 저를 지켜주는 것 같았고, 어떤 향기가 감돌거나, 불현듯 꽃을 보면 설레이게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봄빛이라고 치부했고, 금년에는 유난히 봄바람에 피고 지는 꽃잎이 말할 수 없이 황홀하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그런 나에게 혹시 애인이라도 생긴 것이 아니냐고 웃으며 묻곤 했습니다. 정말 수줍은 사랑과 같은 것에 설레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이 지나갔죠.

그러니까 그 날도 오늘처럼 날씨가 좋았습니다.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서류정리를 했고, 싱숭생숭하여 오후에는 이유도 없이 거래선에 연락을 하여, 잡담을 하다가 그 길로 퇴근을 했습니다.

지하철 계단을 헐떡이며 올라서자, 이미 가을이 깊었는지 하늘에는 아직도 빛이 감돌고 있는데, 도로 위로 어둠이 내려 차들은 후미등의 붉은 꼬리를 남기고 제 앞을 바삐 스쳐지났습니다.

한줄기 바람이 불었고, 은행잎이 후루루 떨어져내렸습니다.

스쳐지나는 차량들의 행렬을 보면서, 무엇을 위하여 바삐 저녁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저를 덮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온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흘러가고 시간이 그 위를 지나며, 가련하게 늙어가고 있는 저를 떠올리게 되었죠.

허나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인지 허기가 몰려왔습니다. 담배를 한갑 사서 피워물고 골목으로 접어들어 아파트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아파트 입구의 보도 위에 올라섰을 때, 맞은 편에는 유모차를 끄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유모차가 지날 수 있도록 저는 한 켠으로 걸었는데, 저를 못 본 모양입니다. 유모차는 제 쪽으로 굴러와 거의 부딪힐 즈음 멈춰섰습니다.

그때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고 머리를 쓸어올리며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순간, 봄부터 줄곧 저를 감싸고 돌던 그 눈길의 실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손은 천천히 올라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켰지만, 온갖 낱말들이 머리 속에 뒤섞여 아무 소리도 못낸 채, 그저 어어 하는 소리만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도 저와 마찬가지였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우리는 마주본 채 한동안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녀가 한숨을 쉬더니, 말하더군요.

"분명히...... 한 오년 전......우리는...... 일본의 어느 거리에서...... 만났던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그동안의 음란하고 통속적이라고 말해지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 전말이며, 샤갈의 그림에 보이는 그 여자의 눈이 왜 그렇게 슬프면서도 매혹적일 수 밖에 없었던가 하는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느 바람난 남자와 변호사와의 대화 중에서>

20090903

2009/09/03 14:55에 旅인...face
2009/09/03 14:55 2009/09/0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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