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이 옳은가?

과연 대중이 옳은가? 이 질문에 대하여 저는 맞는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가 그러하듯이, 대중 또한 옳기도 때론 틀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민중이 옳은가 하고 여쭈신다면, 그들은 옳을 뿐 아니라, 틀릴 수도 틀려서도 안됩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밥그릇이지, 옳고 그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처한 논리는 먹느냐 굶느냐 하는 절대의 문제이지, 누구의 밥그릇이 더 큰 가하는 쉰소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별적 실체인 민중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민중을 말하면 대척점에 기득권자들이 있으며, 민중을 말하는 그 자체가 계급투쟁을 지지하는 것이 되고, 빨갱이가 되는 시기가 광복 이후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법 전문(前文)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동학농민운동이 아닌 상해임시정부에서 시작합니다.

황석영씨를 독자들이 좋아했던 것은 엄혹한 시절, 그가 민중들, 그들의 삶의 사실에 입각하여 그의 독자들을 불러 모았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의 목소리에 솔깃했고 그의 모닥불 주변에 앉아 밤이 새도록 <삼포가는 길>과 <몰개월의 새>, <장사의 꿈>, <낙타누깔> 등 무수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지내는 동안 무수한 일들이 자행되었고, 민중들, 시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여 민중의 이야기는 우리와 격리될 수 없으며, 우리의 뿌리임에도 민주화가 되었다고 지난 몇년간 논의에서 희미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황석영씨의 활동에 대한 관심도도 낮아졌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작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쇠고기와 촛불집회와 소통의 문제, 용산참사, 방송법 개혁, 집시법의 엄정집행 등의 문제로 정부와 사회일각이 부딪히면서 다시금 정부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자각에 직면하게 될 즈음, 그리하여 황석영씨의 그 옛날 이야기가 다시 필요한 싯점, 그래서 개밥바라기별이 다시금 반짝이리라 믿던 그 즈음에, 이명박 정권의 중도와 실용에 적극 동의하며, 남북한 몽골 공동체라는 원대한 비젼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참여정부의 최대의 공과가 권위주의를 없앤 점에 있다면, 이 정부의 공과는 우리 사회에서 <보수>라고 하는 것들의 실체를 들여다 보게 했다는 점 일지도 모릅니다.

민중이 개별적 현실에 당면하여 울고 웃는다면, 정치는 현실을 바라보며 TO-BE 모델을 그리고 국민들의 합의와 참여를 바탕으로 그를 달성해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문민정부를 비롯하여 이번 정부에 이르기까지 제시된 TO-BE 모델은 가지런히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였으며, 선진국으로의 도약입니다.

하지만 그 국가와 국민의 의미는 말하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지닐 것이며, 선진국 또한 경제력이냐? 복지냐? 로 갈릴 것 입니다.

중앙아시아를 다녀온 이명박 대통령은 5월 16일 대전에서 일어난 전국노동자대회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과 관련해 “수많은 시위대가 죽창을 휘두르는 장면이 전세계에 보도돼 한국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혔다”고 말하며, “글로벌 시대에 국가브랜드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후진성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을 접하며, 우리 사회 내부가 들끓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 외부에 비치는 한국의 이미지가 중요한 것인지 반문하게 되더군요. 결국 그가 말하는 국가브랜드란 결국 자기 눈물로 가득한 빈 밥그릇을 부여잡고, 할 말이 있어도 침묵하며, 농촌과 지방이라는 주어진 환경에서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명문대에 들어갈 수 없어 꿈을 접는 것. 우리가 파쇼라고 말했던 과거로의 후퇴, 즉 후진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픈 데 미소지어야 하고, 침묵과 텅빈 밥그릇과 꿈이 없는 미래를 짊어져야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정의로운 정부라면 의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보수도 진보도 다 필요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도 사쿠라라는 데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실용>은 또 무엇을 위한 실용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국민들을 위한 실용인지 저들만의 실용인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왕조에서 일제를 지나 군사정권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민관군이 아닌, 군관민으로 대변되는 우리사회의 도치적 현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선생이 가르치는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존경받아야 하며, 대통령 또한 그러하며, 작가 또한 무조건 그래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황석영씨의 글을 돈 주고 사서 읽은 사람입니다. 저는 소비자고 그는 글이라는 것을 생산하는 작가일 뿐입니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닙니다. 저는 정당한 소비자로써 저의 니드에 맞지 않는다고 클레임을 친 것도 아니고, 컴플레인을 한 것 뿐 입니다.

아마 그의 글이 마음에 들면 또 사서 읽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따위가 아무리 황석영씨가 위대한 문인으로 우뚝서기를 바라도 그의 글의 한자도 더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엄밀한 그 사실, 울고 불고 해도 저한테 돌아올 수 없는 저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꾼, 그가 제 곁을 떠난 것에 우울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그리고 그가 자신의 블로그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에 쓴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라는 글을 읽으며, 그가 더 이상 작가로 남아 저와 같은 자들의 욕을 감당하기 보다는 차라리 이 정권 속에서 자신의 구상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러하다면 어떤 정권 하에서도 과거에 쓴 자신의 글이 질곡이 되어, 그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90521

This Post Has 4 Comments

  1. 다른 무엇보다도….
    삼포가는 길의 그 작가가… 저 황석영이야, 생각하니까…
    참 우울하고 가슴아프고.. 그랬습니다.

    ‘짜증’이라고 할 수 밖에 없던 감정은…
    김지하에게 더했습니다.
    이문열과 황석영에게 하는 말 들어보니…
    아, 저사람 오적의 김지하야? 싶은 것이….

    시는 시로서, 소설은 소설로서…
    딱 거기까지만 사랑하고 말아야 하나 봅니다..

  2. 여인

    저희는 밥벌어 먹어야 하는 작가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이런 것보다는 노벨문학상을 황선생께서 타시기를 빌어야 되겠습니다.

  3. 흰돌

    이런 일이 있었던가요 ㅜㅜ
    아무것도 몰랐어요….
    어렵네요.

    1. Rd.T 旅인

      저한테는 김문수와 이재오의 변절과도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이 일로 황석영이 인터넷 소설 개밥바라기별을 올렸던 네이버의 문학동네에 변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그의 오래된 독자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그의 변조차 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과거의 글들을 어찌버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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