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01 16:37 : 무지개, 24분지 1의 꿈
Totoro

1998년 <이웃집 토토로>를 처음 보았다. 그 해는 을씬년스러웠다. IMF가 왔고, 나는 이국 땅에서 자금을 맡고 있었다. 1997년말부터 시작된 은행의 여신회수는 가혹해졌고, 금융권의 그 사교적이고 품위있는 언어는 사라졌고, 고리대금 업자들이나 내뱉을 수 있는 야비한 언어들이 지배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자금이 바닥났다.

돈이 바닥이 나자, 전전긍긍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될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이 되었고, 감원을 하여 직원이 사라진 텅빈 사무실에서 맥놓고 앉아 있거나, 회의실 창 가에 앉아 창 밖의 풍경을 그리곤 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할 일이 없고, 무력한 시기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남은 직원들이 다 퇴근한 사무실을 지키다 불을 끄고, 어둠이 내려앉은 사무실을 바라본 후, 안녕~! 하고 문을 닫고 집으로 갔다.

사무실 안 보다 집으로 가는 길에 더 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곤 했다.

감원한 직원이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케이크를 사가지고 와서 웃는 얼굴로 케이크 조각을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뒷등의 모습, 그리고 빈 사무실의 구석에 먼지처럼 자리잡기 시작한 그늘, 텅빈 사무실 저쪽 빈 자리 위로 걸려오는 아득한 전화 벨소리, 봉급 날이 며칠 남지 않았음에도 급여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생각들로 착찹했고, 나 스스로 나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일년 가까이 살아 무의식적으로 집으로 가는 길에, 아득히 먼 곳, 외국에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고국에 대한 향수조차 없는 서글픔이 밀려와 나는 휴지조각처럼 초라해지곤 했다.

그런 지루한 날들은 예상보다 길고도 멀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 구겨진 몸을 소파 위에 밀어넣고 TV를 켰다.

만화의 한 장면이 나왔다. 거기에는 우리나라의 논과 들이 7월의 햇빛과 매미소리로 파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 풍경은 너무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꽝뚱어로 더빙된 그 만화를 보며, 누가 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을까 했다.

하지만 조금 있으니 우리의 풍경과 약간은 어긋난 장면이 나오며, 일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위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입이 크고 눈이 동그래서 마음씨 좋아보이는 괴물 토토로, 전선 줄을 타고 질주하는 고양이 버스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 토토로와의 만남은 우산 위에 떨어지던 우두둑 빗방울 소리가 얼마나 신기한 소리였던가를 다시금 환기시켰고, 화분에 수박씨를 심어놓고 이제나 저제나 하며 싹이 트기를 기다리던 어린 날들이 기억났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조그만 것으로 오래된 기억 속의 오르골 소리처럼 아름다운 것을 환기시키는 천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만화를 다 보고 난 후, 오랫 만에 가슴이 가볍고 입 가에 미소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한편의 애니메이션으로 그만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반해버렸지만, 무엇이 그토록 매료시켰는가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이 때론 삭막하고, 때론 야멸차고, 때론 슬플지라도 5%의 꿈만 있어도 세상은 살기에 충분한 것 이상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럽다는 것이며,

가슴 속에 단 1%의 동화조차 우리가 간직하지 못했기에 세상은 아프고, 우리가 비극을 살고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이러한 복음은 아직도 그의 만화 속에 계속되고 있으며, 그의 애니메이션을 보면, 때로 슬프기도 하지만 이차원의 평면 위에 경이적으로 아름답고 즐겁게 펼쳐진다.

TV로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난 후, 딸아이를 데리고 음반점에 가서 꽝뚱어로 더빙된 VCD를 샀다.

유치원을 다니던 딸아이는 일요일 아침이면 잠자고 있는 내 배 위로 뛰어올라와 그렇게 말했다.

"아빠! 조금 있다 우리 토토로 보자."
"저번 주 봤는데 또 봐?"
"음~ 또 보자."

Totoro-2

20091001

참고>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
        개봉 : 1987. 4월 기획, 1988. 4월 개봉, 한국에서는 2001. 7.28일에 개봉
        각본,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
        제작 : 스튜디오 지브리
        배경 : 1955년 일본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
        인물 : 사츠키(11살), 메이(4살), 쿠사카베 타츠오(아빠), 토토로와 일당 들

참고> となりのトトロ

2009/10/01 16:37에 旅인...face
2009/10/01 16:37 2009/10/0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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