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 돈

생각해보면 돈이란 대단한 것이다. 돈이 만들어진 후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물, 심지어는 인간의 감정마저도 숫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환가(換價)할 수 있다는 것은, 예를 들면, 대한민국 지도 상에 등고선을 그리듯, 땅값의 지형을 그릴 수 있으며, 대지 위에 떨어져 내리는 빛과 바람, 그리고 꽃과 나무들을 몇푼의 돈으로 추상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술작품을 볼 때 느끼는 순간적인 희열(가치)은 입장료(가격)로 측정되거나, 지속적으로 그와 같은 기쁨을 향유코자 할 경우 예술품에 값을 치뤄야 한다. 그것은 대단히 비싸기 때문에 가치증식의 수단으로 전락할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마저도 소수의 사람에게 독점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숫자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흘러가는 숫자(돈)가 있는 반면, 고정된 숫자 그리고 자라나는 숫자가 있다. 내가 가진 숫자(돈)는 대충 흘러가는 것이라서 고이거나 뿌리를 내리고 자라지 않는다.

우리나라 돈에는 금액과 한국조폐공사에서 그 금액의 제품(돈)을 제조했다는 표시가 있고, 한국은행 총재라는 글씨와 보이지도 않는 총재인이 찍혀있지만, 유효기간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 제품은 시중에 돌고 돌아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돈의 품질보다 거기 적힌 액면의 숫자, 그 막연한 추상을 믿기 때문이다.

이 돈을 찍어서 살포할 때, 한국은행 대차대조표의 대변에 살포된 금액만큼 부채로 기입된다. 차변에는 국채라든가 어떤 형태로든 자산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 만큼 돈(한국은행권)은 한국은행에 대하여 가지는 액면만큼의 무기한 청구권, 즉 한국은행에 대한 채권이다.

이 액면이란 것처럼 추상적인 것은 없다.

영란은행권에 보면, “I PROMISE TO PAY THE BEARER ON DEMAND THE SUM OF (TEN POUND 등)의 “라고 박혀 있다. 그것은 아마 “소지자의 (십파운드 등)에 해당하는 청구에 대하여 지급할 것을 저는 약속합니다.”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지급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 돈을 영란은행권에 갖고 가서 “내놓으시요!”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새 지폐로 교환해 주거나, “뭘요?”하고 되물을 것이다.

영란은행권에 적힌 글을 보면 허무하기도 하지만, 이렇듯 우리는 추상의 금액이 기재된 종이쪽지 하나로 세상을 재고 비틀고, 웃고 우는 것이다. 웃기는 일이다.

반면, 미국의 돈(FEDERAL RESERVE NOTE라고 되어있다)을 보면, “THIS NOTE IS LEGAL TENDER FOR ALL DEBTS, PUBLIC AND PRIVATE”(이 놈의 지폐는 公과 私에 걸친 모든 채무에 대한 합법적인 지급수단이다)이라고 적혀 있다.

이 글로 미루어 볼 때, 채무가 없다면 돈을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빚을 지고, 또 빚을 갚기 위하여 오늘도 직장에 가거나 칼을 들고 남의 집 담을 넘기도 한다. 그래도 빚은 아직 많이 남아서 늘 호주머니는 공허하다.

오늘도 나는 한 그릇의 점심을 빚지고, 그에 상응한 돈으로 빚을 탕감할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빚이 없어서, 돈을 쓸 길이 막연하여, 갈 곳없는 돈은 차곡차곡 쌓인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저에게 채무를 변제하시지요?”라는 것에 다름 아니며, 부모의 사랑과 의무(채무)마저도 채권과 채무로 계량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무심결에 꼬깃한 돈을 자식에게 주긴 하지만, 재화나 서비스 뿐 아니라, 사랑과 우정, 그리고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허다한 감정들 마저 이 세상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 서글프다.

터무니없는 이 사실로 부터 나의 사랑은 아내와 자식이 청구하는 것보다 턱없이 부족하다는 깨닫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은행 등에서 모자란 사랑을 차입하기도 한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마저도 부자에게는 많은 반면, 가난한 나에겐 텅빈 쌀독과 같아서 허기진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베풀기 위하여 외간 여자와 은밀히 눈을 맞추기도 하고, 강남의 룸싸롱으로 가서 짧게 사랑을 소진하기도 한다.

장자연은 저들의 넘치는 사랑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그만 자살하고 만 것이고, 예쁜 여자들은 더 많은 사랑을 퍼부어줄 수 있는 남자들에게 시집가기를 즐겨할 수 밖에 없는 법이다.

아 돈이여~!

참고로 내가 하루동안 세상에 지는 구체의 빚은 다음과 같다.

  • 지하철 왕복 요금 : 2,400원 = 1,200원 x 2
  • 담배 한 갑 : 2,500원
  • 점심값 : 5,000원
  • 계 : 9,900원

아들 놈은 때때로 피곤하다며 택시라도 타는 것 같은데, 돈 버는 아버지는 죽자고 지하철을 탄다. 하루에 집에 지는 빚은 얼마인지 모르지만, 아내가 내 봉급을 차압하는 만큼 상당한 금액이 될 것이며, 나는 늘 가난하다.

20090924

This Post Has 4 Comments

  1. 컴포지션

    결국 우리는 돈에 의해서 이 사회에 빚지고 사는군요.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추상적인 것 까지도 결국은 “돈”이라는 개념에 의해 빛을 바라고 빛을 바라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니,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횡해집니다. 빚을 지지 않으려고 해도 빚을 지게 된다니…

    저는 유학을 하는 관계로.. 부모님께 항상 빚을 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몇일간 저는 커피 두 잔을 2불이라는 가격에 빚을 졌으며 5불짜리 샌드위치 하나를 빚졌습니다.

    1. 여인

      황금만능의 시대에 돈에 대한 사유는 계속 되어야 하는데…
      이래저래 생각해도 요놈의 정체가 모호합니다.

    2. 컴포지션

      흐음… 필요악이라고 해야하나요? 돈이라… 생각만해도 숨이 턱 막히네요. 언젠간 저도 사회에 나가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니 뭔가 삶이 재미없어지네요… 단지 돈만 많이 버는게 목표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목표가 저를 위한 목표가아닌 돈을 위한 목표가 되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

    3. 여인

      돈에 대해서 긍정적인 사고를 많이 하시면 됩니다.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으니, 무슨 좋은 것을 할 것인가 생각한다면, 돈은 하나의 수단이 되겠지요?

      돈을 지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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