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4 22:56 : 무너진 도서관에서

논어가 거의 중반에 도달했다. 20편에 달하는 논어가 언제 끝날 줄 모르겠다. 나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논어를 통해서 이 시대를 바라보겠다고, 동양의 문명에 대하여, 그리고 논어에 덧붙여진 주소들을 읽어가며 고대의 사유에 다가가겠다고, 한글의 도움없이 논어를 독해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문자의 벽과 언어의 벽에서 갈팡질팡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문장을 추리하며, 상식으로 공자가 2500년전에 했던 말들을 해독하고 있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이 자한편에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공자의 솔직한 면모와 당시의 정황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공자 일당이 주유천하를 하던 중이었다.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던 때, 광(匡: 하남성 장항현 부근으로 추정)이라는 곳에서 광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을 고비를 맞이한다. 그때 제자들이 죽을 것을 염려하자, 주 문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 그의 문화는 여기 있지 아니한가? 하늘이 장차 이 문화를 훼멸하려거든 뒤에 죽을 이(공자)가 이 문화와 더불어 할 수 없을 것이요. 하늘이 이 문화를 훼멸치 않을 것이라면 광의 사람들이 나를 어찌하겠느냐?자한-05 :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茲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고 한다.

이 문화(斯文)란 말은 논어 전편에서 이 귀절에만 나온다. 공자의 학문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요순에서 부터 흘러 주 문무왕 주공에 걸쳐 꽃피운 이 문화이며, 이 문화를 펼치고자 주유천하를 한 것이다.

공자가 광의 땅에서 붙잡힌 이유는 일설에는 노나라의 季씨의 가신인 양화(陽貨 혹 陽虎) 때문이라고 한다. 양화가 한 때 광을 침범하여 그곳 사람들이 괴롭혔다고 한다. 한데 공자가 양화와 닮았기에 오인하여 공자를 죽이려고 한다. 양화는 공자와 지독한 악연이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사마천의 사기 중 世家는 왕족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이나 공자의 위치가 막중한 관계로 세가에 편입한다 에는 공자의 어미 안징재가 숙량흘과 야합(혼외정사)하여 '공자를 낳고 숙량흘은 죽었다고 한다. 어린 공자가 아버지가 어디에게 묻혔냐고 물어도 안씨는 알려주기를 기피했다고 한다. 공자는 아비의 무덤을 몰라 염한 어미의 시신을 오부의 네거리에 내놓고 사람들에게 아비의 무덤이 어디있는지 알려달라고 한다. 추라는 고을의 수레끄는 사람의 어미가 숙량흘의 무덤을 알려주어 간신히 합장을 했다'사기 공자세가 : 丘生而叔梁紇死,葬於防山. 防山在魯東,由是孔子疑其父墓處,母諱之也. 孔子爲兒嬉戲,常陳俎豆,設禮容. 孔子母死,乃殯五父之衢,蓋其愼也. 郰人輓父之母誨孔子父墓,然後往合葬於防焉 고 한다.

그후 '삼년상'고대 중국에서는 장례절차는 염하여 즉시 매장을 하지 않고 들에 시신을 눕히고 짚이나 나무가지로 덮어논 뒤, 시신의 육탈이 된 후 뼈를 모아 다시 매장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다 보니 들짐승들이 시신을 훼손할까 여막을 짖고 육탈이 되는 기간인 삼년동안 들짐승들이 다가오지 않도록 하는데, 이것이 삼년상으로 고착된 것 같다 이 끝나지 않았는지, 상복을 하고 있던 중에 잔치를 주관하는 자가 와서 함께 계씨의 잔치에 가자고 한다. 공자는 잔칫집 앞에서 잔치를 주관하는 것도 아닌 것이 라며 양화에게 쫓겨난다. 사기정의에는 노나라의 정권을 쥐고 있는 계씨가 노나라의 글을 쓰고 배우는 선비를 위하여 음식과 술을 준비해서 공자가 더불어 갔는데, 양화가 공자가 어리다고 쫓아냈다고 한다. 일설에는 흘레붙어 태어난 호로자식이 무슨 문사라고 언감생심 노나라의 국정을 농단하는 계씨집을 기웃거리냐고 양화가 문전박대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15살이었던 공자는 학문에 뜻위정-04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을 두었을 것이라고 한다.

양호는 계씨의 가신임에도 계씨를 핍박하고 마침내 노나라의 국정을 좌지우지한다. 그때 양호는 공자에게 자신 밑에서 일하자고 권할 요량으로 만나기를 청한다. 하지만 공자는 이를 물리치고 결국 노나라의 사구가 되어 양호를 몰아낸다.

아무튼 하늘이 사문을 보전하려는 지 공자는 광에서 5일만에 풀려난다.

이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대제'주나라의 관리라고도 하고, 오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간신 백비라고도 함 가 "공자께선 거룩한 이입니까? 어찌 그리 다재다능하오?"하고 자공에게 묻는다. 이를 들은 공자는 대제란 자가 뭔가 아는구나! 난 어렸을 적에 몹시 빈천했거든 그래서 허드렛일을 잘할 수 밖에 없었지만... 군자가 재주가 많다고? 웃기지 말라고 해자한-06 : 子聞之, 曰: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 라고 한다.

공자는 날이 추워진 이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노라자한-27 :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나라가 잘 될 경우, 소인배와 대인의 구분을 할 수 없지만, 국정이 혼란스럽거나 위기의 국면에는 누가 대인인지 알 수 있노라는 뜻이다.

추사는 이 구절을 절취하여 자신의 그림을 <세한도>라고 칭한다.

세한도는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제자인 역관 이상적에게 보낸 그림엽서와 같은 것이다. 추사가 유배를 당하자 그동안 잘지내던 친구들이나 제자들이 다 나몰라라 하는데, 이상적은 북경에 다녀오면서 책을 사서 제주에 있는 추사에게 보내준다. 그러자 추사는 세상에 대하여 은원의 감정을 내비치며, '날씨가 추워지자 어느 놈이 진짜 내 사람인지 알겠다. 바로 너 이상적이야말로 송백과 같은 사람이구나'하는 심정으로 편지 앞에 그림을 그려 보낸다.

나는 추사를 잘 모르겠다.

완당이 붓글씨 잘쓰고, 난을 잘치며, 금석학 방면에 조예가 깊어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해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칭, 조선에서 제일로 유학에 통달한 사람(海東第一通儒)이라고 오만하게 말할 어떠한 근거도 나는 찾지 못했다. 또 무슨 정치적 입장에서 제주도로 유배를 갔는지 또한 알 수 없다. 그리고 얼마만큼 불교에 대해서 아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노론의 영수 집 안(영조의 둘째 딸, 화완옹주의 남편인 김한신의 증손자)에서 태어나, 경화거족으로 부러울 것 없이 자랐고 타고난 머리로 취미삼아 학문을 했다.

책을 통해 본 그는, 감정의 조절이 안되고, 교만하며, 폼생폼사였던 것 같다. 그리고 학문적으로 정약용과 같이 치열했던 것 같지도 않으며, 외국에 대한 지식 또한 피상적인 것으로 바라보인다.

그러니 세한 어쩌고 저쩌고 할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를 보면, 늘 나의 교만이, 나의 어설픔이, 나의 못남을 반성하게 된다.

공자는 이쁜 계집보다 德을 더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자한-17 : 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고 한다. 이렇게 나이브하게 해석을 하면 논어의 권위를 훼손할 수 있다고, 집주에 사씨가 말하길 謝氏曰: 好好色, 惡惡臭, 誠也. 好德如好色, 斯誠好德矣, 然民鮮能之 아름다운 모습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은 성실함이다. 덕을 아름다움을 좋아하듯 좋아한다면 이것은 진실로 덕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백성이 그렇게 하기란 가뭄에 콩나듯 한다고 달아놓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사기의 글을 보면,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영공이 공자를 옆에 태우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면 좋은가 등을 묻지 않고, 부인인 남자(南子)를 옆에 태우고, 공자를 뒷편 수레에 타라 하고 시내를 돌아다닌다. 그러자 영공의 자신에 대한 처사에 존심이 상한 공자가 돌아와 캭하고 가래침을 뱉아내며 한 말'집주: 史記: 孔子居衛, 靈公與夫人同車, 使孔子爲次乘, 招搖市過之. 孔子醜之, 故有是言 이라고 한다. 이 남자라는 여자는 절세의 미모를 가졌던 모양이나 음탕하기로 유명했다. 공자가 남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제자 자로가 그를 알고 불쾌해 하자, 공자는 "내가 그런 부정한 일을 생각했다면, 하늘이 나를 혐오하리라. 하늘이 나를 버리리라"옹야-26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고 자로에게 변명한다.

그러니 이 구절은 "아름다움보다 덕을 더 좋아하는..."하고 번역하기 보다, 범인의 상식에 맞는 "얼굴이 죽여주는 여자 혹은 몸매가 끈내주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산동에 살던 공자가 어느 날 황하를 본 모양이다. 그는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구나자한-16 : 子在川上, 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단순한 감상이 나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이상하다. 나도 논어의 권위에 휩쓸린 것이 아닌지 모른다.

김훈의 <현의 노래>를 읽고 나는 감상평을 이 구절을 따서, "니문아! 소리의 흘러감이 저와 같구나."하고 쓴 적이 있다.

공자는 나이들었다고 민증갖고 젊은 것들이 어떻다 저떻다 말고, 젊은이를 존중하라. 어찌 그들의 앞 날이 지금같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십대 오십대라도 아무 소식이 없는 놈이라면 이것 역시 존중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자한-22 :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 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 고 한다.

이 말은 애들보고 짜식들이 싸가지가 없고 뭐라할 것 없다. 사오십이나 된 놈이 여태까지 한 것이라곤 쥐뿔도 없으면서... 너나 잘하세요! 라고 하는 것 같다.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 나이 쳐 먹도록 한 것이 하나도 읎다. 어찌하나?

20091125

▶ 원문보기 : 논어09 子罕

2009/11/24 22:56에 旅인...face
2009/11/24 22:56 2009/11/24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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