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4/16 15:07 : 그리고 낯선 어느 곳에

백마고지, 아니 그 동산에서

2월 15일 아침, 민통선 북방. 쨍 하던 어제의 냉기는 걷히고 날이 한결 푸근하다. 12시 방향으로 2킬로쯤 떨어진 산 능선을 본다. 거기가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이다. 철책과 벙커 등이 겨울 빛에 하얗게 바랜다. 강원도 쌀의 50%가 난다는 철원평야에는 비닐하우스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북의 평강평야와 철원평야는 산 사이로 이어져 있고, 철원평야는 남쪽으로 동두천, 의정부로 이어진다.

아침을 먹고 차를 몰아 공산당사와 백마고지로 간다. 길에는 차가 없고 사람도 보기 어렵다. 공산당사는 생각보다 적었다. 기둥과 벽의 총알 흔적 또한 세월 속에 녹아 역사라는 것으로 변화되는 것인지 가슴 속에 아련함도 없다. 다 부질없는 이념이지! 죽어간 자만 억울할 뿐.

백마고지. 고지라는 말에 높은 언덕을 생각했다. 눈 앞에는 작은 동산이 있다. 높이가 삼십 미터나 될까? 그 위에 기념탑이 있다. 높다란 기념탑을 떠받치기에는 동산이 애처로워 보였다. 독수리가 겨울의 기류를 타고 동산 위를 흘러간다. 찬 바람 속에 인분 냄새가 난다. 오십여년전 이 고지를 뒤덮었던 주검들의 썩어감이 대지와 세월의 아래를 맴돌다 터진 동토의 틈 사이로 새어나는 냄새인가?

독수리는 왜 이토록 많은가? 독수리는 움직이는 것을 잡지 못한다고 한다. 죽어있는 것, 부패하는 것만 먹는다고 한다. 이제 이 땅에는 저들이 먹을, 죽어가는 것이 없음에도 그들은 햇빛 따스한 곳에서 깃털을 웅크리고 졸고 있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났건만 죽음과 황폐의 흔적을 지우기에는 자연 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비록 폭력과 야만에 얼룩졌다 해도 박토를 갈고 씨 뿌리는 삶의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곳은 삶들이 발목 묶인 민통선 북방.

기념탑의 아래에 산화한 504위의 이름이 새겨진 오석이 있다. 자그마한 오석에 새겨진 이름이 100위 남짓이나 될 까 하여 새어보니 504위의 이름이 다 들어있다. 504명의 육중한 삶의 무게가 저렇게 작은 돌덩이의 표면에 응결되었다가 스쳐 지나는 것이라니……. 죽은 자를 찬하는 碑陰에 조차 빼곡히 들어찬 이름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살았었고 이 곳에서 죽었노라.

고지의 북단으로 간다. 넓은 평야와 산들이 연이어 북으로 달리고 있다. 산 사이로 펼쳐지는 들 위에 섬처럼 이 동산이 하나 있을 뿐이다. 동산은 새참을 따라온 아이가 술래잡기를 하거나 양지에 누워 풀피리를 불기에 어울릴 만큼 아담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이다.

1952년 10월 6일에 9사단(백마부대) 28, 29, 30연대가 이 동산에 있었다. 적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이 호적과 괭과리를 울리며 평야를 따라 내려온다. 머지않아 가을이 저물고 곧 겨울이 오리라. 미움과 증오가 들을 채운 것이 아니라, 몸 저 안쪽에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 그것은 살아있기에 느끼는 것이며, 사라져 부질없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들에게는 자유와 평화조차도 관념이었다. 오지 마라, 나를 적이라고 부르는 자들이여! 포성이 울린다. 처절한 함성이 울리고 누군가에 의하여 방아쇠는 당겨졌다. 짧았던 인생은 김이 피어나는 피를 뿌리며 고지의 아래 쪽 아니면 능선의 위에서 소리치며 사라지다. 몸을 감출 길 없는 고지와 평원에서 자신의 처절한 삶을 부둥켜 안기 위하여 그들 모두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고, 적과 전우가 대지 위로 쓰러져 가는 것을 보다.

전투는 10월 15일까지 10일간이나 이어졌다. 24회의 교전 중에 양측 사상자가 17,000명, 국군 504위 산화, 인민해방군(중공군)이 8,234명이 사망하였다. 한 사람이 누워 자기에 적합한 면적을 한 평이라고 할 때, 집중적인 교전이 있었던 고지의 북단은 불과 이삼백 평, 시체 위에 또 다시 주검이 뒹굴고 포연 속에 피가 내를 이루고 백마고지의 위는 평지가 되었어도 대지는 너무도 의연하다. 天地不仁이라고 저들의 죽음에도 대지는 봄이 되면 꽃을 피우고, 하늘은 푸르리라.

다시 월정리역를 향하여 간다.

2004/04/16 15:07에 旅인...face
2004/04/16 15:07 2004/04/1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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