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기

11월 10일

아침, 출근하여 담배를 피우려고 흡연실에 들어갔다. 담배를 피워물고 창 밖을 보니, 풍경의 넓이가 전 날에 비해 삼분지 일로 축소된 듯 오붓하다. 옅은 구름 밑으로 아침 햇살이 천천히 서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건물과 사물들은 그 햇살들을 빨아들이며 자신들의 형체를 수줍은 듯 드러내고 있다. 사물은 아무런 긴장감도 없이 뚜렷한 데,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밝은 햇빛 쪽이 그림자인 듯 보였고, 먼 곳의 건물이 빛을 받은 가까운 곳의 건물보다 뚜렷하여 원근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런 풍경이 없다면, 세상을 배반했을지도 모른다.

저녁, 퇴근길에 아파트로 들어서는데, 바람이 분다. 헐벗은 나무가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아직 잎이 남은 나무가지는 흔들렸다. 메마른 나뭇잎이 부딪는 소리가 별빛처럼 어깨 위로 떨어졌다.

11월 11일

갑자기 그녀와 헤어진 날이 언제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오후가 되자 붉은 노을이 떠올랐고 그 위로 하늘은 아직 푸른빛이 남았는데 한줄기 비행운이 서쪽으로 자국을 남기며 노을 속으로 침몰했다. 저녁이 다가오는 시각은 늘 장엄하다.

저녁에는 모스크바로 갈 동료와 술을 한 잔 했다. 그리고 심야에 택시를 타고 졸음 속으로 하염없이 달려갔다.

11월 12일

간신히 그 날이 10월 26일 에서 얼마 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았고, 헤어지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나날이 서로를 안타깝게 좋아하면서도 서로를 놓아 주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까지 서로가 주고 받은 마음이 평생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추워진 밤공기 속에 건물들의 불빛은 더욱 뚜렷하다. 여름처럼 불빛이 나른하게 풀어지지 않고, 더욱 어두워진 거리를 야무지게 밝히고 있다.

추운 날씨다.

20091112

This Post Has 20 Comments

  1. 클리티에

    누군가와의 연애는 언젠가 끝이 나죠.
    그것이 결혼이든, 헤어짐이든..
    그러나 그 끝이 어떻든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아닐거에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마음처럼 정답이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연애를 해본 적이 많이 없지만,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막연히 깨닫게 되는것이 있었어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것은 사람과의 일들은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시간이 흐르면 머릿 속의 기억이 되어 점점 지워지는 기억도 있을테고,
    시간이 흐를수록 어떠한 기억보다 뚜렷하게 기억되는 것이 있네요.

    여인님의 글을 곱씹으며, 저도 옛 흔적에 빠져 봅니다..

    1. 旅인

      지금 이 시절에 많이 사랑하고 아파하고 행복하고 그리워하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이니까요.

  2. 善水

    너무 흔하여 흔적조차 없이, 너무 가벼워 바람 결에 휘날리며….

    오늘에야 마침내 과거가 폐허를 버렸으니, 무너지게 마련인 사물의 중심으로 폐허를 다시 인도해주는 저 심원한 힘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 다른 마음 쓸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아무튼 나 없는 빈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以無所得故菩提薩陀依般若波羅密多故心無?碍無?碍故無有恐怖遠離顚倒夢想究竟涅槃

    1. 旅인

      저은 어제 IRIS를 보다가 졸려서 졸도했습니다. 간만에 좀 잔 것 같습니다.

      선수님 요즘 잠이 부족해서 어떡합니까?

    2. 위소보루

      왜 지금까지 선수님을 전 착수라고 읽고 있었을까요 ㅡㅡ;;
      여인님 댓글을 읽다가 선수 라는 글을 보고 다시 보니 선이군요 하하

    3. 旅인

      컴퓨터를 하면서 간혹 불편하다고 느끼는 때가 바로 한문의 입니다.

      변경을 한자로 치면 邊境이라고 나오고 한자의 글꼴들도 모양들이 안좋아 마음에 안드니…

      선(善)과 착(着)자의 분간이 힘든 것 같습니다.

  3. 善水

    다맞췄습니까?

    포스팅에 엉뚱한 소리해서 죄송합니다
    또 밤샜더니 제정신이 아닌듯함다 ㅋ

    오늘은 늦게 퇴근하시는건지..

    1. 旅인

      예 다 맞췄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빙고게임 당첨상품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몰래 주소라도 보내주신다면 호옥시~ 크리스마스 때 짠하고?

  4. 쏘울

    오랜만에 오다보니 블로그 스킨도 바뀌고 글 내용도 얼핏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한참 팔팔한 이팔청춘의 일과를 적어 놓은듯하여 잠시 여기가 어디지 라며 두리번 거렸습니닷 ㅎㅎ

    글 잘봤습니다.

    1. 旅인

      가끔은 젊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쏘울님. 어제도 잠깐 들러서 Dos관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마음에는 드는데 제 컴퓨터가 맥이다 보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요즘 몹시 바쁘신 모양입니다. 아무튼 좋은 일이겠지요?

    1. 旅인

      아닙니다. 그 때문에 이 계절이 더욱 그윽한지도 모릅니다.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5. 위소보루

    졸음 속으로 하염없이 달려간다라는 말이 좋습니다. 제가 항상 그렇거든요 ^^; 술을 드셨다는게 동료분이 모스크바를 가시게 되어 드신거군요

    11월 12일의 일기는 참 오늘 날씨와 어울리는 듯 합니다.

    1. 旅인

      오늘도 또 한잔을 해야 하니 또 졸음 속으로 달려야 하나 봅니다.

      날씨가 좀 을씬년스럽네요.

  6. 善水

    주말에 푹 쉬고 맛난것 먹고 충전하였습니다.^^
    여긴 주말내내 날씨가 따닷하고 참 좋았습니다 주말엔 별보러 갔는데 안개가 자욱해 못보고 돌아왔어요 근데 집에 와보니 하늘에 별이 총총 더많이 보이네요 ㅋ

    1. 旅인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멀리갔는데… 꼭 파랑새 이야기 같습니다.

  7. 善水

    와~ 얏~호~!!!

    제 주소입니다.
    6111 Springford Dr. Apt N-11
    Harrisburg, PA 17111
    USA
    김나경 ^^

    1. 旅인

      축하드립니다.
      두가지 싸이즈가 있고 두가지 색상이 있는데, 일반과 패스포드 싸이즈 그리고 브라운과 블랙이 있습니다. 마음에 드시는 조합을 알려주시기를… ^^

  8. 善水

    엇 저는 일반과 브라운이 좋네요 그런데 여인님 노트를 정말로 받게 되는것인가요?? ㅎㅎ

    저는 그냥 여인님 자필로 된 크리스마스카드 한장이면 좋을것 같습니다 시서화 삼종세뜨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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