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2 11:37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동생은 화내지 않는다. 형에게도 누나에게도 어머니나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바깥에 나가서도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는 착한 동생이다. 하지만 녀석은 나에게만 인상을 썼고 화를 냈다. 분명 나에게 사람의 염장을 지르는 구석이 있긴 있나 보다. 다들 나만 보면 화를 내곤 하니까 말이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보고 제임스 딘 닮았다고 하셨다. 잘생겼다는 의미는 물론 아닐 것이다. 늘 불만이고, 삐딱하다는거다. 유년의 사진을 보면 어머니의 말씀이 조금 이해는 된다. 사진에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고 턱주가리를 목에다 대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 뿐이다. 눈을 찌푸리는 것은 햇빛이 눈부시기 때문이었지만, 식구들은 늘 폭탄을 안고 사는 아이의 표정이라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보고 곰같다고 했다. 미련하다는 것 뿐 아니라, 무슨 꿍꿍이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뜻이다. "크레물린같은 놈!" 하긴 냉전시대에 소련은 백곰같은 것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렇다고 어린 나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야단을 치시거나 묻는 말에 대답하기가 늘 귀찮았고 "그냥요!"라고 했을 뿐이다. 당시 나에겐 논리란 없었다. 충동과 이른바 사고라는 것 밖에 없었으니까.

왜 그애를 때렸니? - 그냥 주먹이 나갔어요. - 왜 그냥이냐? - 얄밉게 생겼잖아요? -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니? - ......

왜 유리창을 새총으로 쏘았니? - 유리창을 안 쏘았어요. - 그럼 왜 그 집 유리창이 깨졌니? - 전 그냥 새 집을 맞추려고 쏘았는데, 그만 돌이 유리창으로 날아가던걸요?(이 이야기는 분명 내 이야기가 맞다.)

대충 그런 식이었고, 사고를 쳐도 나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형과 어렸을 적에 싸움이 붙었는데, 끝까지 달려드는 나에게 미친 놈이라고 한 뒤, 형은 나와 상종하기를 포기했다. 누나는 그나마 좀 친하게 지낸 셈인데, 그것은 서로 이기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생? 동생은 아주 어렸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 쯤이 되자 내가 아주 형편없는 형이란 걸 알아차리고 나와 앙숙이던 나의 형과 붙어 놀아나기 시작했다.

친척이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별난 아"라고 했다. 동두천에 계시던 외할아버지께서는 방학이 시작될 즈음이면,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 머물던 막내 이모에게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동두천으로 올 때 다른 놈은 다 괜찮지만 제발 나만은 데리고 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신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떻게든 막내이모님을 꼬득여 집 안의 우환거리인 나를 딸려보내시곤 했다.

막내이모는 이상하게 나를 좋아했다. 내가 눈도 동그랗고 피부가 검은 탓에 양공주가 낳은 튀기같아서 동두천 시내에 데리고 나갔을 때 얼마나 챙피했는지 아느냐고 하면서도, 과자를 사거나 하면 조카 중 나의 것부터 사곤 했다.

우리는 막내이모를 녹두이모라고 했다. 녹두장군 전봉준처럼 키가 작아서 녹두이모라고 했는데, 집 안에서는 대한민국에 녹두이모보다 더 예쁜 소녀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녹두이모와 내가 동두천 시내를 둘이서 거닌다면, 둘 다 양공주가 낳은 튀기들 같았겠지만, 흑백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종종 외갓집에 갔어도 동두천 시내에 나가본 적이 한번 밖에 없는 것은 이런 외모 상의 문제였을 것 같다.

녹두이모와 함께 외갓집에 들어서 큰 절을 올리면, "쟈는 와 델꾸 왔노?"라는 말이 쏟아졌고, 나는 늘 내가 미운 털이 박힌 이유를 생각해보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당뇨병 때문에 늘 인슐린 주사를 맞으시면서도 단 것을 유별나게 좋아하시는 외할머니께서는 "야야! 이리 온나. 이거 무으라!"며 강정과 같은 것을 내놓으시곤 했다.

그렇다고 국민학교도 안들어간 내가 뭘 대단한 짓을 한 것도 아니다.

교장 선생님의 외손자로서 교장선생님의 품위에 약간 손상이 갈 정도의 사고를 몇번 친 것으로 기억하는데, 외갓집과 학교는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다. 한번은 교무실에 외할아버지를 찾아갔다가 나에게 장난을 친 어느 선생님을 향해 바보, 똥개라는 욕을 해대고 대걸레를 휘둘렀다거나, 또 한번은 월요조회 때 운동장 단상에서 연설을 하시는 외할아버지가 멋있어 보여서 "할아버지~"하고 불렀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단상 밑에까지 가 "할아버지~!"하고 있는 힘껏 소리를 쳤고 운동장이 웃음바닥이 되었다는 것이다.

몇번의 그런 일들이 교장선생님의 대단한 외손자로 온동네에 각인시켰고, 게다가 동네 아이의 코피를 터트리거나, 나를 놀리고 도망간 아이 집의 담 너머로 연탄재를 집어던진다거나 했고, 결정적으로 학교 뒤에 있던 저수지에 멱을 감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수렁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은 외할아버지께서 나라고 하면 그만 기겁하게 했다.

그것 외에 외갓집에서 하던 매점에서 과자부스러기를 좀 훔쳐먹거나, 새 공책과 볼펜을 가져다가 툇마루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외할아버지가 "그것 어디서 났노?"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매점 안에 많이 있어서 가져왔어요."라고 대답했고, 또 열심히 공책 위에 뭔가를 그려대곤 했다. 그런 나의 모습은 늘 외할아버지에게 대책이 안서는 외손자, 가까이하면 안될 놈으로 만들었다. 물론 다음에 외갓집에 가면 "매점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된다"라는 엄명이 있었지만, 방학이 되어 철창이 내려진 좁은 매점 안은 은밀하고 비니루에 포장된 물건들은 반짝반짝 어둠 속에서 나를 유혹하곤 했다.

또 한가지가 있다면 외할머니께서 동네사람들과 민화투나 도리짓꼬땡을 하시다가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하시는데, 막걸리의 달큰한 냄새 때문에 주전자 뚜껑으로 몇잔 정도는 마시고 약간 해롱대면서 남은 술을 갇다드렸다는 것이다.

뭐 이런 일 외에도, 잘 나오던 라디오도 내가 채널을 돌리면 손잡이가 뚝 부러진다거나, 활활 타오르던 아궁이에 연탄을 갈면 불이 꺼진다거나, 밥상을 나르다 넘어져 식구들 한끼 식사가  날아가버린다거나, 똑같이 사준 책가방을 다른 자식들은 몇년을 써도 새 것인데, 내 책가방은 1년이면 걸레가 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새로 사달라고 칭얼대기나 하고, 돈 심부름을 시켰는데 가져온 돈의 액수가 이유없이 적다는 것(그렇다고 내가 중간에서 착복한 것은 아니다. 아마 흘렸거나 나에게 돈을 건낸 사람이 삥땅을 쳤을지도 모른다) 등등이 나의 인격적 결함에 가세해서 사람들을 열받게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부모님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것은 공부를 지지리도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느 짝에도 써먹을 구석이 없는 순불량품이었다.

하지만 동생이 나에게 화를 내던 싯점은 그보다 아주 오래된 후의 일이었고, 당시 나는 타의 모범이 되기에는 약간 모자란 수준의 그럭저럭한 사람이 된 이후였다.

20100202

2010/02/02 11:37에 旅인...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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