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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를 쓰지만 너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좋을 지 모르겠다. 너의 이름은 너무 단순하여 너를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너를 부르고 싶었다. 아주 길고 긴 이름. 네 이름을 부르다 보면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오르고, 때론 행복과 슬픔이 어우러지며, 그리움으로 변하는 그런 이름이 나에겐 간절하게 필요했어. 오늘은 더 그렇군.

어리석게도 사랑과 우정이 초라한 열정에 뒤덮혀 아뭇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하면서도, 몽매한 탓에 대지와 네 속에 나를 놓아두지 못하고, 덧없는 관념과 같은 것, 지식과 같이 뼈와 살이 없이도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창문을 닫고 세상과의 관계를 끊은 채, 책을 잔뜩 쌓아놓고 살아갈 때가 있다.

지난 여름, 열 아홉살의 나에게 퍼부어진 자유분방한 시간들 속에서, 초라한 갈증조차 이 세상이 해결해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더한 갈증 만 가슴 속에 자라나는 것을 보고, 세상의 구석으로 돌아가 학교와 집, 그리고 집 앞의 공터와 마당, 그리고 초라한 책상 위의 녹슬고 있는 책 속에서 머물기로 했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품점 유리 그늘에 비친 나의 초췌한 몰골을 보며, 먼지처럼 덧없는 글자 속에 묻혀 아무 것도 건져내지 못한 나를 발견했어.

배를 타고 섬으로 왔을 때, 헐벗은 나무가지가 하늘 아래 드러났고, 쓸지 않은 낙옆들은 메마른 섬 위에 가득했다. 가을이 가버렸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지 않아 겨울이 올 것이고, 추위가 거리를 덮칠 것이다.

친구들은 섬 위에서 소리치며 공을 차고 놀았지만, 가을을 놓치고 말았다는 자괴감 때문인지 즐겁지 않았다. 오후의 미광(微光) 아래,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의 끝에 헐벗은 가지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풍경이, 나의 우울 속으로 먹물처럼 스며들었고, 가슴의 공허 속으로 한강 중류의 좁은 산과 산 사이로 떠오르던 노을이 삼분지 일 쯤 들어 앉았다. 가을의 끝은 단가(短歌)처럼 아름답다.

밖에는 비가 내려. 지금은 11월의 새벽 두 시.

불이 들지 않는 방갈로 안에는 친구들이 서로를 껴안고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며 잠을 자고 있다. 메마른 낙옆 위에 내리는 비는 처음에는 싸아하고 흐느끼더니, 낙옆이 비에 젖었는지 빗소리는 잦아들었다.

추위 때문에 몇번인가 깨어난 나는, 어둠 저편에 있는 새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양을 건너온 밀림의 소리였고 외로움이 살(肉)을 갈라내는 소리다.

잠결이지만 '괴로운 것인가? 저토록 처절한 소리가 본연의 소리인가? 갇혀 날지 못하는 운명을 저주하는 것인가? 아니면 깃털 위에 형벌처럼 차갑게 내려앉는 빗줄기 때문일까?' 하고 물으며 다시 잠에 들기를 기다렸다.

끄와악! 꽈아악!

결국 처절한 비명소리에 깨어났다. 살과 뼈 사이에 추위가 박혀 더 이상 잠들 수가 없다.

깨어나 울음소리를 기다렸지만, 새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꿈 속의 울음이었을까?

친구들의 짙은 살냄새로 꽉 들어찬 방갈로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려섰다.

마지막 남은 계절이 가을비에 빙점으로 젖어가는 미지근한 냄새가 났다.

빗줄기는 보이지 않고, 얼굴과 팔뚝에 섬뜩하게 반짝일 뿐이다. 그리고 이명처럼 우는 빗소리!

새는, 울부짖던 새는, 어디 있을까? 새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괴로움에 죽어버렸을 지도 몰라.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한번도 제대로 살지 못했기에, 삶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과 같은 지도 모른다. 사랑과 같은 것, 우정 그리고 흘러 지나가는 행복들을, 한번도 진정으로 껴안지 못한 탓에, 모호한 관념에 불과한 것이라 흘려버리고, 거짓된 열망을 쫓아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진실이지만, 나는 거짓으로 가득한 지도 모른다.

새를 찾아서,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섬의 끝으로 갔다. 잡초 끝에 맺힌 수분이 발목을 적신다.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로 외롭다.

어두운 섬의 들에서는 가을날의 끝에 사라질 냄새들이 피어올랐다. 새벽이 밀려오는 느릿한 냄새, 낙옆이 썩어가며 내는 얕은 술내음, 그리고 어둠 속에 번지는 적막 속에 고요의 소리.

밤은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이며... 새를 찾아낼 수 있을까?

풍경은 어둠 속에 갇혀 있다. 시간마저 어둠의 볼모가 되어 있는지도 몰라. 단지 가느다란 빗소리의 아우성들이 낙엽 위로 내려앉을 뿐... 그 소리는 어둠을 씻어 내리기 위한 신음같았어.

강 가로 다가 갈수록 어둠은 더욱 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 가운데로 더욱 깊은 혼돈의 웅덩이가 불쑥불쑥 솟아올랐고, 두려움으로 걸음이 흐트러졌다.

뜰 저편에 화톳불이 보인다.

붉은 불의 음영을 뒤집어 쓴 채, 암울과 무망에 절은 듯한 두 사람이 쪼그리고 불 앞에 앉아 있다. 그들의 옆을 지난다. 화톳불 옆의 나무탁자 위에는 음식물과 술병들이 어지러웠고,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밤의 저 쪽에서 불쑥 나타난 나를 보자 절망스러운 표정을 떠올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불을 보았다. 화톳불은 빗물에 젖어 생기없는 붉은 색으로 단조롭게 흔들렸고,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나에게 그들이 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가던 길을 다시 간다.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발끝에 스치는 잡초소리와 어둠이 이끄는대로 갈 뿐이다.

얼마 가지 않아, 숲의 메마른 가지 사이로 희뿌연 광막이 떠올랐다. 안개 속에 결박된 빛이 아우성치고 있다. 섬 건너편의 가로등들로 부터 날아온 빛이 안개에 갇혀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다. 섬에서 강으로 흘러드는 차디찬 또랑물 소리도 들린다. 싸늘하게 식은 섬의 끝에  부딪힌 북한강은 하얀 김을 토한다. 그리고 안개 속에 김과 빛이 다시 뒤채였다.

빛을 담은 안개는 차갑게 익은 어둠으로 꽉찬 섬 안으로 내습하지 못하고 강변에서 서성댔다.

꿈을 꾸듯 빛의 장막을 뚫고, 절반의 두려움과 절반의 영탄으로 빛 속으로 나는 들어섰어.

형광등의 아르곤 가스 속에 들어선 것처럼 강변은 축축하고 온통 빛이다.

강의 칠흑같은 나신으로부터 하얀 김이 올라왔다. 하얀 김은 또 다른 김과 섞이고 추운 대기 속에 풀어지면서 안개가 된다. 강 건너편 강변도로 위의 가로등에서 날라온 빛이 안개의 입자에 부딪혔고 다른 입자로 반사되며, 다시 섬의 외등빛과 함께 비벼진다.

그리고 강변의 숲과 가지를 빛으로 감쌌다.

안개에 갇혀 날아가지 못한 빛은, 안개 속에 산란하고 또 산란된 빛을 잉태하며 빛의 덩어리가 되었다. 빛의 덩어리는 안개로 풀리며 춤을 추듯 검은 강물을 따라 흘려갔고 섬 주변으로 풀려지고 스민다.

잎이 진 은행나무의 단조로운 가지와 미루나무, 은사시나무의 가지들이 섞여 빛을 거스르고 있다.

빛 속으로 들어가자, 유광체라도 된 것처럼 내 몸에서 분말같은 빛 조각이 떨어져 내린다. 팔뚝에도 빛이 어리고 조만간 모든 세포가 빛으로 변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빛에 감싸여 희미해져 가던 나는, 뚜렷한 외로움을 마주했고, 그 끝에 있는 적막 속으로 들어가 젊은 시절에 보듬어야 할 마지막 낱말을 떠올렸던 같아.

짧디 짧은 너의 이름을 부르며, "나 지금 여기에 있어."라고 강 저쪽을 향해 소리쳤어.

그 목소리는 믿을 수 없게 애절했고, 그 소리가 다시 내 가슴에서 울렸다.

있지도 않은 시간에, 존재하지도 않은 장소에서, 빛과 가랑비에 젖은 강물소리 속으로 스며들어가 뒤섞이는 풍경 속에 나의 생각을 흘려버리자, 다시는 구체(具體)의 육신에 깃들어 거칠고 자명한 현실로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후, 수억년동안, 끝없는 어둠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궤도를 지나가는 행성과 같은 외로움이 끼쳐왔다.

미안하게도 나는 사랑과 같은 것을 믿지 않았어.

잡을 수 없고 순간적이며, 자신의 사랑조차 가늠할 수 없으며, 좋아함과 사랑의 경계조차 그을 수 없는 것, 서로 살을 섞고 나서야 간신히 그 미끄덩한 실체를 확인하고 쾌락으로 접어들거나, 그만 갈망이 사라져 쓰레기통으로나 던져져버리는 그러한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것이 타인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 피고 지는 것임을 나는 알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 내 가슴은 영원하고 단일한, 통제될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은 감정에 꽉 차서 빛과 안개로 가득한 섬의 끝으로 밀려온 것만 같아.

한번도 너를 위하여 노래를 불러주지 못했던 나는, 지금 여기에서, 너의 부재 속에서, 뚜렷한 너의 현전을 받아들이며, 온몸의 밑바닥은 뒤집어져 심장이 밖으로 나오고 살갗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통증과 기쁨으로 정신이 얼얼하다.

사랑하거나 묵혀두었던 가슴의 진실들을 퍼올려 편지에 써서 부쳐야 할 이 가을에, 너를 방치해 둔 채, 하잘 것 없는 책 속에 코를 박고 지내왔다는 어리석음에 치를 떨었다. 아랫도리가 시리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며, 이 밤의 온갖 것들로 부터 너의 향기를 느끼고, 내 귀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너의 속삭임을 듣는다. 지금 나는 너와 보낸 온갖 시간들을, 순간 속에 응축시키고, 폭발시킴으로써, 영원의 끝에 있는 곳까지 다가갈 것 같다.

이 감정을 너에게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노을이 서울의 서편 낮은 들 위를 채우던 어느 날, 친구의 창 밖에서 친구의 피아노 소리를 기다렸던 적이 있어. 한시간인가 서성거린 끝에 피아노 소리가 들렸지. 그 순간 친구와의 우정은 이미 가버렸지만, 그보다 더한 우정이 내 가슴에 차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더한 우정이 가슴을 채웠지만 더 이상 해맑은 웃음을 함께 나눌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 그리고 앞으로 둘 사이의 우정이 더 이상 향기를 지니지 못할 것이며, 순수를 잃어버림으로써 현명해지거나 타락하는 것이라는 느낌 탓에 먹먹했던 그때의 슬픔과, 지금의 이 감정은 많이 닮아있다.

교정기를 반짝이며 웃음을 물고 있는 너의 입술과 알맞게 살이 오른 허벅지, 무관심이 담겨져 나로부터 약간 멀어져 있는 그 눈, 이 모든 것이 나뉘어 질 수 없는 너의 실체이며, 내 욕망의 뿌리라는 것은 미치게도 사실이다.

지난 여름과 가을, 의도적으로 방황을 했다.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않고 단지 생각만 하기 위하여, 뚜렷하고 전일한 탓에 전혀 글로 쓸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쓰고자 했던 탓에, 비로서 시작한 나의 젊은 나날들은 그만 속절없이 흘려가버렸고, 그만큼 나는 말라갔다.

때로 너는 장난처럼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내 가슴의 떨림에 솔직하지 못했던 나는 네 말을 믿지 않았어. 나의 터무니 없는 불신은 너를 끊임없이 외롭게 했던 것 같아. 시간이 흘러도 옹졸한 껍질에 갇혀 있던 나의 곁에서 외로움에 수줍게 떨며 장난처럼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너를, 가슴에 품어주지 못했던 죄악을, 무지요, 이기심 탓이라는 말로 나는 얼버무릴 수 밖에 없다. 내가 지닌 절망을 이해하지 말고 그만 용서해주기 바래.

이제는 너의 갈증을 내 가슴 속 깊숙이 받아들여 서로가 무화되어 더 이상의 애달픔이 없는 상태까지 표류하고, 천년처럼 기나긴 입맞춤 속에 너의 속에 스며들 수 있을 것만 같아.

그동안 욕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어. 욕정없는 사랑의 공허감, 부딪힐 육신없는 허무, 대상없는 사랑은 인간의 땅에 어울리지 않는 가련한 소망이라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촉촉이 젖은 너의 손과 풍성한 가슴을 취하지 않는다면, 사랑이란 가식과 절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차디찬 돌을 집었다. 눈으로 보고 만지고 그 느낌이 가슴까지 차오를 때까지, 그래서 드디어 광막한 세계를 맞이하고 교호하는 것이다. 탐욕에 가득한 입맞춤으로 너를 맞이해야만 비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한동안 빛 속에 있었다.

이미 비는 그쳤다. 안개도 많이 줄어들고 빛이 섬의 내륙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졸음이 온다.

돌아가 친구들의 체온에 몸을 비비고 자야 할 것 같다. 돌아섰다.

강변 언덕 위에는 추위에 깨어난 친구가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않고 친구의 옆을 지나 낙엽으로 가득한 섬의 뜰로 내려섰다.

"이제 돌아가 자려고?"

친구의 말에 입에 울음이라도 물고 있었던 것처럼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

그 때 섬 저쪽에서 추위에서 깨어난 새가 다시 비명을 지른다.

끄와악~

20100225

2014/03/18 16:22에 旅인...face
2014/03/18 16:22 2014/03/1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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