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무원 혹은 이방인 vs 사의 질주

※ <공포의 보수>를 워낙 어린 시절에 보다보니 <사의 질주>라는 이름으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어서 그냥 <사의 질주>로 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중남미 환상 문학 중 멕시코 작가 환 호세 아레올라의 <이방인>이란 단편을 읽었다. 아니 <역무원>일지도 모른다.

이 단편을 읽으니 <死의 질주>라는 아주 오래된 영화가 떠올랐다. 너무 어릴 때 보아서 <단추전쟁>처럼 있었던 영화일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어머니는 주말의 명화가 시작되기 전에 좋은 영화면 “이 영화는 꼭 보아야 하는 영화다.”하셨고, 어떤 때는 “조금 있으면 주말의 명화한다.”며 초저녁 잠에 든 나를 깨우시곤 했다.

누구나 일찍 자던 시절, 어머니와 나는 자정이 다 되도록 주말의 명화를 보았다. 흑백TV를 통하여 무수한 영화를 보았지만, 어머니가 주목해야 한다는 <死의 질주>는 인간이 봉착하는 한계상황이 초래하는 절망의 무시한 그늘을 어린 나에게 처절하게 각인시켰던 것 같다.


아레올라의 단편 속에는 한 사내가 기차를 타기 위하여 황량한 기차역으로 온다. 하지만 떠나야 할 시각이 되어도 지평선 이쪽에서 저쪽으로 사라지는 철로 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역무원이 나타난다.

사내는 열차를 타고 당장 내일 T에 가 있어야 하지만, 역무원은 열차가 언제올 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열차는 몇분 후, 아니면 몇일 후, 아니면 몇년이 지난 후 알 수 없기 때문에 숙소를 월세로 빌리고 오랫동안 머물 준비를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한다.

내일이면 T에 당도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언제올 지도 모르고, 설령 온다고 하더라도 어디로 갈 지를 알 수 없는 열차를 놓고, 역무원과 이방인은 지리한 대화를 나눈다.


<死의 질주>의 시작은 이러하다. 흑백이라 색을 분간할 수 없지만, 야자수 몇그루 밖에 없는 하얀모래밭 위에 활주로가 있고, 쌍발프로펠러 비행기가 그 활주로에 내린다.

그곳은 대양 가운데 있는 섬이다. 비행기를 타고 섬으로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범법자들이거나, 빚에 쫓겨 온 도망자들이다. 그 섬에 들어서기 위해서 여권이나 비자가 필요치 않았기에, 쫓기는 자들은 무작정 그 섬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고 모래바람만 부는 활주로에 부려진다.

도망자들은 그 섬에서 또 다른 곳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요량으로 기착하지만, 조만간에 자신들이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섬에 당도한 도망자들의 운명의 공식은 거의 같다.

무사히 섬에 도착한 그들은 체포될 위기에서 벗어난 것에 안심하며, 활주로 옆에 널판지로 지은 낡은 호텔에 들어가 술을 한잔시키고 당분간 묵을 방을 예약한다.

그들은 호주머니 속에 든 돈을 가늠하며, 황량한 섬을 한바퀴 둘러본 뒤, 다음에 올 비행기를 타고 지구 어디를 가더라도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느긋한 웃음을 떠올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쳐온 곳으로 돌아가는 항로 외에 다른 곳으로 가는 비행기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다면 체포될 것이 뻔하기에, 하얀 모래밭과 몇그루의 야자수 밖에 보이지 않는 황량한 호텔방에서 가진 돈을 몽땅 탕진할 때까지 머문다.

돈이 떨어진 그들은 호텔방에서 가차없이 쫓겨나고, 그 후 새로 섬에 도착한 도망자들의 뒷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그들이 흘린 담배꽁초나 남긴 음식물을 탐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런 생활을 거듭하다보면, 차라리 돌아가 체포되고 감옥에 가는 것을 희망하게 되지만 그들에게 돌아갈 비행기 삯은 이미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야자수 그림자 아래에서 하루종일 하얀 모래밭을 바라보거나, 멍청한 도망자가 활주로에 내리는 것을 기다리는 일 밖에 없다.

그들은 그만 석방의 날짜마저 없는 최악의 감옥에 갇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레올라의 이방인의 내용은 <死의 질주>보다 긍정적이다.

열차가 언제 올지, 어디로 갈지, 잘 나가던 철로가 중간에 뚝 끊어져 있다던지 하는 엉망인 열차수송시스템 자체가 승객들을 전혀 예상치 못하는 곳에 머물게 하고, 부려놓게 되며, 그 곳에 머물게 된 사람들은 새로운 마을을 만들거나, 심지어는 엉망인 열차운행시스템에 불만을 가진 승객들을 감시하는 첩자들을 대거 양성하게 되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생산적인 면이 있다.


<死의 질주>에서는 한번 섬에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섬을 벗어나지 못한다. 갈 곳 없는 도망자들은 서로 힘을 합하여 삶의 터전을 만든다거나 하지 못하고 오로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것만 꿈꾸며 활주로 주변을 배회한다. 하염없이 소모적이다.


아레올라의 이방인이 늙은 역무원과 밤새도록 대화를 통해서 열차가 오는 것을 거의 체념하게 된 즈음, 멀리에서 기적소리가 울린다.

거짓된 이야기로 이방인을 밤새도록 괴롭혔던 가증스런 역무원은 기적소리를 듣자 도망친다.

그는 “내일이면 당신이 가고자 하던 그 유명한 역에 도착할 것입니다.”하고 소리치며, 이방인이 가려는 역의 이름을 다시 묻는다.

목적지가 T였던 이방인은 갈 곳을 잊었는지 X라고 대답한다.

랜턴 불빛과 함께 역무원은 새벽 저쪽으로 사라지고, 기차는 그리스도가 요란하게 강림하듯 다가오기 시작한다.


<死의 질주>는 아무 것도 바랄 수 없고, 아무 곳으로 갈 수도 없는 절망의 끝에서 본격 시작한다.

도망자들이 배회하는 섬의 한쪽 끝에는 유전이 있다. 유전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석유회사는 진화를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강력한 폭발을 일으켜 공기를 차단하여 불을 끄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소에 함침시킨 다이너마이트로는 기대한만큼의 폭발력을 낼 수 없다고 판단한 회사는, 섬의 한쪽을 완전히 뭉그러트릴 만큼의 니트로글리세린을 실은 짚차 두대를 활주로 위에 내려놓고, 니트로글리세린을 운반할 사람을 모집한다.

내건 조건은 운반에 성공했을 경우, 섬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과 약간의 돈.

섬을 떠돌던 자들 모두 니트로글리세린을 운반하겠다고 몰려든다.

4명인가 6명이 선발된 것으로 기억한다. 선발된 자들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행운이 따라준 것이라고 환호하며 짚차에 올라타고 섬의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즉 죽음의 질주.

섬을 벗어날 수 있다고 희희낙락 출발한 그들이 밀림으로 들어서자, 절망이라는 존재의 의미의 문제는, 생존이라는 야멸찬 것 앞에 턱없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약간의 충격만 가해져도 폭발해서 자신들을 가루로 만들 니트로글리세린이 담긴 유리튜브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점차 공포의 나락에 빠져든다. 바퀴가 한번 돌 때마다 숨이 멎고, 길 위에 놓인 자갈 하나 하나가 그들의 생명을 죽음 사이로 출렁이게 했다.

새들의 지저귐이나 길에 마주치는 개울이나 첩첩히 그 끝을 알 수없게 깊은 밀림은 아름답지만, 그들의 생존 앞에서는 지옥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기에 니트로글리세린이 흔들리지 않도록 핸들을 꽉 부여잡고 밀림 속으로 밀림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수렁에 빠진 짚차를 건져올리다가 타이어 밑에 깔려 죽는다거나, 공포의 무게에 짖눌려 도망을 가려다 계곡에 추락하여 죽는다던지 차례로 죽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길에 휩싸인 유전 앞에 짚차는 도착하는데…

나는 더 이상 그 영화를 기억할 수 없다.

20100331 작성부분

영화의 이름을 알았다. 영화의 이름은 <死의 질주>가 아니라,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다. 1953년 作인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보면,

“중앙 아메리카의 작은 마을 라스피에드라스. 일거리라곤 전혀 없는 이곳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우범자와 실직자들이 우글거린다. 코르시카 출신의 떠돌이 마리오는 이곳 술집의 웨이트리스 린다, 밀입국한 범죄자 조와 친하게 지낸다.
어느 날, 산속의 유정에서 화재가 일어난다. 석유 회사는 진화 작업에 사용할 니트로 글리세린을 운반하는 위험한 일에 2,000 달러의 상금을 건다. 마리오는 빔바, 루이지 등과 함께 선발되지만 네 명중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조가 마리오와 짝을 이뤄 떠나게 된다.
아주 약한 진동에도 폭발한다는 니트로 글리세린을 두 대의 트럭에 나눠 실은 이들은 온갖 장애를 극복하며 산사태로 엉망이 된 산길을 넘어 불타는 유정으로 향하는데…”라고 쓰여있다.

참고> Le Salaire de la P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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