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30 01:00 : 무너진 도서관에서

1.

두달 전 쯤 아내와 함께 안양 근처의 백운호수에 간 적이 있다.
아내의 친구가 의왕으로 이사를 갔고 그 김에 부부가 함께 백운호수가의 식당에서 저녁을 하자는 제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군포에서 신혼생활을 했던 우리는 그때의 백운호수를 생각하고 그곳에 있는 식당이야 널판지같은 것으로 대충지어놓고 메뉴라곤 파전이나 닭도리탕이 전부 아닐까 하며 백운호수에 당도했을 때, 20년 이상의 세월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호수 주위로 대로들이 쭉쭉 나 있고 깨끗한 건물들이 호수를 바라보고 세워져 있는데 대충 보기에 레스토랑같았다.

우리가 도착한 한식집은 언덕 위에 전원주택처럼 지어진 집이었고, 시내의 한정식집보다 음식이 더 정갈하고 맛갈스러웠다.

아내 친구의 부부는 일면식이 있었기에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아내의 친구는 우리가 군포에 살 때, 그리 멀지 않은 포일리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 자주 놀러왔던 그녀는 대충 알지만 남편은 한번 밖에 만나지 못했다.

우리가 군포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을 때, 아내의 친구는 이혼을 했다.

그녀의 남편은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고 둘 사이의 애정도 좋았고 아이도 잘 자라 주었지만, 문제는 노름이었다.

노름 끝에 봉급이 차압되고 아파트마저 노름빚에 날라갔지만, 남편은 다시는 노름같은 것은 절대로 안하겠다며 몇번을 빌고 난 후 다시 경마장과 노름판을 전전했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불렀다.

시아버지는 노름빚에 날린 아파트의 등기서류를 며느리에게 쥐어주며, 아들과 이혼을 하라고 했다. 노름에 미친 놈과 살아가기에는 네 앞날이 너무 캄캄하다며, 손주녀석은 자신이 책임지고 키울테니, 앞날을 위하여 그만 아들과 갈라서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혼을 한 후 십몇년을 홀로 살던 그녀는 나이가 오십이 될 무렵,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재혼을 했다.

"이사는 잘 끝내셨습니까?"
"이사는 다 끝내고 정리가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가야할 교회가 마땅치 않아서...허허!"

남편은 그렇게 웃으며, 목회자가 좋아야 하는데 우리나라 교회에는 좋은 목사가 없다며 탄식했다.

어떤 목사가 좋냐고 묻자, 아무개 목사라면 좋은데 워낙 먼 곳에서 목회를 하기 때문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개 목사라면, 혹시 합정동의 선교사 무덤 자리에 설립된...?"
"어떻게 아십니까?"
"저희 아저씨입니다, 목사되기 전에는 출판사를 했고."

이야기가 그렇게 시작되다 보니, 집 안이 예장(예수교 장로회) 중 고신파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고신계열이라면...?"
"외가 쪽에서는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할 때 주축이 된 오래된 기독교 집 안이었기 때문에 그냥 저희 집 쪽에서는 고신파라고 합니다."
"그럼 교회에 열심히 나가겠네요?"
"아뇨, 집에선 저 만 교회엘 나가지 않습니다. 이단이죠. 하하!"

내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지 그는 한국교회가 이제 생활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광신적인 형태로 끊임없이 부패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사실 나는 예수교 장로회보다는 한국장로회의 분열의 주범이 된 김재준 목사의 성경유오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1947년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 교수는 성경의 기록은 성령이 기록자에게 하나하나 일러준만큼(축자영감설), 성경의 일자일획도 그른 것이 없다는 성경무오설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학생들이 김 교수의 가르침이 조선장로교가 고백하는 장로교 신조(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총회에 호소문을 제출한다.

총회는 같은 해 8월 심사위원회를 조직했고, 위원회 앞에서 김 교수는 성경의 절대무오를 받아들인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절대무오를 신앙과 행위에만 국한시켰다. 자연·역사·과학 영역까지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박형룡 박사는 조선신학교의 진정서에 대한 답변으로 쓴 김 교수의 진술서를 분석하고 김 교수를 자유주의신학 옹호자라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한국의 보수정통주의 핵심인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극복하지 못하면 한국 교회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고 응수한다.

박형룡은 장로교 칼뱅주의와 청교도적 경건주의가 서구 계몽정신의 격류를 헤쳐나오는 동안 형성된 보수 정통신학을 대변했다. 비판적 성경연구 태도나 역사주의 및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면 기독교 진리는 뿌리까지 붕괴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반면 김재준은 복음의 자유정신, 신앙양심의 자유 존중, 우상타파, 사회윤리적 책임의식, 성서의 비판적 연구 수용 등을 주도했고, 1970∼80년대 한국 기독교의 예언자적 저항 운동의 기반이 됐다. 이 토양 위에 민중신학과 문익환으로 대표되는 통일신학이 꽃피운다.

이렇게 분리된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라면, 나는 진보적인 기독교 장로회를 지지한다. 반면 우리 집 안은 근본주의 보수인 예수교 장로회에서도 가장 골수인 고신파인 셈이다.

"만약 교회를 다니신다면, 어느 쪽을 다니고 싶으신가요?"

그의 질문이 어느 교파의 교회인가를 묻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나는,

"만약 나간다면, 여호와의 증인을 다니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여호와의 증인입니까?"
"여호와의 증인은 아리안주의에 따릅니다. 저는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서는 믿어도, 사도신경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독교라면 아리우스의 편에 서겠습니다."

나는 사악한 이단의 목소리로 아리우스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2.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물비안 다리를 놓고 처남이자 또 다른 황제 막센티우스와 대치 중이었다. 노심초사 한밤 중에 그는 환상을 본다.

"이 징표를 사용하면 승리할 것이다."(In Hoc Signo Vinces)라는 환청과 함께 XP(Chi-Rho: Χριστός 즉 그리스도)의 징표를 주었다. 다음 날 병사들의 방패와 투구에 징표를 그려놓고 물비안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밀라노로 개선하여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다.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의 신앙의 자유만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었으나, 303년부터 비롯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것과 당시의 몰수재산의 반환 등을 감안할 때, 교회로서는 천우신조였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325년 5월, 지금은 터키의 조그만 호반마을(Iznik)로 변해버린 니케아에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이유는 코르도바의 호시우스의 제안에 따라 황제가 공의회를 갖는다고 소환을 했기 때문이다. 니케아는 로마제국 내의 동방과 서방이 마주하는 지점이었기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호시우스가 주교의 소집을 제안한 것은 아리우스(Arius)가 주장하는 논의가 신앙을 이단으로 흐르게 하거나 영혼의 구원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주교들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니케아 공의회의 주요 의제는 아리우스파가 주장하는 성부와 예수와의 관계 즉 성부와 성자가 신성이 하나인가 여부, 부활절의 날짜 확정, 기독교 문서의 정경화(성서편찬)에 대한 것 등이었다.

황제는 1800명에 달하는 제국 내의 모든 주교에게 초청장을 보냈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볼 때, 기독교는 로마가 국교로 인정하기 이전에, 이미 제국의 방방곡곡에 뿌리를 내리고 더 이상 제국의 힘으로 손써볼 수 없는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의 초청장은 동방에 1000매, 서방으로 800매가 발송되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교세는 로마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기 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의 안티옥 등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크게 융성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초기교부 대부분이 알렉산드리아 등 동방 출신이라는 점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니케아에 몰려온 주교의 수는 300명 내외로 황제가 보낸 초청장에 비하여 1/6에 불과했다. 하지만 주교는 두명의 사제와 3명의 집사를 대동할 수 있었기에 약 1800명의 사람들이 좁아터진 니케아로 몰려들어 바글거렸다고 한다.

5월 20일부터 황제의 궁에서 세계 제1차 공의회는 시작되어 6월 19일까지 예수의 본질에 대한 지리한 재판을 시작한다.

분명 이 공의회에는 영지주의자들은 초대되지 않았다. 어떤 형태로든 형성되어있던 복음서와 바울의 서한들을 바탕으로 한 정통파 주교들이 모여 예수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논의한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이 논의는 특히 교부철학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의 두 거두, 아리우스 주교와 알렉산더 주교 사이의 논쟁이었다.

예수의 본질에 대한 규정은 예수나 그의 아버지이신 여호와만 할 수 있는 그런 논의로 피조물인 인간의 권한 밖의 일이며, 오만이다. 하지만 세계 기독교 제1차 공의회라는 집회에서 논의된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능력이나 권한으로 다가갈 수 없는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제멋대로 예수를 재단한것이다.

그러니 이 공의회에서 논의된 이야기는 피조물인 인간으로서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공허한 것이지만, 믿음의 지점이나 교회의 권위라는 정치적인 입장에서는 심대한 의제일 수 밖에 없었다.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는 과거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와의 논쟁에서 주장했던 논지를 견지하면서, "신의 아들은 피조물이다. 무에서 창조되었으며, 그는 모든 시기 이전에 그는 신의 최초의 피조물이며 직접 신이 창조하고 낳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존재하기 이전에 시간이 있었던 만큼 그는 유한한 존재다. 비록 그가 선과 악에 대한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그가 아들로서 구극의 진실됨 속에 거했다 하여도 그는 아버지 다음에 올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경전에 쓰여진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구절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가 일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이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하여 알렉산더(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더를 대신하여 논쟁에 참여) 측의 주장 즉 성부와 성자가 동체(Homoousion)라는 주장은 이렇다. "아버지의 아버지이심은 그의 모든 속성과 마찬가지로 영원하다. 아버지께서는 늘 아버지이시며, 그 아들은 따라서 늘 그와 함께 있어왔다."고 주장한다. 그 또한 경전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요 17:21)를 들어 성부와 성자가 하나임을 주장한다.

이런 양측의 주장은 논리 상으로는 아리우스가 우세하지만 호교라는 입장에서, 결국 공의회에 의하여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을 갖고 있으며, 상호 영원히 공존한다."고 선언된다. 이 선언으로부터 사제들로 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인 기독교 믿음은 공식화되고, 지금의 사도신경의 프로토 타입인 니케아 신조가 그 해 6월 19일 발표되고 니케아공의회는 막을 내렸다.

300명 안팍의 주교들은 결국 예수는 신이라고 판결을 내리고, 그들의 시종과 함께 다마스커스, 안티옥 등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거나 니케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르마라 해안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와 아드리안해를 지나 그리스, 로마 또는 고울지방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하여 아리우스는 파문이 되고 알렉산더는 총대주교(Pope: 황제가 있던 때라 교황은 아니며, 로마, 콘스탄니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예루살렘 등의 5대 교권에서 총대주교의 명칭을 씀)라는 명칭을 얻게 되지만 니케아의 논쟁은 끝나지 않고 로마황제의 지지에 따라 아리안주의가 득세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의 본질이 인간인지 신인지에 대해서, 인간인 나는, 알지 못한다.

신성의 문제는 논리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에게 속한 것이며, 인간에게는 믿음의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사도신경 또한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이와같이 믿습니다"의 신조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성서를 믿지만, 강요된 신조인 사도신경은 믿지 아니한다.

3.

사도신경 또한 예정조화설에 입각하여 신의 역사 속에 만들어졌다면, 축자영감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완벽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란 오로지 믿는 것일 뿐이라면, 그냥 믿을 수 밖에 없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활한 함정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문제이다.

아리우스의 주장이 옳다는 것 또한 예수를 인간이 판단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볼 때, 또 다른 하나의 강팍한 오만이다.

"하지만 저는 예수가 신이라고 보는 기독교의 주장에서 더 이상 기독교가 종교로써 진화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전통 기독교보다 아리우스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그렇게 양 부부는 식사를 마치고 새로 이사한 아파트를 둘러보고 함께 차를 마신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나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하여 좀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예수를 인간이라고 단정하면,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결론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인간 예수는 모세와 같이 신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적인 입장에 이르게 되고, 모세처럼 현세의 메시아는 될 수 있어도 신이 아니기에 결코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구원은 그를 믿고 회개함으로써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어기지 않는 바리새적이고도 지엽적인 엄숙성 밖에 없으리라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물론 회교 또한 마호메트를 마지막 예언자로 인간의 범위에 한정지었다.

회교에는 수피즘과 같은 신비주의 종파가 있긴 하지만, 결국 회개보다는 코란에 입각한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기독교에 비교하여 월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가 인간이라면, 인간인 우리로서는 분명 그러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

즉 성부와 성자가 동체임을 주장하였던 알렉산더가 주목하였던 성경의 구절, 요한복음 17장 21절의 말씀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0100530

2010/05/30 01:00에 旅인...face
2010/05/30 01:00 2010/05/3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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