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03 19:51 : 벌레먹은 하루

저에게는 늘 늦게 찾아오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가을이 온 모양입니다.

오늘 눈부시게 햇빛은 밝았고
도로 위에는 은행잎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산문을 지나
자신의 나이를 먹으며 자라나는 오래된 은행나무를 바라봅니다.

산사의 풍경이 가을바람에 땡그렁 울려도
은행나무는 가을 햇볕 밑에 조는지 잎을 떨구기를 잊었습니다.

대신 햇살이 떨어져내릴 뿐이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릴까요?

조안리의 강변을 따라 난 오래된 6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팔당댐 옆을 스쳐지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늘 막히는 길이었지만, 옆에 큰 도로가 새로 난 후에는 도로 위로는 심심한 햇빛만 뒹구는 신세가 되었지요.

오늘같이 볕이 맑은 날이며 도로 한쪽 구석에 멍석을 펴고 고추라도 널어놓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팔당댐을 지나자 중앙선 철로가 놓인 이층 높이의 시멘트 축대가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습니다. 축대는 오래 전 증기기관차가 내뿜은 연기 탓인지 새카맣게 그을러 있습니다.

문득 보니 축대의 한쪽 구석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목동에 사는 정순X야, ♡"

그 글 뿐이 아닙니다. 그을은 축대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들은 누구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누가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는, 주어가 없는 동사와 목적어만 있는 외짝 글이었습니다.

혹은 짝사랑하는 X혜가 이 한적한 도로를 지나가다 자신이 사랑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인지, "정O는 X혜를 사랑한다"는 글도 보입니다.

차마 말로 못하고 가슴 속에 여며두어야 했던 사랑하는 이름을 한적한 시골 도로 옆 축대에 몰래 몰래 써야만 했던 사람들의 울먹임이 이 가을에 제 가슴을 아련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렇게 살아있고 사랑한다는 그 말을 더듬거릴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것을 제 가슴이 기억하기에는 한참을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2010/11/03 19:51에 旅인...face

2010/11/03 19:51 2010/11/03 19:51
─ tag  ,
Trackback URL : http://yeeryu.com/trackback/973
1 ... 283 284 285 286 287 288 289 290 291 ... 1050
◀ open adayof... Homo-Babiens ▶▶ close thedayof... Homo-Babie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