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22 16:27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밤새도록 세미나에서 제기될 질문을 예상하고 답변을 어떤 논리 속에 전개할 것인가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누군지 모르지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 올 것이고 그를 설득하지 못하면 안되는데, 세미나에서 발표할 테마는 나의 전문도 경험이 있는 분야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은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밤이 새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다급해졌다. 마침내 내가 꿈 속에 있고 꿈에서 깨어나면 아침이 될 것이고 출근을 해야하며 세미나에서 제대로 발표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될 수 있으면 꿈 속에서 좀더 머무르면서 예상질문에 대한 타당한 답변을 마련하고 각 답변들 간에 정합성을 확보하겠다는 요량으로 챠트와 서류에 메모를 하고 밑줄을 친 후 테이블에 올려놓고 서류 위에 쓰인 오글오글한 글들을 내려다 보다가 눈이 침침하여 잠시 감았다.

그런데 감은 눈꺼풀 사이로 아침 햇빛이 점차 맺히며 밝아지기 시작했다.

무간(無間)이란...

삶과 죽음,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그 사이에는 아무런 틈(間)이 없다. 무간이다. 삶과 죽음, 무명과 깨달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不二)인 까닭이다.

반면 아비지옥의 아비(Avīci)란 전혀 구제가 없는, 괴로움 받는 일이 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이 없다는 뜻의 무간이다. 무간지옥에 떨어지면 머물러야 하는 시간은 1만6천년이다. 이곳의 하루는 지구의 시간으로 2억5천6백만년이다. 그렇다면 1,495조년 동안 연속되는 고통 밖에 없다.

우주가 탄생한지 137억년. 우주의 탄생이란 별과 달들, 우주먼지, H2 등 물질의 탄생을 뜻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는 시간의 나이가 고작 137억살 밖에 안되었다는 뜻이자, 공간의 크기가 반경 137억광년에 불과한 구체라는 의미다. 137억년까지 밖에 소급하지 않는 시간을 놓고 1,495조년이라는 시간은 가당치 않다. 하지만 죽은 다음에 맞이하는 시간은 세상의 물리적인 시간과 어떠한 혈연도 없다. 1,495조년이란 누억겁(劫 : Kalpa)이겠으나, 부처님의 눈에서 떨어지는 자비의 눈물방울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시간보다 짧을 수도 있으며, 꿈 속의 한순간에도 성주괴공, 겁의 세계를 거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원으로나 그릴 수 있는 고통의 시간 또한 무간이고 우주의 생성 소멸 또한 티끌 속의 일이다.

꿈과 깨어남 사이는 무간은 아닌지, 꿈의 끝이 아침햇살에 접히고 무너져 내린다.

이미 깨어났지만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미나란 계획되지 않았고 오늘른 휴일이었다. 다 꿈이 만든 일이다. 괜스레 간밤에 베개머리를 땀으로 적셨다고 생각하자, 잠을 설친 몸이 고달펐다.

시간의 비가역성은...

열역학 제2법칙 : 어떤 (거시)계내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

이 법칙을 보면, 엔트로피가 증가해서 시간이 흐르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시간이 정지한다면 엔트로피의 증가가 멈춘다. 그리고 엔트로피가 감소하면 시간은 가역성을 갖게 된다. 이렇다면 열역학 제2법칙은 붕괴되고 시간은 거꾸로 흐를 수 있다. 단지 문제는 인간이 머리로 하는 사고(思考) 시뮬레이션은 토톨로지(tautology)에 불과하다. 말이 된다고 물리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이론은 이 우주는 無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르는 母우주에서 생겨났을 것으로 본다. 그러면서 이 부분우주(Local Universe)가 어떤 순서에 의해 진행된 결과라면, 우주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시간이라는 것은 비가역적이 된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결과인 이 부분우주는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대에 대하여 우리는 가설에 가설을 거듭할 수 밖에 없는데, 시간의 비가역성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가설에 불과하다.

시간의 가역반응을 생각하면 고야의 그림 '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처럼 끔찍하다. 권력에 대한 광기에 찬 눈으로 자식마저 잡아먹는 것이 끔찍한 것이 아니라, 뜯어먹힌 자식들이 토해내지고 찢어진 육신과 뼈가 다시 붙고 살아난다는 것이 더욱 참혹하다.

죽거나 사라져 버린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비가역성 속에서 제대로 낭비하지 못한 지금은 과거로 사라지고 또 다른 지금과 여기가 그 위를 뒤덮는다. 존재했던 시공간은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시공간이 채워지는 과정에서 사물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못해 나의 실존은 꿈과 허망으로 이루어진 것 같기만 하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세계를 인식하는 감성의 형식 즉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일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공간 위에 서 있는 이 세계는 꿈(관념)이며, 저 아비지옥의 저 무간의 세월조차 관념이며, 고통과 기쁨 또한 모두 마음이 지어낸 것(一切唯心造)이라면, 도대체 이 마음은 어디에서 온단 말가?

모든 것이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마저도 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하되, 마음 만은 올올할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神인가? 아니면 마음마저 인가?

<참고 시간의 비가역성에 대한 기사>

아침의 햇살과 함께 음악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오늘은 보랏빛의 창공에는 두개의 태양이 떠 있다. 뮤는 시아나하의 지평선 후면에 떠 있을 것이다. 아마 187시간 후면 뮤가 떠오르고 냐와 투는 질 것이다. 뮤는 냐와 투에 비하여 밝고 뜨겁다.

세개의 태양이 떠 있기 위해서 이 행성계는 혼천설에 입각하여 운동한다. 빛을 잃은 대신 생명을 얻은 항성 즉 시아나하가 행성계의 중심에서 원기(플레로마)에 휩쌓여 있고, 빛을 발하는 혹성 즉 우리가 태양이라고 하는 것들과 빛이 없는 혹성들이 시아나하의 주위를 돈다.

각 태양의 이름은 뮤, 냐, 투 이다. 뮤가 시아나하를 한바퀴 도는데 3.14일이 걸리고, 냐는 7.98일, 투는 14.33일이 걸린다. 일주일은 냐가 한바퀴 도는 8일이며, 한달은 뮤와 냐가 궤도 상에 일치하는 25일, 한 계절은 냐와 투가 겹치는 114일마다 바뀐다. 일년은 14달이며, 3년에 한번 있는 윤달이 들면 15달이다. 일년은 뮤냐투가 궤도 상에 일치하는 359.5일이다. 대충 한해는 359일, 또 다른 한해는 360일이다.

시아나하는 하루에 한번 자전을 하는데, 하루는 628시간이다.

MuNaTu/diagram

munatu

 

우리는 부생(浮生)이다. 생애가 부유하는 우리는 무나드다. 3년을 플레로마와 습기 속을 부유하다가 늙으면 마침내 시아나하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죽음을 기다린다. 다른 생명체들의 먹이가 되거나 죽는다. 결국 시아나하의 토양과 먼지가 된다.

원초적인 무나드가 나타난 이래, 우리는 외형적인 진화를 이루진 못했다. 무나드들은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꿈으로 진화를 했다. 태초의 무나드는 꿈조차 없는 생명 속에서 죽지 않고 끊임없는 자가생식을 통하여 시아나하를 뒤덮고 있는 플레로마(πλήρωμα)를 해칠 정도로 번식했다. 무나드들이 번식하고 번식하자 플레로마의 원기가 흐트러졌고, 사이로 뮤·냐·토의 빛이 스며들어 그 빛은 무나드의 세포막을 찢고 생명을 갈랐다. 시아나하를 감쌌던 플레로마를 타고 떠돌던 무나드들은 먼지가 되고 시아나하의 표면으로 흘러내려 습기와 뒤섞여 흙이 되었다.

그 후 시아나하를 뒤덮었던 플레로마 사이로 하늘이 나타났고, 세개의 해, 뮤·냐·토 가 천공을 떠도는 것도 보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태초의 무나드 또한 먼지가 되었고, 빛이 없는 깊은 동굴과 그늘진 곳, 습기의 밑에서 살던 무나드들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는 무나드가 죽어된 흙 속에서 살다가 뿌리를 내리고 늙은 무나드를 이어 커나가는 것으로 생명을 유지한 후 무나드를 토해낸 후 죽는 것까지 진화했다.

우리는 원초에서 태어나 자가생식에 생식을 거듭하는 단순한 산 것에서 비로소 죽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깊은 동굴 속에서 미약하나마 우리 속에 깃든 생명을 느꼈을 때 우리는 마음을 알았고, 죽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정신을 알게 되었다. 더욱 더 진화하여 마음과 정신이라는 것이 우리 속이나 아니면 바깥 어디인 줄은 몰라도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개별의 무나드로 살아가기에는 플레로마의 소모가 너무 컸고, 바깥 세상의 파동을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며, 개별의 무나드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개별의 무나드에게 6♩(qi)만큼의 플레로마가 필요하다. 무나드와 무나드가 한번 결합하면 각 무나드는 1♪(banqi)를 줄일 수 있어 전체로 1♩가 줄어든다. 하나의 무나드는 최대 여섯의 무나드와 결합할 수 있는데 이때 무나드는 플레로마를 6♪ 즉 3♩까지 줄일 수 있다.

이러한 결합력을 아이(사랑)라고 하며, 이는 시아나하와 플레로마 그리고 무나드의 최적의 상태에서 결정된다. 아이가 증가하면 무나드가 결합한 크기는 커지지만 대기 중의 플레로마의 농도는 높아지면 무나드의 생식력이 커져서 결국 다시 플레로마의 농도가 낮아지거나, 아니면 플레로마의 밀도가 증가함에 따라 천공이 가려지고 뮤·냐·토의 빛이 엷어져 광합성을 못하여 식물이 고사하는 등 생명계에 교란이 오게 된다. 따라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아이가 커지면 쯔엉(미움)이 세력을 발휘하면서 커진 무나드들의 결합을 해체하거나 결합을 방해한다.

무나드는 사랑하지만, 시아나하는 자신의 숨, 플레로마가 무나드 뿐 아니라 온갖 것에 깃들 수 있도록 미움으로 세계와 우주의 유지하고 시아나하를 배회하거나 자라나고 있는 온갖 생명들을 감싸안아야 한다.

우리는 닫힌 무나드이며 눈 멀고 귀먹은 채, 세계와 우주를 반영하며 꿈꾼다. 구체의 바깥 세계는 우리의 꿈과 일치하게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예정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노래를 꿈꾸는 것을 좋아하고 각각의 닫힌 안을 플레로마를 통하여 서로 들여다 보고 나누며 함께 우리 꿈 밖의 현실을 꿈꾸려고 한다.

우리는 육면체의 결합을 풀어 보자기 모양의 면으로 형체를 바꿔 시아나하의 숨을 타고 고주파가 형성되는 테레민의 골짜기로 가서 주파수 속에서 춤을 추며 화음을 만든다. 우리 군체가 소리를 만들면 또 다른 테레민이 형성되는 동굴이나 들에선 또 다른 무나드의 군체가 또 다른 음자리로 음악을 만든다.

때로 높은 단애를 타고 올라가 형태를 평면처럼 펼치거나 오목거울, 볼록거울처럼 만들어 모나드의 표면에 날아온 빛의 입자들을 결합하여 시아나하의 풍경을 보고 천공이 뮤·냐·토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다채로운 색깔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 풍경을 보면, 우리 중 어느 무나드가 슬퍼하고 또 아파하는 것인지... 그 아픔과 슬픔이 플레로마와 무나드를 따라 마음으로 번져왔다. 그러면 수억의 무나드였던 우리는 단일한 나(我)인 것 같기만 하다. 낱낱의 무나드이지만 생각할 때, 즐거울 때 우리는 하나이고 나(我)이다.

오늘따라 천공은 27가지 색으로 어둠과 밝음이 뒤섞이고 또 제2의 계절이 가까워졌는지 냐가 점차 투에 가까워지며 있다.

시아나하 남위 121도+동경 297도, 아발로키데스바라 분지, 숨은 분지에 가득하고 제2의 계절에 들어서면서 세상은 풍요와 평화로 가득하다. 그 색은 초록과 남색이며 테레민으로 부터 화음이 올라와 분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우리인지, 개별인지, 물질인지, 생명인지, 정신인지, 닫혀진 것인지, 열린 것인지, 꿈인지, 의식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꿈이 물거품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그리고 우리에서 나로 하나가 되면서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아닌 나는 외롭다.

하지만 말이지...

무나드는 닫혀있어서 눈물을 흘릴 수가 없어.

눈물이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난 탓인지 나는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이 눈물 한방울이 떨어지는 시간일지라도...

나는 몇개의 세계를 지나

여기로 왔고

꿈과 현실의 사이를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2010/12/22 16:27에 旅인...face
2010/12/22 16:27 2010/12/2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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