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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adayof...Homo-Babienc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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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 type="html">너무 흔하여 흔적조차 없이, 너무 가벼워 바람 결에 휘날리며......(火山 內家心法 中)</subtitle>
 <updated>2010-03-10T21:29:39+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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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벌레먹은 하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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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3-10T17:41:27+09:00</updated>
  <published>2010-03-10T16:45:09+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1. 오후에 창 밖을 본다. 도시에 가득했던 갖가지 빛깔들이 침묵하고 있다. 대기 중에 섞여있는 오후의 낮은 빛 아래에서 도시는 바래고 있다. 이런 오후는 얼마나 조용한가? 이렇게 빛이 바래어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들이란... 내린 눈(雪) 탓 만은 아닐 것이다. 2. 때론 삼십년전 혹은 사십년전의 그 시간이 구겨져 바로 어제이거나 한두시간 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거리를 스치던 공기의 냄새마저 느껴진다. 왜 그토록 아름다웠던 젊음에 열광하지 않았으며, 그 찻집에 떠돌던 노래소리나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詩를 읽지 아니했던 것일까?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지만,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그 시간들이 어리석었던 대신&amp;nbsp; 그만 나는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 아닐까? 3. 오늘 나의 몸 어느 구석은 해야할 일을 미뤄놓고 하루 쯤을 유예하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20100310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yeeryu.com/859&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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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폴리티컬 컴퍼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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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3-10T16:45:22+09:00</updated>
  <published>2010-03-09T09:30:05+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아래의 도표는 &amp;#039;한겨레 21&amp;#039; 800호 특집(2010.03.05)으로 나온 한국의 정치적 좌표이다. 빨간 동그라미에는 우리나라의 정계, 학계의 왠만한 사람이 다 나와있다. 이 도표를 보면, 한국의 리더(정치와 관련된 사람들인 만큼 정치인이라고 하자)들은 몇 사람을 빼놓고 이른바 좌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빨갱이라는 이야기다. 우려하는 것은 정치의 내면적인 지형은 진보와 자유주의 위에 수렴되어 있지만, 우리 사회의 외면적인 지층은 권위주의와 보수를 넘어 오히려 이른바 수구 보수 꼴통이라는 가파른 단층 위에 위험하게 서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한겨레 21의 이 도표와 관련된 기사를 읽어보았다. 그 내용이 그럴 듯 하긴 하지만, 설문내용과 비교해보면, 이 좌표를 설명하기에는 어쩐지 견강부회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 도표를 읽어보기로 했다. 1. 왜 이들은 권위주의 우파, 권위주의 좌파 그리고 자유주의 우파도 아닌 몽땅 자유주의 좌파인가? &amp;nbsp; &amp;nbsp;&amp;nbsp; - 왜 서구의 지도자들은 대다수가 권위주의 우파인가? - &amp;nbsp; &amp;nbsp; 도표를 보면 간디와 넬슨 만델라, 달라이 라마 등은 왜곡된 권위주의(무력)에 대항하여 자국의 독립 또는 인종문제를 극복해나간 사람들이다. 어쩌면 이들을 자유주의 좌파에 위치하게 한 것은 생래적인 것이라기 보다, 대척점에 있던 식민통치, 민족탄압, 종교탄압에 따른 반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amp;nbsp; &amp;nbsp;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정치를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해방 후 자유당 정권에서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의 왜곡된 권위주의를 관통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아직도 우리나라가 분배와 개인의 인권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amp;nbsp; &amp;nbsp; 이들 모두 어떠한 형태로든 전두환 이전의 권위주의에 대하여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박정희 시대에 가장 잘나갔던 정주영씨의 아들 정몽준 마저도, 그리고 박근혜 마저도) &amp;nbsp; &amp;nbsp; 하지만 대통령의 정치적 좌표가 어디에 위치하여야 할 것인가? 그들은 국가발전과 안녕을 위하여 어느 정도 건전한 권위주의와 보수적인 정책이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권위와 보수가 분배면에서 심각하게 불균형을 초래했다고 판단할 경우, 분배를 중시하는 좌파정권이 들어설 수도 있는 것이다. &amp;nbsp; &amp;nbsp;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의 스펙트럼이 이렇게 좁고 각 정치인들 사이에 심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그다지 변별적 차이가 없다는 것도 큰 문제이다. 2. 왜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좌표와 달리 행동하는가? &amp;nbsp; &amp;nbsp; 설문 내용을 보면, 정치적인 입장을 묻는 것이 아니라, 국가, 경제, 사회, 종교, 성(Sex)에 대한 개인의 가치관을 묻고 있어서, 어느 정도 정치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중립적인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여진다.&amp;nbsp; &amp;nbsp; &amp;nbsp; 반면 문제는 이 사회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관을 표현할 수 없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지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amp;nbsp; &amp;nbsp; 이들은 결국 어느 당에 속한 정치인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와 정치적인 입장에서 이들 모두 당이라는 권위에 시달리고 있으며, 당론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다. 이런 점에서 당의 노선과 자신의 정치적인 성향이 합치하는 진보정당의 정치인은 행복하고 떳떳하지만, 한나라당의 정치인은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럽지만 의석을 차지할 가능성은 높다. &amp;nbsp; &amp;nbsp; 이렇게 정치적인 좌표가 여야할 것 없이 같다보니 정강 또한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도 우리나라의 정치 역학구도의 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amp;nbsp; &amp;nbsp; 우리는 여야를 구분할 수 있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단지 여야로 갈려 싸운다는 것 밖에, 정치적 이슈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것 밖에 모르며, 야당이 정권을 잡았다고 기존의 여당과는 다른 정치를 펼쳐나갈 것이라는 믿음 또한 없다. 그러니 머리로 생각하고 선거하기 보다 마음에 드는 정당에 투표하고, 어느 놈이 올바르고 괜찮은가 보다 어느 놈이 더 나쁜 놈인가에 신경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amp;nbsp; &amp;nbsp; 이런 문제는 결국 당의 권위 아래 자신의 의견을 죽이고 복종해야 하는 비민주적인 정치역학 관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정치메카니즘은 과거의 권위주의와도 관계가 있겠지만, 정치자금과 유권자들의 민심, 국제정세 및 세계경기 등 다양한 요소들에 휘둘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국민들의 정치적 지형은 어떠한가? &amp;nbsp; &amp;nbsp; 폭압적인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가 아닌 한 정치인들은 유권자들과 호흡을 같이 해야 한다. 과연 이 폴리티컬 컴퍼스를 국민에게 적용했을때 어떠한 그림이 나올지 궁금하다. &amp;nbsp; &amp;nbsp; 한겨레 21에서 조사를 통해 이와 같은 결론을 얻었을 때 당황했듯이, 국민들의 폴리티컬 컴퍼스를 찍어본다면 상당히 의외의 결과가 나올 것 같다. &amp;nbsp; &amp;nbsp; 지금 이 도표에서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진보 자유주의적 모습을 보인다면, 이들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단지 당내 민주화 문제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들이 과거의 권위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분배와 성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보여지기 때문이다. &amp;nbsp; &amp;nbsp; 우리나라의 정치적 좌표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 참고 : 나의 좌표는 넬슨 만델라와 강기갑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 관련기사 :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6850.html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amp;nbsp;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6847.html ※ 자신의 정치성향 알아보기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yeeryu.com/858&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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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길이라는 것</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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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3-10T15:45:06+09:00</updated>
  <published>2010-03-08T13:57:18+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1. 길이라는 것은 무한하다고 한다. 끝없이 갈라지는 두갈래 길, 아니면 어느 골목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치 봄의 끝자락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찾아가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amp;#039;사이&amp;#039;(間)다. 겨울과 봄의 사이, 그 기나긴 시간은 늘 불현듯 온다. 길은 아직 하염없이 이어지는데, 내 발길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춰서는 지점이 있다. 거기에서 아주 사소한 절망이 우리의 나날들을 무의미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곤 한다. 철조망을 뛰어넘거나, 플래폼 아래의 철로 위로 한발자국 만 내딛는다면, 그 날의 한발자국이 자신의 일생에 있어 어떤 것이었는가를 아주 먼 훗날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어제는 처남의 사무실 개업식에 갔다. 고사를 도와주러온 보살이라는 분이 나의 띠를 물어보고, 모든 것이 좋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amp;quot;여지껏 점쟁이들이나 저런 사람들의 말이 맞은 적이 없다&amp;quot;고 아내에게 말했다. &amp;quot;이제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보라고! 이만하면 우리는 행복한 것이야.&amp;quot; 아내가 말했다. 그때 나는 점심 후의 식곤증에 시달리며 88올림픽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3. 엘비라 마디간을 다시 한번 보아야겠다.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yeeryu.com/857&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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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출장 중이었습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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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3-08T14:09:16+09:00</updated>
  <published>2010-03-05T10:07:44+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3/2~3/4일 일본 출장 이 기간동안 단 한군데의 고객만 방문을 했다. 많은 시간을 호텔방이나 지점의 사무실 안에서 무료하게 보냈고, 전철과 신칸센에서 시간을 소모했다. 일본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무 곳이나 어느 낯선 도시에 깃들어 하염없이 뒷골목을 배회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스퍼거 신드롬 어디에선가 &amp;quot;저의 남편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어요.&amp;quot;라는 글을 보았다. 그녀는 그와 사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힘들어도 &amp;#039;고생을 했다&amp;#039;고 말하지 않고, 몸 속에 깃든 자신의 감정이 여과없이 흘러나오는 남편을 대하며 무척이나 서글프고 힘이 들었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십년 넘게 남편과 산 후에 남편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거짓이 없다는 것이 단순히 좋다고만 할 수 없으며, 인간이란 살아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아스퍼거 증후에 걸린 사람들은 지적 활동면에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정상인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그들은 거짓말을 해야할 때가 되면, 침묵할 수 밖에 없으며,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하며, 사람들의 농담이나 은유를 잘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시절에는 왕따로 시달릴 수 있으며, 커서는 대인관계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세계 속에 깃들게 된다. 이들의 자폐증은 서서히 진행되고 결국 깊은 외로움 속에 깃들게 된다. 20100305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yeeryu.com/856&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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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아버지와 아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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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2-27T23:34:13+09:00</updated>
  <published>2010-02-27T14:33:22+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아버지의 사진이다. 잘못 간수한 바람에 구겨져 버렸다. 이 사진은 아버지가 결혼하기 이전에 찍은 것 같다. 어머니는 여고시절, 아버지가 재직하시던 학교로 친구들과 함께 교생실습을 가셨다. 어린 시절, 집에 놀러오신 어머니의 친구분들께서는 우리들에게 &amp;quot;그때 느그 아부지가 얼매나 잘생깄는지 느그들은 모르제?&amp;quot;하고 말씀하신 후, &amp;quot;느그 어무이가 낚아채지만 않았어도...&amp;quot;하고 농을 하시곤 했다. 하지만 이 사진을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다. 사진 속의 아버지의 모습은 편안해 보이지만, 사진 바깥의 부산에는 피난민들이 들끓고 아직도 강산의 어디에선가는 포성이 들리던 때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53년에 결혼하셨다 사진 찍기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다 보니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이 거의 없다. 졸업사진이나 각종 증명사진 외에는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찾아볼 수 없다. 식구들은 내가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는데, 아버지와 나는 서로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사진은 중학교 3학년 때인데, 아직도 국민학생처럼 어려보인다. 이때만 해도 키가 작아서 교실의 첫째줄이나 둘째줄을 벗어나지 못했다.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yeeryu.com/855&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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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섬과 안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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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3-05T10:33:46+09:00</updated>
  <published>2010-02-25T18:28:29+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이 편지를 쓰면서도 너의 이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지 모른다. 너의 명칭은 너무 단순하여 너를 포괄할 수 없기 때문에 늘 나는 다른 이름으로 너를 부르고 싶었다. 아주 길고 긴 이름, 그 이름을 부르다 보면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오르고 때론 행복과 슬픔이 아우러지며, 그리움으로 변하는 그런 이름이 간절하게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오늘을 더욱 그렇다. 어리석게도 사랑과 우정이 초라한 열정에 뒤덮혀 아뭇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야 하면서도, 몽매한 탓에 대지와 네 속에 나를 놓아두지 못하고, 덧없는 관념과 같은 것, 지식과 같이 뼈와 살이 없이도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창 문을 닫고 세상과의 관계를 끊은 채 책상 위에 책을 잔뜩 쌓아놓고 살아갈 때가 있다. 지난 여름, 젊음이라는 것, 열 아홉살의 나에게 퍼부어진 자유분방한 시간들 속에서, 나의 초라한 갈증조차 이 세상이 해결해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더한 갈증들만 가슴 속에 자라나는 것을 보고, 세상의 구석으로 돌아가 학교와 집, 그리고 집 앞의 공터와 마당, 그리고 초라한 책상 위의 곰팡이처럼 녹슬고 있는 책들 속에만 머물기로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품점 유리 그늘에 비친 나의 초췌한 몰골을 보며, 먼지처럼 덧없는 글자 속에 묻혀 아무 것도 건져내지 못한 나를 발견했다. 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왔을 때, 헐벗은 나무가지가 하늘 아래 드러났고, 쓸지 않은 낙옆들은 메마른 섬 위에 가득했다. 가을이 어느 덧 가버렸다는 것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지 않아 겨울이 올 것이고, 추위가 거리를 덮칠 것이다. 친구들은 섬 위에서 소리치며 공을 차고 떠들고 놀았지만, 가을을 놓치고야 말았다는 자괴감 때문에 즐겁지 않았다. 오후의 미광(微光) 아래,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의 건너편, 헐벗은 가지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풍경은 나의 어린 우울 속으로 먹물처럼 스며들었고, 가슴 속의 공허 속으로 한강 중류의 좁은 산과 산 사이로 떠오르던 노을이 삼분지 일 쯤 들어 앉았다. 초라한 가을의 끝은 단가(短歌)처럼 아름다웠다. 지금 밖에 비가 내린다. 11월의 새벽 두 시. 불이 들지 않는 방갈로 안, 친구들은 서로를 껴안고 추위를 녹이며 잠을 자고 있다. 메마른 낙옆 위에 내리는 비는 처음에는 싸아하고 흐느끼더니, 낙옆이 비에 젖었는지 빗소리는 잦아들었다. 추위 때문에 몇차례 깨어난 나는, 어둠 저편을 건너 온 새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양을 건너온 밀림의 소리였고 외로움이 살을 갈라내는 듯한 소리였다. 추위에 뒤채이며, 잠결에 &amp;#039;괴로운 것인가? 저토록 처절한 소리가 본연의 소리인가? 갇혀 날지 못하는 운명을 저주하는 것인가? 아니면 깃털 위에 형벌처럼 차갑게 내려앉는 빗줄기 때문일까?&amp;#039; 하고 묻고 있었다. 끄와악! 꽈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에 더 이상 잘 수 없어 깨어났다. 살과 뼈 사이로 추위가 박혀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다. 깨어나 새의 울음소리를 기다렸지만, 새는 울지 않는다. 꿈 속의 울음이었을까? 친구들의 살 내음으로 꽉들어찬 방갈로의 문을 열었다. 마지막 남은 계절이 가을 비에 빙점으로 식어가는 냄새가 떠올랐다. 밖으로 나갔다. 빗줄기는 보이지 않고, 얼굴과 팔뚝에 섬뜩하게 반짝일 뿐이다. 그리고 이명처럼 우는 빗소리. 새는, 울부짖던 새는, 어디 있을까? 새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괴로움에 죽었을 지도 모른다. 죽음이 두렵다는 것은, 한번도 제대로 살지 못했기에 삶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과 같은 지도 모른다. 사랑과 같은 것, 우정 그리고 흘러지나가는 행복들을 한번도 진정으로 껴안지 못했기 때문에, 모호한 관념에 불과한 것이라 흘려버리고, 거짓된 열망을 쫓아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진실이지만, 나는 거짓으로 가득한 지도 모른다. 새를 찾아서,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섬의 끝으로 갔다. 잡초들에 맺힌 수분이 발목을 적신다.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로 외로웠다. 어둔 섬에는 가을날의 끝에 사라질 냄새들이 피어올랐다. 새벽이 밀려오는 느릿한 냄새, 낙옆이 썩어가며 내는 얕은 술내음, 그리고 어둠 속에 번지는 적막. 밤은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이며... 나는 새를 마침내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풍경은 어둠 속에 갇혀 있다. 시간마저 어둠의 볼모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가느다란 빗소리의 아우성이 낙엽들 위로 내려앉을 뿐…. 그 소리들은 어둠을 씻어 내리기 위한 신음같다. 강 가로 다가 갈수록 어둠은 더욱 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둠 가운데로 더욱 깊은 혼돈의 웅덩이가 불쑥불쑥 솟아올랐고, 두려움으로 걸음이 흐트러졌다. 섬의 뜰 저편에 화톳불이 보인다. 붉은 불의 음영을 뒤집어 쓴 채, 암울과 무망에 절은 듯한 두 사람이 쪼그리고 불 앞에 앉아 있다. 그들의 옆을 지난다. 화톳불 옆의 나무탁자 위에는 음식물과 술병들이 어지러웠고,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밤의 저 쪽에서 불쑥 나타난 나를 절망스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불을 보았다. 화톳불은 빗물에 젖어 생기없는 붉은 색으로 단조롭게 흔들렸고 나는 아무런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불을 보고 있는 나에게 그들이 뭐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가던 길을 다시 간다.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단지 발끝에 스치는 잡초소리와 어둠이 이끄는대로 갈 뿐이다. 얼마가지 않아, 숲의 가지 사이로 희뿌연 광막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안개 속에 빛이 결박되어 아우성치는 모습이었다. 좁은 강안의 가로등들로 부터 날아온 빛은 안개에 갇혀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배회하고 있다. 좁은 섬에서 강으로 흘러드는 차디찬 또랑물 소리가 들렸다. 차갑게 식은 섬의 끝에 강이 부딪혔고, 강은 하얀 김을 토해냈다. 그리고 안개 속에 빛이 뒤채였다. 빛을 담은 안개는 차갑게 익은 어둠이 꽉찬 섬의 안으로 스며들지 못했다. 마치 꿈을 꾸듯 빛의 장막을 뚫고, 절반의 두려움과 절반의 영탄으로 빛의 영역에 들어섰다. 형광등의 아르곤 가스 속에 들어선 것처럼 축축하고 온통 빛이었다. 강의 칠흑같은 나신으로부터 하얀 김이 올라왔다. 하얀 김은 또 다른 김과 섞이고 추운 대기 속에 풀어지면서 안개가 되었다. 강 건너편 강변도로 위의 가로등에서 날라온 빛이 안개의 입자에 부딪혔고 다른 입자로 반사되며, 다시 섬의 외등빛과 함께 비벼졌다. 그리고 강변의 숲과 가지를 빛으로 감쌌다. 안개에 갇혀 날아가지 못한 채 빛은 안개 속에 산란하고 또&amp;nbsp; 산란된 빛을 잉태하며 빛의 덩어리가 되었다. 빛의 덩어리는 안개로 풀리며 춤을 추듯 검은 강물을 따라 흘려갔다. 잎이 진 은행나무의 단조로운 가지와 미루나무, 은사시나무의 가지들이 섞여 빛을 거스르고 있다. 빛 속으로 들어가자, 유광체처럼 내 몸에서 분말같은 빛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팔뚝에도 빛이 어리고 조만간 모든 세포가 빛으로 변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빛을 마주하여 희미해져 가던 나는, 뚜렷하게 외로움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 끝에 있는 적막 속으로 들어가 문득 젊은 시절에 보듬어야 할 마지막 낱말을 떠올렸다. 너의 이름과 함께, &amp;quot;나 지금 여기에 있어.&amp;quot;라고 강 저쪽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목소리는 믿을 수 없게 애절했고, 그 목소리가 다시 가슴을 울렸다. 있지도 않은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빛과 가랑비에 젖은 강물소리 속으로 스며들어가 뒤섞이는 사물 속에 나의 생각을 흘려버리고 다시는 구체의 육신에 깃들어 거칠고 자명한 현실로 되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고, 이후에는 수억년동안 끝없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지나는 행성같은 외로움이 끼쳐왔다. 나는 결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잡을 수 없고 순간적이며, 자신의 사랑을 가늠할 수 없으며, 좋아함과 사랑의 경계를 알 수 없다는 것, 서로 살을 섞고 나서야 간신히 그 미끄덩한 실체를 확인하고 쾌락으로 접어들거나, 그만 갈망이 사라져 쓰레기통으로나 던져져버리는 그러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타인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 속에 피고 지는 것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가슴은 영원하고 단일한, 통제될 수 없어서 미칠 것 같은 감정에 꽉차서 빛과 안개로 가득한 섬의 끝으로 밀려온 것만 같다. 한번도 너를 위하여 노래를 불러주지 못했던 나는, 지금 여기에서, 너의 부재 속에서, 뚜렷한 너의 현전을 받아들이며, 육신의 밑바닥은 뒤집어져 심장이 밖으로 나오고 살갗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통증과 기쁨에 정신이 얼얼하다. 사랑하거나 묵혀두었던 가슴의 진실들을 퍼올려 편지에 써서 부쳐야 할 이 가을에, 너를 방치해 둔 채, 하잘 것 없는 책 속에 코를 박고 지내왔다는 어리석음에 치를 떨었다. 아랫도리가 시리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며, 이 밤의 온갖 것들에서 너의 향기와 속살거림을 떠올릴 수 있다. 너와 보낸 온갖 시간들을 순간 속에 응축시키고 폭발시킴으로써 영원의 끝에 있는 곳까지 물결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이 감정을 네게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먹해진 친구의 창 밖으로 흘러나오던 소야곡을 들었을 때, 가을날의 노을이 낮은 언덕을 꽉채웠던 어느 날 느꼈던 그 감정, 진실이었다고 믿었던 우정이 흘러가버렸으며 그때보다 더한 우정이, 친구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내 가슴에 차오름에도 다시는 그 시절의 서로의 해맑은 웃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앞으로의 내게 다가올 우정은 더 이상 향기를 지니지 못할 것이며, 순수를 잃어버림으로써 조금더 현명해지는 것이라는 막연한 슬픔이 지금의 이 감정은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너의 입술과 알맞게 살이 오른 허벅지, 무관심이 담겨져 나로부터 약간 멀어져 있는 그 눈, 이 모든 것은 나뉘어 질 수 없는 너의 실체였고, 내 욕망의 뿌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여름과 가을, 의도적으로 방황을 했던 것 같다.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들을 잃어버리기 위하여, 때론 느껴야 할 것을 느끼지 않고 단지 생각만 하기 위하여, 너무나 뚜렷하고 단일해서 전혀 글로 쓸 수 없는 것을 글로 쓰기 위하여, 비로서 시작한 나의 젊은 나날들이 그만 속절없이 흘려가버렸고, 나는 그만큼 말라가고 있었다. 때때로 장난처럼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자신의 가슴의 떨림에 솔직하지 못했던 나는 네 말을 믿지 않았다. 나의 불신은 사랑하는 너를 끊임없이 외롭게 했다. 시간이 흘러도 옹졸한 껍질에 갇혀 있던 나의 곁에서 외로움에 수줍게 떨며 장난처럼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너를 가슴에 품어주지 못했던 나의 죄악을, 이제야 무지요 이기심 탓이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밖에 없다. 나의 절망을 용서해라. 이제는 너의 갈증이 나의 깊숙이 받아들여 서로가 무화되어 더 이상의 애달픔이 없는 상태까지 표류하고, 나의 천년처럼 기나긴 입맞춤 속에 너를 스며들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욕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젖어있었다. 욕정없는 사랑의 공허감. 부딪힐 육신없는 허무. 대상없는 사랑은 인간의 땅에 어울리지 않는 가련한 소망일 뿐이라는 것. 촉촉이 젖은 너의 손과 풍성한 가슴을 취하지 않는 사랑은 가식과 절망일 뿐이라는 것을 왜 나는 몰랐을까? 차디찬 돌을 집어 들었다. 눈으로 보고 만져 그 느낌이 가슴까지 차 오름으로써 드디어 광막한 세계와 교호하는 것이다. 탐욕에 가득한 입맞춤으로 너를 맞이해야만 비로서,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한동안 빛 속에 있었다. 이미 비는 그쳤다. 안개도 많이 줄어들고 빛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졸음이 오는 것을 느꼈다. 돌아가 친구들의 체온에 몸을 비비고 자야 할 것이다. 나는 돌아섰다. 강변 언덕 위에는 추위에 깨어난 친구가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않고 친구의 옆을 지나 낙엽으로 가득한 섬의 뜰로 내려섰다. &amp;quot;이제 돌아가 자려고?&amp;quot; 그의 말에 간신히 대답했다. &amp;quot;응!&amp;quot; 그 때 섬 저쪽에서 추위에서 깨어난 새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yeeryu.com/853&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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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무위의 병</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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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0-02-22T21:30:49+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근 두주동안 이른바 무위의 병에 빠져 있었습니다. 글자 한자 쓰기조차 귀찮은 상태가 계속되는 그런 것입니다. 게다가 왠 일들은 이렇게 많은 것인지... 정신을 빨리 차려야 겠습니다. 그동안 잠수를 하고 있는 점 용서바랍니다. 여인 올림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yeeryu.com/852&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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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유년의 나날들-4</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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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2-25T18:28:40+09:00</updated>
  <published>2010-02-10T12:56:30+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어린 시절의 동생에 대하여 말하기란 아득하다. 동생이라기엔 애틋하여 강아지같기도 했고, 동생의 눈물 저쪽에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동생은 왜 그렇게 착했는지 알 수 없다. 동생이 아끼고 쓰다듬어 주어야 할 강아지같아서인지 몰라도, 태어나 집으로 돌아온 날 이후로 동생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어느 날 대형사고가 터지면서 동생은 뚜렷하게 기억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우리집에는 방이 4개였는데, 방 둘은 다다미와 냉골이라 거의 쓰지 않고 삼촌들이 오거나 하면 쓰곤 했다. 안방과 건너방은 다다미를 걷어내고 온돌을 깔았다. 건너방의 옆에 부엌이 있었고, 부엌으로 통하는 문 옆에 난방 겸 취사용으로 아궁이가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동네 친구와 함께 부엌에서 놀고 있았다. 문 옆 아궁이에는 물을 올려놓았는데, 김도 나지 않을 정도로 물은 뜨겁게 데워져 있었다. 동생은 부엌에서 나는 인기척 때문인지 문을 통해 기어 나오다가 굴렀고 그만 다리가 솥에 빠졌다. 동생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하얗게 질렸고, 나는 어떻게 할 지를 몰랐다. &amp;quot;엄마아~ 엄마아~ 큰일 났어요!&amp;quot; 어머니가 뛰어와 동생을 솥에서 건져내 방에 눕혔을 때, 화학섬유로 된 바지는 녹아 살과 함께 뒤섞여 있었고 동생은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동생의 다리를 본 어머니의 눈에서 파란 불빛이 번쩍하더니 이불에 동생을 뚤뚤 말아 아무 소리도 않고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골목 밖으로 나가 어머니와 동생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어머니는 날이 저물 즈음에 찬 냄새를 뚝뚝 흘리며 들어와 동생을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한동안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린 후, 상자를 찾아 커다란 봉지에서 꺼낸 붕대와 꺼즈, 습포제 등을 정리했다. 동생의 한쪽 다리는 습포제로 둘러싸여 있었고 붕대 사이로는 숩포제에서 새어나온 기름과 같은 것으로 범벅이었다. 병원에 가서 바지를 가위로 잘라내고 들여다 본 동생의 다리는 엉덩이 밑에서 복사뼈까지 살이 녹아내렸다고 한다. 의사는 녹아내린 살을 잘라내지 않으면 허벅지와 장딴지의 살들이 엉겨붙어 결국 무릎을 못쓸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의 살을 잘라낼 수는 없다고 버팅겼다. 어머니는 아들의 살이 붙지않고 아물도록 손을 써본 뒤 안되면 그때가서 살을 잘라내든지 하자고 했다. 의사는 상처가 아물지 않고 원상회복이 되도록 계속 습포를 해야 한다. 조금만 잘못해도 살은 굳고 서로 엉겨붙울 것인데, 그것은 병원에 입원시키고 간호원이 달라붙어 몇달을 해도 안될 일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간호원이 한번 갈아붙인다면 그동안 자신은 두번, 세번이라도 하겠다며 화상에 대한 사후처치 요령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 후 어머니는 동생을 눕혀놓고 하루에도 몇번이고 습포를 대고 거즈를 갈았다. 날이 지나면서 살 속에 박혀있던 섬유조각들이 빠지고 동생의 살들이 굳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살이 굳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식구들이 그만 두라고 해도 개의치 않고 습포제를 갈았고, 기도를 했다. 어머니의 노력 탓인지 늘어났던 살이 점차 자리를 잡고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살들 사이로 땀구멍이 날 즈음에도 어머니는 약을 바르고 거즈를 갈았다. 아버지와 누나가 그런다고 새 살이 돋겠느냐고 해도 어머니는 집요하게 거즈를 갈았다. 일년이 넘도록 거즈를 갈은 후 어머니는 어느 날, &amp;quot;더 이상은 자라나면서 지워질거다. 여기까지가 애미가 한 것이고 그 다음은 하느님께서 해 주실 일이다.&amp;quot;며 거즈 갈기를 멈췄다. 동생의 다리의 늘어졌던 살은 다 아물고 곰보빵의 껍데기같은 붉은 흉터 자국만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하게 허벅지와 종아리 옆에 남았다. 그 화상자국도 해가 가면 점차 줄어들어,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반바지를 입어도 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지금은 동생의 허벅지에 엄지손가락만한 자국이 점처럼 남아있다. 어렸을 때, 우리는 간혹 동생의 다리의 흉터의 길이를 자로 대고 재곤 했다. &amp;quot;엄마 이제 사쎈치로 줄었어요.&amp;quot; 우리는 그렇게 어머니의 사랑의 힘을 확인하곤 했다. 우리 형제가 확인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생은 약골로 태어나 눈물구멍이 막힌 채 태어났다. 그것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뚫었다. 막힌 눈물구멍을 뚫어서 그런지, 어린 동생은 걸핏하면 울었다. 우리는 동생을 기어코 놀리고 우는 동생을 달래주기를 좋아했다. 우는 동생을 안아주면 동생은 울기를 멈추고 품 안에서 새큰새큰 잠이 들거나 언제 그랬냐는듯 웃곤 했다. 동생은 거의 반벙어리였다. 네살이 되어도 아버지를 &amp;#039;따~&amp;#039;라고 불렀고 자기 딴에는 뭐라고 중얼거리곤 했는데, 우리는 알 수 없었다. 동생이 뭐라고 하면 거꾸로 &amp;#039;밖에 나가고 싶다고?&amp;quot;하고 물었고,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면 동생은 또 울었다. 그러면 우리는 동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고민을 했고, 때로는 울든 말든 나 몰라라 했다. 그래서 어린 동생의 눈 가에는 늘 눈물자욱이 마르지 않았다. 동생이 말이 안되었던 것은 혀뿌리가 보통사람보다 짧아 그렇다고 했다. 의사는 혀뿌리를 조금 절개하면 발음이 제대로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는 의사 앞에서 동생에게 입벌려봐 하고 몇번이 혀 밑을 들여다 본 끝에 그냥 동생을 데리고 왔다. &amp;quot;왜 자르지 않고요?&amp;quot; 하고 묻는 우리에게, &amp;quot;네 새끼라면 함부로 자르겠니? 나는 가슴이 아파 못한다. 두고 봐라 내가 저 녀석을 반듯한 사람 만들거다.&amp;quot;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어머니의 눈에서 우리는 결기에 서린 눈빛을 보았던 것 같다. 당시에 우리집에는 사람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동생이고 하나는 나였던 셈이다.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이롱 엄마다. 당신께서 세상에서 제일하기 싫은 것이 자식들 도시락 싸는 것이며, 밥하는 것은 물론 살림일체가 다 고통이라는 그런 분이셨다. 게다가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음식은 나와는 상극이었다. 어머니는 떡과 같은 진밥을 즐겼고 나는 꼬두밥을 고집했다. 나는 늘 밥그릇을 뚜껑을 열고 &amp;quot;또 떡이잖아?&amp;quot;라고 말했다. 진밥보다 수제비의 밀가루 냄새는 더 싫었다. 밀가루 냄새보다 더 싫은 것은 (어머니가 귀찮아서 멸치를 건져내지 않은 탓에) 다싯물에 불어서 꽁치만해진 멸치 시체가 그릇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멸치시체를 건져내 밥상 위에 늘어놓았지만, 여지없이 그 놈의 멸치는 건데기 사이에 숨어있다가 내 입 속으로 기어들어와 소중한 나의 밥맛을 잡쳐버리곤 했다. &amp;quot;제발, 엄마! 멸치가 죽은 것을 안보게 해줘요.&amp;quot; &amp;quot;칼슘이다. 아이가 자라는데 다 좋다. 잔말말고 먹어라. 싫으면 니가 건져내고...&amp;quot; &amp;quot;에이씨 안먹어 밥줘!&amp;quot; 이렇게 투정을 부린 끝에, 남들은 다 수제비나 국수를 먹고 있는데, 나만 한쪽 구석에서 간장 종지와 김치를 놓고 밥을 먹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밥상에서도 늘 외로웠다. 그런 나의 고집스러운 꼬라지를 보시며, &amp;quot;꼭 저 놈 때문에 밥을 두번 차리게 된다.&amp;quot;라는 말까지 얻어들으면서 말이다. 하여튼 어머니께서는 몹시 사교적이어서 동창회라면 자식들이 한번 쯤 굶는 것도 인생살이에 도움이 된다면서 뛰어가셨고, 식구들을 집에 홀랑 남겨놓은 채, 친구들과 함께 명산대찰은 물론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에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제주도까지 놀러갔다. 어머니에게는 늘 잔치와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우리 집에 들락거렸고, 친척들도 뭔일이 있으면 아이고 누님이요, 형수님이요 하며 우리집으로 왔다. 고교동창회 간사 자리는 도맡아했고, 교회에서는 집사, 하여튼 무지하게 바빴고 결론은 집에서는 불량한 주부였다. &amp;quot;엄마 어디 가셨니?&amp;quot; &amp;quot;몰라요. 혹시 돈 만들러 가셨는지도 모르죠.&amp;quot;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찾는 사람들에게 삐약삐약 그렇게 말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다. 그렇다고 그 후에 잘살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머니는 늘 돈이나 끼니 때문에 걱정을 했다. &amp;quot;엄마, 어디가세요?&amp;quot; &amp;quot;느그들 멕이려고 돈 만들러 간다.&amp;quot;하며 바깥으로 나서곤 했다. 우리는 어머니가 돈을 빌리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 날 저녁 만이라도 우리의 밥상을 풍성해졌고, 봉지쌀이 쌀독에 부어지는 그 뿌듯함을 알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없던 그 시절, 아버지가 번듯한 선생이면서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것은 군부정권 집권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지방 소학교 출신의 사범학교 합격생이다. 아버지께서 전주사범을 합격하자 진도의 학교에선 현수막이 걸리고 빵빠레가 울리고, 섬마을 사람들이 학교로 몰려왔고 어험! 진도도민 여러분, 반도의 도서지방 최초로 아무개가 어쩌고 저쩌고 했다는 것이다. 해방되던 해에 아버지는 선생이 되셨다. 6.25 때는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학교와 교실을 정부와 군에서 접수한 탓에 산능성이에 천막을 치고 아이들을 가르쳤기에 당시 LIFE지에 푸른교실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amp;#039;백두산 호랑이&amp;#039;이라는 사람이 부산지역의 징집관이었다. &amp;quot;너 직업이 뭐야?&amp;quot; &amp;quot;학교 선생입니다.&amp;quot; &amp;quot;그럼 애들을 가르쳐야지. 징집면제!&amp;quot; 그 말을 듣는 순간, 사관학교를 가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서 사범학교를 간 아버지는 한편으로 다행이고 합편으론 섭섭했다고 한다. 여하튼 어찌저찌하여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와 임용고시를 거쳐 수송국민학교에 교편을 잡았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시가 있었다. 입시의 열기에 편승하여 선생들은 방과 후에 과외를 하여 쥐꼬리만한 월급 외에 벌이를 하곤 했다. 서울 삼대공립학교의 선생님이라는 것과 임용고시 수석을 했다는 입소문 등이 가세하여, 아버지의 과외벌이는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국가최고재건회의에 있었던 큰외삼촌이 하루는 아버지를 불러냈다. &amp;quot;조만간에 서울 시내의 선생님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을 것이다. 자네도 손을 써놔야 될 것 같네. 생각이 있다면 내가 연줄을 알아보겠네.&amp;quot; 당시 덕수국민학교를 중심으로 삼대공립학교에는 자유당 때부터 정부고관대작이나 갑부집 자제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사친회다 뭐다 학교 내에 치맛바람이 거칠게 불었고, 또 선생들도 연줄이나 돈을 써서 이들 공립학교의 선생이 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군사정권은 학원 내에 건전한 교육풍토를 진작시킨다는 명분 하에 물갈이를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큰외삼촌의 말을 듣자, &amp;quot;형님, 나는 떳떳하게 임용고시를 거쳐 수송의 선생이 되었고, 촌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니, 개의치 마쇼!&amp;#039;라고 큰 처남의 제안에 툇짜를 놓았다. 아버지는 수송국민학교에서 이삼년인가 교편을 잡으신 후, 어느 날 느닷없이 수색이라는 곳에 있는&amp;nbsp; 어느 국민학교로 발령이 났다. 아버지는 우리가 잠든 사이에 출근을 했고, 밤이 깊은 후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하루는 아버지가 학교로 나를 데리고 가신 적이 있다. 대여섯의 나이 때문인지 몰라도 수색은 하염없이 멀었다. 버스를 두세번인가 갈아탔는데, 내 기억으로는 무학재를 너머 홍제동인가에서 한복을 입은 시골노인네들이나 허름한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렸고, 거기에서 갈아탄 버스는 노란 먼지를 피우며 신작로를 따라 또 하염없이 갔다. 길 옆의 풍경은 60년대의 시골 바로 그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수색의 모습은 전란통의 피난민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의 학급의 선생 책상에 앉아 있거나, 학교의 운동장을 홀로 거닐면서 하루를 보냈다. 수업시간이 되자 책가방도 없이 교실에 들어서는 학생들이 보자기를 풀어 책을 꺼내는 것을 보았고, 그들의 옷이 거지들의 행색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점심시간이면 학생 몇명이 복도에서 푸대자루를 들여왔다. 아버지는 자루 속에서 옥수수빵을 꺼내 한명당 두개씩 주었다. 하나는 학생들의 점심이었고, 또 하나는 그들의 저녁거리였다. 그날 나도 아버지와 학생들과 함께 옥수수빵을 먹었다. 까실까실한 빵은 맛있었다. 아버지는 수색으로 발령이 난 후, 아이들이 옥수수빵을 먹는 자리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을 수는 없다고 어머니께 도시락을 싸지 말라고 하셨다. 출근하시는 아버지에게 옥수수빵을 하나만 갖다 달라고 졸랐지만, 아버지는 &amp;quot;아이들의 밥이다. 네가 먹고 싶다고 가져오면 누군가 한명은 그날 저녁을 굶어야 한다&amp;quot;시며, 끝끝내 가져오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후일, 수색에 근무하시는 동안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급봉투에는 푼돈 만 들어있었다고 한다. &amp;quot;선생 똥은 개도 안먹는다는 것이 괜한 말이겠니?&amp;quot;라시며, 아버지의 차비를 빼면 봉급은 절반으로 줄고, 술이라도 한 잔하면 월급봉투에는 동전 만 남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돈을 빌려와 식구들을 먹였고, 늘 돈 문제로 쩔쩔매셨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집으로 몰려드는 삼촌이며, 아저씨, 외삼촌 등의 끼니를 마련했고, 그 탓에 우리집에서는 수제비를 뜨는 날이 잦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일을 걱정하시기 보다, 오늘 자신에게 할애된 조그만 행복을 즐기셨고 늘 기도를 하셨다.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yeeryu.com/851&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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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유년의 나날들-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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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旅인</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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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2-03T16:02:46+09:00</updated>
  <published>2010-02-03T16:02:46+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나의 기억들은 1960년대 서울 광화문 일대의 한 소묘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는 경복궁의 영추문 서쪽으로 약간 어긋난 골목에 위치했다. 경복궁 서쪽 벽을 따라 전차가 지금은 궁정동이 된 청와대 입구까지 우웅하는 모터소리와 함께 선로에 쇠를 긁는 소리를 내며 달렸고, 간혹 전차운전수는 줄을 당겨 전차 앞에 달린 놋쇠종을 댕댕댕 울려대기도 했다. 행정부는 지금은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에 있었는데 중앙청이라고 불리웠고, 국민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부터 내자동 쪽에 정부종합청사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진명의 여중고생과 청운동 쪽 경복 혹은 경기상고의 중고등학생들이 동네 옆을 지났다. 당시에는 국민대학이 동네 근처에 있었는데, 도로로 나서면 남녀가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이 보였다. 어른들은 그들을 아베크족이라고 했고, &amp;quot;그냥 껴안고들 걸어라&amp;quot;하며 혀를 차곤 했다. &amp;nbsp; 동네의 한쪽 골목에는 적산가옥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적산가옥이라고 해봤자 불과 열몇평에 지나지 않는 작은 집들이었다. 동네 일대가 일제 때는 광산갑부의 소유였다고 했다. 아마 우리가 살던 적산가옥은 그때 지어진 것으로 사택이나 합숙소였는지도 모른다. 이 가옥들은 앞 뒷 집 사이로 담이 없이 마당을 함께 썼다. 가옥들의 기둥과 창틀과 벽의 합판 등은 콜탈이 먹여져 있어 갈색이었고, 다다미가 깔려져 있었다. 그 적산가옥으로 우리는 이사를 갔다. 앞 집에는 황해도에서 월남한 노인 두분이 살고 계셨다.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 아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왕래가 드물었다. 두분은 떠들썩한 동네와 어울리지 않게 조용하게 살았다. 우리가 처음으로 이사를 왔을 때, 앞 집의 할아버지는 올망졸망 사형제가 좁아터진 마당에 들어서자 &amp;#039;아이쿠, 큰일났다&amp;#039;는 표정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선생이고 어머니 또한 당시로서는 고학력의 여고 출신이라는 점과 아이들이 인사성이 밝다는 것 때문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한 마당을 쓰면서 한사코 싫다시는 바람에 밥상을 함께 하지는 못했어도, 서로 먹을 것을 나누고 끼니에 지장이 없는 가를 신경 써가며, 8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지냈다. 우리가 마포로 이사한 후, 두분은 1년인가 지난 후 우리 옆 집으로 이사를 오셨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아들집으로 들어가신 후 그만 연락이 끊겼다.&amp;nbsp; 사근동에 살 때, 마당이 넓어서였는지 아니면 골목이 넓어서였는지 모르지만 나의 기억에는 빛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통의동의 기억은 불순한 그림자로 뒤덮혀 있다. 좁은 골목 위로 적산가옥과 개수한 집들의 처마가 한뼘으로 붙어있어 햇볕이 들지 못했고, 마당으로 든 햇빛 또한 마루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그림자 밑으로 수시로 거지들이 동냥을 왔으며, 때로는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문둥병자들이 돈을 달라고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우리를 마당&amp;nbsp; 끝으로 물리고 몇푼을 그들의 동냥통에 던져주어 보내곤 했다. 때론 술취한 상이군인들이 옷소매 사이로 집게손을 내밀며 빚진 돈이라도 받으러 온 것처럼 적선을 하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때론 배고픈 거지들이 남의 집 부엌에서 먹을 것을 훔쳐먹다가 들켜 순경에게 쫓겨 도망가다가 우리집에 들어서기도 했다. 어머니는 순경들에게 동냥온 거지일 뿐이라고 했고, 여보란듯이 식은 밥을 덜어다 그들의 동냥통에&amp;nbsp; 넣어주기도 했다. 하지만&amp;nbsp; 경찰들은 문 밖에서 그들을 잡았다. 경찰도 가난하여 수갑과 같은 장비가 없었다. 그들은 범인의 바지가 흘러내려 도망갈 수 없도록 허리띠와 바지단추를 풀은 채, 그들을 앞장 세워 파출소로 몰고 갔다. 어머니에게 왜 도둑을 도와주냐고 물으면, &amp;quot;배고파 하는 도둑질은 죄가 아니다&amp;quot;시며, 골목 밖으로 사라지는 거지를 안타깝게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amp;quot;숨겨주셔서 고맙습니다.&amp;quot;하고 인사를 하고 가는 거지도 있었다. 골목 한쪽에는 공동수도가 있었다. 때론 수돗가에서 똥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전날 밤에 골목 안 어느 집인가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다. 학교를 가다가 똥을 보았다면 누구나 집으로 돌아가 &amp;quot;엄마~ 도둑이 들었나봐? 수돗가에 누군가 똥싸고 갔어&amp;quot;라고 했고, 그런 날이면 집집마다 도난당한 물건이 없는가 집을 뒤졌다. 도둑들이 똥을 싸질러 놓는 이유는, 똥을 싸면 몸이 가벼워져 담도 훌떡 넘을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했고, 똥을 싸놓으면 똥냄새에 취한 개들이 더 이상 도둑을 뒤쫓을 수 없어서 도둑들은 한밤 중에 동네에서 제일 깨끗한 곳에 똥을 질러놓고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집집마다 훔쳐갈 변변한 것은 없었다. TV래야 동네를 통털어 두대인가 있었고, 우리 집에서 그나마 값이 나간다면 싱가 미싱 정도나 될까? 하지만 종종 골목 안으로 도둑들이 들었고 은수저 등을 훔쳐가곤 했다. 당시의 도둑들은 칼과 같은 험한 물건을 몸에 지니지 않았고, 집 안으로 든 도둑을 보면 사람들은 조용히 헛기침을 해서 도망가도록 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서로를 안스러워하고 서로를 해하지 않으려 했지만, 골목에는 늘 어둠이 깃들고 빈한한 집집마다 쥐들은 들끓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을 것이다. 늘 쌀독의 바닥을 보고 내일의 끼니는 어떻게 하나 한숨을 지어가며 그 날 저녁을 지었고, 구들에 불을 피우고 비가 새지 않는 지붕 아래서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은 참 좋은 날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른들께 &amp;quot;진지드셨어요?&amp;quot;하고 인사를 여쭈었다. 그래도 골목을 벗어나면 또래의 아이들이 백송나무가 있는 공터에서 뛰어놀았다. 대부분 평안도에서 월남한 사람들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동네에는 서울말과 평안도 말이 섞였고, 아이들은 아버지를 닮아 거칠었다. 그들은 싸움을 즐기고 아이들조차 노름을 좋아했다. 이들은 또 질겨서 다방구를 한번 했다하면, 동네의 경계를 넘어서 잠박(자하문 밖의 준말로 지금의 구기동)까지 도망을 갔고, 방학과 같은 경우 잘못 술레를 하면 며칠동안 애들을 잡으러 다녀야 했다. 하지만 그때 그런 놀이마저 없었다면, 다른 할 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골목의 한 집에 세들어 살던 처녀가 목을 매 자살을 했다. 그리고 골목 사람들이 몰려든 사이로 하얀 천으로 얼굴까지 덮힌 처녀의 시신이 지나갔다. 동네 사람들은 아이쿠 저를 어째 하며 웅성거렸고, 그 뒤로 아이들은 신기한 일이나 있는 냥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른들은 얘끼 이놈들! 집에 가서 공부나 하라고 했지만, 죽은 사람을 본 적 없는 아이들은 죽음이 궁금했다. 한동안 처녀의 죽음에 대해서 남자를 사귀었는데 그만 정조를 잃고 남자가 떠나서 자살을 했노라고 하기도 했고, 더 이상 먹고 살 길이 막연해서 세상을 버렸다고도 했다. 집 주인은 처녀가 자살한 집에서 살기가 너무 꺼림칙하다고 이사를 서둘렀다. 그러던 중 누군가 밤 중에 골목을 접어들다가 그 집 문 앞에서 울고 있는 처녀를 보았다고 했다. 그 후론 밤 중이면 골목의 발길이 뜸해졌고, 방과 후 자습이 끝난 누나를 집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어머니가 골목 앞까지 나가 서성이곤 했다. 더 끔찍한 소문은 산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노름을 즐겨하던 동네에서는 어느 집 아들이 나가서 도박을 즐겼는데 결국 손목을 자르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그것보다 골목 앞에 삼층 양옥이 한 채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집에서 노름이 벌어졌고 경찰이 급습했다는 것이었다. 노름꾼들은 도주를 했고 그 중 한사람이 이층에서 담 밖으로 뛰어내리다가 담에 걸쳐진 쇠꼬챙이에 찔렸다는 것이다. &amp;quot;죽었어?&amp;quot; &amp;quot;죽지는 않았는데 쇠꼬챙이가 똥구멍을 지나 뱃 속 깊숙히 들어간 채, 사내는 담벼락 위에서 오랫동안 소리를 질러댔다는거야.&amp;quot; &amp;quot;뻥이지?&amp;quot; &amp;quot;아니야! 우리 아빠가 노름꾼이라는 것은 잘 알지? 우리 아빠가 그러던걸.&amp;quot; 나는 골목을 들어설 때마다 그 양옥집의 담벼락에 둘러쳐진 쇠꼬챙이를 보며 얼굴을 찌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이야기는 다른 동네에 없는 백송나무 밑의 공터에서 은밀하게 번져갔고, 모든 일들이 사실인냥 받아들여졌다. 20100203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yeeryu.com/850&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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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type="html">유년의 나날들-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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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旅인</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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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10-02-03T10:16:28+09:00</updated>
  <published>2010-02-02T15:51:17+09:00</published>
  <summary type="html"> 동생과 나는 생일이 일주일 벌어지는 세살 차이다. 하지만 싱가포르 상해 등지로 전전하다보니 일년에 한두번 만나는 동생은 형인 나보다 늙어보인다. 나는 머리숱이 많고 세치도 없는데다 얼굴도 팽팽한 데, 동생은 머리의 한쪽이 슬슬 빠지기 사작했고 얼굴에 주름이 많이 갔다. 동생의 나이든 얼굴을 보면 동생의 착한 마음을 세월이라는 것이 할퀴고 간 흔적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동생은 나에게만 화를 내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부러워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형이 자신처럼 틀에 맞춰 살지 않고 개판 오분전이거나, 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은 구석이 있다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취직을 하고 얼마 안된 때였다. 같은 방을 쓰고 있던 동생은, 아니 그것보다 동생 방에 내가 얹혀 살고 있었다. 저녁 후에 동생은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책을 읽는지 몰라도 동생은 며칠동안 그 책을 보면서 킬킬거리거나 때론 아주 큰소리로 웃거나 했다. &amp;quot;너 미쳤냐?&amp;quot; 놈은 그것이 아니야 하곤 다시 정색을 하고 책을 읽었다. 책의 표지를 보니 신예작가인지 이외수라는 요상망칙한 이름의 작자가 쓴 &amp;#039;장수하늘소&amp;#039;인가를 읽고 있었다. &amp;quot;재밌냐?&amp;quot; &amp;quot;응, 주인공이 아주 독특한 사람이야.&amp;quot; &amp;quot;어떤 사람인데...?&amp;quot; &amp;quot;꼭 형같은 사람이라고 할까?&amp;quot; &amp;quot;그럼 또라이?&amp;quot; &amp;quot;맞아! 그런데 형은 자신이 또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amp;quot; &amp;quot;그냥!&amp;quot; 우리는 그 날 간만에 형제 간에 긴 이야기를 했고, 동생이 나를 단순히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동생의 단정한 세계를 부러워하는 만큼, 동생도 나의 독특한 세계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간신히 알았다. 하지만 그 후 이외수의 소설을 읽고 내가 알아낸 것은 내가 이외수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그들보다 더 초현세적인 면이 있기도 하지만, 동생이 알고 있는 것보다, 나는 집요하고 훨씬 견고한 세계 속에 자신을 가둬두고 살고 있다. 아무튼 나의 기억은 오래 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1961년 10월부터 나의 기억은 시작한다. 그러니까 딱 만 세살부터이다. 기억이 시작하는 달까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 해 그 달, 동생이 태어났다. 하지만 너무 어린 관계로 기억들은 포말과 같이 나타났다가 망각의 어둠 속으로 접혀들곤 한다. 기억이 계기적 질서를 갖고 지속되고 통합되는 싯점은 다섯살이나 여섯살때 부터인 것 같다. 그 싯점에 할머니가 계시는 두메산골 함양에 갔고, 할머니에게 미운털이 박힌 관계로 얼마 있지도 못하고 서울로 쫓겨난 시기이기도 하다. 나의 기억은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기억의 파편들을 지속적으로 연결짓고 검증해나가는 절차들을 반복해나갔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amp;quot;엄마! 우리가 십계를 본 곳이 명보극장의 이층 난간 자리가 아닌가요?&amp;quot; 어머니는 한동안 기억을 더듬다가 &amp;quot;그걸 어떻게 아니?&amp;quot;라고 물은 뒤, &amp;quot;명보극장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난간자리인 것은 모르겠다.&amp;quot; 찰톤 헤스톤이 나오는 이 영화의 개봉일은 네이버에 1973.6.16일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1956년에 미국에서 초영된 이 영화는 1962년~1964년 사이에 분명히 국내에 들어와 초연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 내용을 기억할 수 없지만, 바다가 갈라진 후 이집트 병사들이 바닷물 속에 휘말리는 장면을 보았고, 나는 이층 난간의 원통형 신쭈(황동)가름대 위에 볼을 대고 그 시원한 감촉을 즐겼던 기억이 뚜렷하다. 우리 식구가 서울로 이사와 처음으로 산 곳은 사근동이다. 기억을 더듬으면 한양대 언덕 뒷편에 있던 집에서는 중량천이 가까웠다. 까닭에 개구리가 많았고 때론 두꺼비도 골목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세살배기가 어떻게 개구리를 잡았는지 몰라도 마당의 모래밭에서 개구리를 뒹굴리거나 밀짚을 개구리의 똥구멍(그것이 똥구멍인지조차 모르겠다)에 밀어넣고 바람을 분다거나 하는 가혹행위를 자주한 것 같다. 어린 나는 동네 어귀의 세탁소에 가서 다림판 밑으로 기어들어가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다리를 몰래보거나 세탁소의 한쪽 구석에 앉아 손님들과 주인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지금도 그 세탁소 속에 감돌던 냄새와 집에서 세탁소에 이르는 길(어려서인지 몰라도 골목이라기에는 너무 넓었다)을 부분적으로는 기억할 수 있다. 기억은 장롱 밑의 뭔가를 보다가 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일지도 모르는 기억도 있다. 신발장을 올라가다가 벌에 쏘여 떨어져 울었던 일, 제 깐에는 높은 장독대에 올라가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amp;quot;엄마~ 나 봐요&amp;quot;하고 소리치던 기억들이 있지만, 장롱 밑을 보다가 울었다는 것이 최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기억 이전은 깜깜하고 막연하다는 것이다. 빛이 가득한 방 안에 누워서 어두운 장롱 밑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것이 &amp;lt;나&amp;gt;라는 것, 장롱 밑의 먼지에 뒤섞여있는 어둠이 무섭다거나, 장롱 밑으로 뭔가 굴러들어갔는데 손으로 잡을 수 없어서 신경질이 났기 때문에 운 것은 아니다. 외롭다기보다 심심한 것 같은 약간 미식거림이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데, 도무지 그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득한 망각의 시간을 헤치고 나와 그만 울었던 것이다. 그 막연한 오열의 정체는 엄마의 부재로 부터 비롯한 것이었다. 그 기억은 포말이 꺼지듯 사라지고 태고와 같은 망각을 지난 어느 날, 누군가 나를 불러 깨웠다. &amp;quot;엄마가 온단다. 동생 마중가야지?&amp;quot; 아마 아버지였을 것이다. 어두운 골목길로 나가 엄마가 가슴에 커다란 것을 안고 오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안고 있었던 것은 바로 동생이었다. 그 후 나의 기억은 사라지고, 포말과 같이 단편적인 기억 만 간헐적으로 날 뿐이다. 우리 식구가 서울의 까마득한 변두리에 살게 된 것은, 왕십리에 전차 종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다. 불현듯 서울행 열차를 탔고 서울시 임용고시를 보셨다. 아버지는 그 시험에서 수석을 했고, 서울의 삼대공립이라는 수송국민학교의 선생이 되셨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일학년이던 누나와 함께 전차를 타고 하염없이 먼 광화문까지 출퇴근을 했다. 그 후 누나의 학년이 올라가고 아버지께서도 출퇴근시간이 너무 길어서인지 학교 근처인 적선동으로 셋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적선동에 살 때, 나를 세번이나 잃어버리고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개량한옥집의 문칸쪽에서 살았다는 것만 기억난다. 기억이 없는 것은 이 시기에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형이 서울로 돌아왔고, 좁아터진 방에서 형과 동생이 쌈박질이나 하는 것을 보지 못한 어머니가 삼촌편에 나를 할머니 곁으로 보냈다. 좌우지간 몇개월을 나와 함께 산 할머니는 &amp;quot;천하에 저 숭악헌 놈하곤 다시는 못살것다.&amp;quot;며 고향으로 내려온 삼촌편에 달려 다시 나를 서울로 돌려보낸다. 서울로 돌아왔을때 지금은 늙어죽었지만, 천연기념물인 백송나무가 동네의 절반을 넘도록 가지를 크게 벌리고 있는 통의동으로 이사를 했다. 골목 사이로 인왕산이 보였다. 이곳에서 학교들어가기 전인 6살에서 중학교 1학년 1학기까지 살았다.&amp;nbsp; 20100202 &lt;p&gt;&lt;strong&gt;&lt;a href=&quot;http://yeeryu.com/849&quot;&gt;글 전체보기&lt;/a&gt;&lt;/strong&gt;&lt;/p&gt;</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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