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학;考證學

考證學

◎ 청대 학계의 주류를 이룬 방법론 : 건륭과 가경제 때 활발하여 乾嘉之學이라고도 함.

송대의 사변철학인 주자학이나 명대의 관념론인 양명학과 달리 폭넓게 자료를 수집하고 엄격한 증거에 의거하여 실증적으로 학문을 연구하고자 했으며 <실사구시>가 그 신조임.

◎ 대상영역 : 經學을 중심으로 문자학, 음운학, 역사학, 지리학, 금석학 등 범위가 넓음

◎ 대표학자

經學(顧炎武) ▷ 그의 <音論> 가운데서 논증에 임해 본증(本證: 그 서적 자체에서 증거를 구한 것)과 방증(傍證: 다른 서적에서 증거를 찾은 것)을 채용하여 이를 토대로 정확한 논단을 내려야 할 것을 주장함. 그는 근거없는 억견을 배척하였으며, 직접 각지를 편력하고 실지조사를 하였음. 이와 같은 실사구시의 학문이어야 실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함.

史學(黃宗羲) ▷ 폭넓게 사료를 수집하고 투철한 史的 통찰에 입각하여 당시의 정치문제를 논함. 또 역사서술을 보완하는 것으로 表(기전체의 역사 서술에서 각종 연대표를 서술하는 부분)와 志(기전체의 역사책에서 본기·열전 외에, 천문·지리·예악·정형 따위를 기술한 것)의 역할을 중시했는 데 청조의 역사학에 영향을 미침.

◎ 고증학의 성과

① 고전 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고증이 이루어져 그 진위가 감별됨. 이는 신성한 경전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회의한 점에서 일종의 사상해방의 의미를 지님.

② 경전에 대한 注疎의 오류를 지적하고 새로운 주석을 만들어 고전연구가 획기적으로 진전됨. 이 과정에서 문자, 음운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였고, 고전의 인쇄나 유전에 있어 오탈에 대한 교감학이 발전하여 고전에 대한 고증과 복원이 이루어짐. 이 교감학은 유교 이외에 제자학에도 미쳐 제자학 연구의 단초를 마련함.

③ 역사학에서 고증학 방법이 도입되어 연대나 사실에 대한 고증과 오류의 정정이 이루어지고 輔註와 表, 志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역사학의 체계가 정비됨.

④ 이미 흩어져 없어진 서적을 찾고 복원하는 일이 벌어짐.

  참고> 실사구시

※ 참고: 훈고학(訓詁學)

경전의 자구(字句) 뜻을 바르게 풀이함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송(宋)나라·명(明)나라 왕조의 의리(義理)에 관한 학문과 대칭하여 한(漢)나라·당(唐)나라 여러 유가(儒家) 들의 경학(經學)을 가리켜 훈고학이라 한다.

훈고학은 중국 고전의 해석상 무엇보다 기본적인 학문이며 역사적으로는 진(秦)나라·한나라 성립기에 문헌으로 정착된 고대 전적에 대해서 그 내용을 바르게 해석할 목적으로 붙이는 주석과 그 방법을 가리킨다.훈고학 최초의 문헌은 한나라에 이르러 집대성된 자서(字書)로서 십삼경(十三經)의 하나인 《이아(爾雅)》이다.

이것은 진나라·한나라 이전의 고전인 오경(五經)에 나오는 문자를 19가지로 분류하여 그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후한(後漢)시대에는 마융(馬融)·정현(鄭玄)·가규(賈逵) 등의 뛰어난 학자가 나타났으며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는 문자의 학문인 소학(小學)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위(魏)·진(晉) 사이에는 왕숙(王肅)·왕필(王弼)·하안(何晏)·두예(杜預)·범녕(范寧) 등의 주석가가 나왔다. 당나라 때는 안사고(顔師古)가 태종의 명을 받아 오경의 탈오(脫誤)를 보정(補正)하고 공영달(孔穎達) 등이 지은 《오경정의(五經正義)》가 나왔다.

그 뒤 송나라 때 의리를 주로 하는 경학, 즉 성리학이 일어나면서 훈고학은 일시 쇠퇴하였다. 그러나 청(淸)나라 때 고증학의 발달로 새로운 방법의 고대어 주석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철저한 고증에 의하여 경의(經義)를 밝히고 문자와 그 뜻을 분명하게 가려낼 것을 요구하는 훈고학파가 대두하였다.

또 문자는 언어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먼저 언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문자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보는 음운학파(音韻學派)가 나타났는데 이를 청대소학(淸代小學)이라고 하며, 대표적인 학자는 대진(戴震)·단옥재(段玉裁)·왕염손(王念孫)·왕인지(王引之) 등이다.

그들의 연구결과는 주준성(朱駿聲)의 《설문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에 집대성되었다.아울러 한나라 이후의 학서(學書)가 모두 미흡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금석학파(金石學派)와 현재 전하여진 경서가 수없이 탈오, 착간(錯簡)되어 믿을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하여 교감파(校勘派)와 집일파(輯佚派) 등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