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어제 딸내미와 남한산성으로 갔다.

가을이 되버렸다는 것을 알기에 충분할 정도도 잎은 색이 짙어졌다. 아니면 하늘의 색 속에 차디찬 은분이 들어 있는 지도 모른다. 공기는 그늘 속에 더욱 짙었고 빛에서는 발광을 한다.

남한산성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송파에 있는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를 보아야 한다. 남한산성은 결코 적과의 치열한 전쟁의 흔적을 보여주지 못할 뿐 아니라, 갈 곳이 막연한 사람들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 가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곳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청나라 군사들이 옹성을 하고 있을 때, 먹거리가 없어 ‘묵’이라는 생선을 인조에게 받쳤더니 그것을 먹은 인조가 “이렇게 맛있는 생선의 이름이 어째 묵인가?”하며 은어라고 하라 했다고 한다. 삼전도에서 항복을 한 후 궁으로 돌아가 맛있었던 은어를 먹어본 후 “어찌 맛이 이러한 가? 도루묵이라고 하라!”해서 <도루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네이버 지식In에는 인조가 아니고 임진왜란 때 선조라고 되어 있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보면 나라가 망하고 흥하는 시기에 먹을 것을 갖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우매한 왕의 용렬함에 대한 비난이 깃들어 있다.

아무튼 남한산성의 병자년의 겨울은 혹독했고, 50일이면 끝나는 식량이 거의 떨어진 시점인 정월 30일 인조는 청 태종(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했다. 곤룡포 대신 남색 군복을 입고 호행 500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하여 산성 밖으로 나갔다. 언덕에는 눈길이 심히 미끄러웠다고 한다. 그는 삼전도까지 갔다. 거기에서 인조는 여진족의 신하의 禮에 따라 머리를 땅바닥에 들이받는 식의 인사(三拜九叩頭禮)를 했으며, 대가리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다시 하라고 하여, 몇번이나 머리를 땅 바닥에 쳐박아야 만 했다.

가을 빛이 선연한 남한산성에서 딸내미에게 굶주림과 치욕의 역사를 보여줄 수 없었다. 단지 산 속에 깃든 음식점과 줄지어 선 자동차들, 단지 고적으로 남은 성벽 밖에 보여줄 것이 없었다.

김훈의 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남한산성 서문의 치욕과 고통을 성찰하는 일은,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죽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이란 없는 모양이다. 모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결국은 받아들여진다. 삶으로부터 치욕을 제거할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겨누며 목통을 조일 때 삶이 치욕이고 죽음이 광휘인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그런데 서문 쪽으로 난 길에는 통행료 환불을 받겠다고 차들이 늘어서 꼼짝을 않는다. 결국 치욕의 서문을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다.

참고 삼전도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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