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24 17:11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천년이면...>이라는 글을 쓰는 것을 포기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섞고 하기에는 내 생활은 너무 무미건조할 뿐 아니라, 진솔한 대화가 부족하다. 때때로 내 말만 할 뿐 사람들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렇다고 가슴 속에 할 말들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닌 것을 보면, 나의 말이란 수다거나 푸념이거나 아니면 아뭇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하는 말을 듣지도 못한다. 그러니 대화로 무엇을 엮어간다는 것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천년이면...>은 1985년의 일이다. 그 해 여름, 동해와 삼척 사이에 있는 추암해수욕장으로 갔다. 추암해수욕장의 모습은 <천년이면...>의 해수욕장과 약간 차이는 있지만,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곳이다. 홀로 여름휴가차 울진의 불영계곡을 지나 동해바다를 우측으로 끼고 북상, 추암에 닿았다. 얼마 전 해일이 동해 일대를 강타했던 해변은 아수라장이었다. 파도에 쓸려온 모래는 뚝 너머 골목까지 수북했고, 집집마다 빨래거리들을 내다 말리고 있었다. 해일에 밀린 백사장은 자빠질 듯 가파랐고, 좁아터진 해변 위로 거친 파도가 헐떡거리고 있었다. 피서객들은 철수를 했는지 해변은 한산했다.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 후, 서울로 올라왔다.

그해 9월말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지나 간 일이라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쓸 수 있으나, 그때 회사에서 쫓겨났다. 사직서를 내고 며칠동안 어떤 인간에 대한 증오심과 몸담았던 조직에서 떨려난 후 무력감으로 낮잠이나 자고 있었다. 방에 쳐박혀 있을 때, 어머니께서 그럴 냥이면 여행이나 갔다오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배낭을 꾸리고 다음 날로 강릉가는 고속버스에 올랐다.

강릉에 도착한 후, 소금강 아니면 설악산으로 가려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그러나 울진행 시외버스를 탔고, 추암해수욕장 앞에서 내렸다. 그리고 동해남부선이 지나는 철로 밑, 굴레방다리를 지나 볼 것도 없는 좁다란 해변으로 다시 들어서고 있었다.

여름에 묵었던 숙소는 해변의 매점 뒤의 마당이 넓은 민박이었다. 그때는 날이 저물어 해변의 전경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겨우 오후 세시였고, 날은 투명하게 맑았다. 그래서 굴레방다리에서 부터 촛대바위 앞의 아트막한 언덕의 중간쯤에 붉은 양철지붕을 이은 집이 보였다. 무작정 바다로 흘러드는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그 집으로 가서 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피서철도 지나서 요즘 손녀가 지내는 방이 있는데..., 방을 치울 때까지 기다리겠는교?" 물었다. 마당에서 바다까지의 높이는 3~4미터쯤 되었고, 좁다란 해변과 그 너머로 토막난 수평선이 보였다. 촛대바위와 형제바위 사이의 물밑 암초를 지나 해변으로 몰려드는 조류의 소리가 가을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만족했다. 그래서 숙박비가 얼마인가도 묻지 않은 채, 머물겠다고 한 후, "그런데 하루에 얼마죠?"하고 물었다. "이년 정신바라. 손님에게 방값도 안갈쳐주구... 그랑까네 여름에는 삼만원까지 받았는데, 놀때도 아니고 이만원을 받아야 할지 만원을 받아야 할지 잘모리겄네..."했다. "그럼 만오천원 어떨까요?" 물었다. 아주머니는 "그라고 보니 학생 말이 맞네. 만오천원! 그라모 며칠이나...?" 삼일은 있을꺼고, 더 지낼지도 모른다고 했다.

방을 치울동안 해변으로 내려갔다. 뚝 뒤 골목까지 쌓여있던 길의 모래는 이미 치워졌으나, 아직도 해변의 끝 뚝 가로 몰려온 모래더미는 그대로였다. 푹푹 빠지는 모래더미 앞의 해변에 와닿는 파도는 지난 여름처럼 거칠지 않았다. 해변에 앉으니 이른 가을날의 투명한 오후 햇살 속으로 바다내음이 뚜렷하게 밀려들어왔다.

수평선과 너무 넓어 끝을 헤아릴 수 없는 하늘을 보자, 며칠동안 답답하던 가슴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오히려 좁은 책상 위에 계산기를 올려놓고 숫자를 맞추거나, 부서에 한대있는 모니터로 출하지시서나 작성하며 퇴근시간을 기다리던 무의미한 날에서 풀려났다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다시 민박집으로 올라가자, 방이 치워져 있었다. 그 방에서 지냈던 손녀인지, 지난 여름 햇빛 때문에 새까맣고 조그만 단발머리가 쓰레받이를 들고 나오며 수줍은 눈빛으로 인사를 했다.

"나 때문에 잘 지내던 방에서 쫓겨났구나."하며 오천원짜리를 건냈다. 계집아이는 쭈뼛거리다가, 오천원을 낚아채듯 받아들더니 "고맙습니다."하고 집 밖으로 달아났다.

마루에 놓아두었던 배낭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벽지가 깨끗했고, 형광등과 촌스런 무늬의 이불 한채, 그리고 낡은 티브이가 있었다. 미닫이 문을 닫으니 창호지 안으로 빛이 하얗게 내려앉았다. 다시 방문을 여니 아까 마당에서 들리던 조류의 소리가 조용하게 가슴 속에 차올랐다. 그리고 툇마루 앞에 여름에 사람들이 나와 고기도 굽고 모기향을 피우고 늦은 밤을 보냈을 평상이 있었다.

냄새가 나는 화장실 문제를 빼놓고는 모든 것이 좋았다.

이후 두번인가 더 묵었는데, 그 사이에 이 방은 그만 명소가 되고 만다.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용준이 최지우를 이복동생으로 알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헤어지기 전 함께 밤을 보낸 바닷가의 방이 바로 이 방이다.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먹고, 책을 읽으려다 그만 낮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낮잠을 자고 나면, 늘 마음이 붕떠서 불쾌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방 밖으로 나가 어두워지는 바다를 보았다. 어두워져가는 바다와 해안에는 등대 불빛도 해안선을 훑고 지나는 서치라이트도 없었다. 그리고 먼바다 위로 떠오르는 집어등조차 피어오르지 않았다. 피서철이 지난 해변의 집들 창을 넘어오는 불빛도, 가로등도 어슴프레하여 해변은 드문드문 어둠 속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늘 어둠 속에 깜빡거리는 객지의 아련한 불빛을 보면, 이유없이 서글펐다. 서글픈 이유는 알 수 없다.초라한 등불 밑에서, 모르는 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까마득한 삶들을, 간신히 이어간다는 것 때문일까? 아니면 등불 건너편에서 불빛을 바라보며 마침내 가슴 속에 깃들어 있던 외로움을 찾아내던지, 겉치레로 가려져 있던 수채구멍과 같은 내 삶의 한구석을 바라보며 나의 체취로 가득한 베개와 이불이 그리웠던지... 아무튼 객지의 불빛은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슬펐고, 아득했다. 그 슬픔이 아득할수록, 이상하게 삶에 대한 의욕과 애착은 차곡차곡 쌓이곤 했다. 하지만 멀미와 같은 것이 몰려왔다.

해변으로 갔다. 낮에는 풍경에 가려져 조용하게 울던 파도소리는, 어둔 숲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야수와 같은 낮은 숨소리로 해변의 어둠 속으로 내습했다. 하지만 바다 위에 그려지는 달빛은 고요해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아니 달빛 소리는 강렬하여 피부가 전율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적막의 끝에 닿는 고요의 소리였다.

그 소리에 가 닿자, 몸 속에 열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래서 뚝 위로 올라섰고, 술집을 찾았다. 좁다란 해변에서 간신히 문을 연 술집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술을 마시긴 해도, 좋아하지 않는다. 혼자 술을 마셔본 경험도 한두차례에 불과하다. 그것도 머리가 아파서였다.

그 날은 어쩔 수 없었다. 삐걱이는 식당문을 열고 들어가 김치찌게를 시키고, 소주를 시켰다. 김치찌게가 나오기 전에 익지 않았거나, 익었지만 배추 그대로인 김치를 씹으며 소주를 반병을 마셨다. 김치찌게가 나왔는 데, 싫어하는 참치가 들어있었다. 참치냄새가 밴 국물과 김치를 놔둔 채, 식탁에 놓인 멸치조림이나 우엉 등을 반찬으로 술을 마셨다. 취하지 않았다. 명치 끝에 머물던 열기는 식지 않고, 그 놈의 적막이 내 머리 속에 또아리를 튼 채 요지부동이었다.

"아무 것도 먹지 않았네. 이래서 우예 돈을 받노?" 너스레를 떠는 식당 아줌마에게 술값을 치르고, 옆의 슈퍼로 가서 맥주를 샀다. 해변으로 갔다. 달빛마저 사라진 검은 바다의 소리가 나의 몸 위로 쏟아졌다. 어둠을 건너 온 파도가 발 앞에서 하얗게 무너졌고, 그때마다 바다내음이 끼쳐왔다.

맥주를 마셨다. 트림이 나고 취기가 올랐다. 나른했기에 모래 위에 누웠다. 밤이슬에 젖은 모래의 습기가 옷 사이로 스몄고 추웠다. 그러나 고요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리며, 티브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 같은 것들은 들리지 않았다.

어느 술청에서 스텐공기나 주전자 뚜껑을 젓가락으로 두드려대며, 울려퍼지는 허무맹랑한 사랑과 애환의 찢어진 가락들이 듣고 싶었다. 아니면 어느 집 창에서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죽여 살려 하는 울음섞인 소리라도...

해변의 침묵을 견딜 수 없어 일어나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다.

모래에 발이 빠지는 낮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내 머리 맡에서 멈췄다."

"아저씨~, 여기 계시면 감기드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눈을 감은 채,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고 그냥 누워있었다.

여자는 뭔가 무섭거나 더러운 것을 놀래키려는 듯, 아저씨, 아저씨하며, 손가락 끝으로 어깨를 찔렀다. 여자의 손톱 끝이 아팠다. 아픔에 얼굴을 찡그릴 때, 코 끝으로 샴푸냄새가 쏟아져 내렸다. 그 냄새는 아주 아득하게 먼 세월을 건너와 내게 쏟아졌다. 정주와 함께 여행을 가거나, 영화를 볼 때, 내 어깨에 기댄 머리카락 속에 깃들어 있던 냄새, 아니면 그녀와 함께 거닐었던 도시의 곳곳을 감싸던 어린 시절의 향기였다.

그리움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어깨에 닿았던 여자의 손을 잡았고, 눈을 떴다.

"어머!"하며, 여자가 모래 위에 엉덩방아를 찌었다.

여자는 내가 잡았던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겁먹은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이었지만 분명 정주는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옷에 묻은 모래를 털며 일어섰다.

"괜찮으세요?" 여자가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아무 일 없습니다."

비어버린 캔을 들고 뚝 위로 올랐고, 다리를 지나 숙소로 올라갔다.

술을 먹었지만 별로 취하지 않았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 그마저 깼다. 몸에 남은 소주의 미적지근한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 방문을 열었다.

바람이 불어왔고, 내일의 햇빛은 끝없이 투명할 것이란 것. 그리고 세상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지만, 그런대로 살 만할 것이란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관념 속에서만 맴돌던 영원 속으로 스미고, 시간이 멈춰주기를 바라던 순간이 다가오리라는 것은 알 지 못했다.

2008/06/24 17:11에 旅인...face
2008/06/24 17:11 2008/06/2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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