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24 19:00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다음날 일출을 보지 못했다.

술김에도 책을 읽느라 늦게 잤다. 햇빛이 코끝에 노랗게 머물 즈음에 깨어났다. 그렇다고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방문을 열자, 마을이 금빛으로 발광하고 있었다. 방금 떠오른 햇살은 수평으로 해면을 타고 날아왔고 햇살을 받은 집들은 그늘이 만든 주름진 윤곽도 없이 빛으로 번쩍거렸다. 붉고 푸른 지붕도 햇빛에 발광했고, 동해남부선 철로변의 미루나무 잎이 아침바람에 깨진 거울조각처럼 반짝였다.

바다 위에는 밤동안 피어올랐을 물안개도 보이지 않았다. 형제바위 위로 갈매기 몇마리가 선회했지만, 멀리서 까치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문득 지친 여름이 갔고 가을이 왔구나 싶었다.

아침 바다는 꽤 추웠기에 긴 팔을 입고,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후, 해변으로 나갔다.

다리를 건널 때, 다리의 중간 쯤에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수평선을 보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과 팔과 옷에 아침 햇살이 와 닿아, 싱그러운 소리를 내며 깨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홀려 다리를 건너다 말고 여자를 한동안 보았다. 하얀 린넨천의 웃옷 위로 긴머리가 흘러내리고, 풍성한 치마를 무릎까지 올리고 햇살에 눈을 찌푸리고 정물처럼 꼼짝도 않고, 바다를 보고 있었다.

보다보니 옆에 가서 쪼그리고 앉아 같이 바다를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침 햇살을 몸 깊숙히 빨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곁에 다가가기가 쑥스러워, 그녀를 스쳐지나 해변 쪽에 닿은 다리의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눈을 감고 햇살을 받아들였다. 얼굴과 팔에 닿은 햇살은 몸 속으로 스몄고, 온기와 같은 것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나른했고 기분이 좋았다.

"괜찮으세요?"

소리나는 쪽을 보았다.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어제 해변의 그 여자였던가 싶었다.

"어제는 놀랐죠? 미안합니다."

거리가 좀 멀었기에 소리를 높혀 대답했다.

여자는 괜찮다고 하며 일어서서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나를 스쳐지나 해변의 뚝으로 올라섰다.

"저기, 아가씨!"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여자가 놀란 듯 어깨가 움찔하더니,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만날 때마다 놀라게 하는군요."

놀란 마음을 진정했는지, 무슨 일 때문이신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왜 그녀를 불렀는지 나도 몰랐다. 내 속의 무엇인가 충동적으로 소리쳤기에 스스로 의아해하며,

"아침은 드셨습니까?"하며, 더듬거리고 있었다.

나의 제안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나를 보며,

"아직요. 뭐 맛있는 것을 사주시려고요?"라며 웃음을 지었다.

아직 이빨도 닦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미안하다며 세수를 안했기 때문에 한 십분쯤 후 다리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 같다. 후다닥 세수를 마치고, 지갑을 챙겨들고 다리로 갔을 때, 여자는 없었다. 한동안 기다려도 여자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숙소로 올라가 라면이나 끓여먹을 생각을 할 때, 여자가 왔다.

"사실 저도 세수를 안했거든요. 세수를 하고 머리를 손질을 하다보니 기다리시게 했네요."

밥 먹을만한 곳을 찾았다. 철 지난 바닷가의 이른 시각에 문을 연 식당은 없었다.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배고프세요?" 하고 여자가 물었고, 그다지 고프지는 않다고 했다.

"그럼 우리 장보러 가요. 그래서 맛있는 것을 사서 해먹으면 되죠."

나는 음식같은 것을 못한다고 했다. 아침을 사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고생만 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우리는 이미 굴레방다리를 지나 국도변에 서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디까지가 동해시고 묵호, 북평인지 알 수 없다. 동해인지 알고 갔는데, 묵호어시장이었다. 우리는 시장통 이쪽 저쪽을 돌아보며, 고추, 깻잎, 초장과 식초, 간장 그리고 오징어회와 찌게를 끓일 만한 것들을 샀다. 여자는 나를 끌고 시장의 곳곳을 돌아보며, 사지도 않을 그릇을 골라 "예쁘죠? 하나 살까요?"하고 묻거나, 촌티나는 스웨터같은 것을 골라 어깨에 맞춰보며 웃었다. 그런 여자의 천진한 모습에 마음이 아늑해져, 우리가 아주 오래동안 사귀어왔던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장에서 국수를 말아먹었고, 튀김을 사먹었기에 더 이상 배는 고프지 않았다.

시장에서 비닐봉지 가득히 찬거리를 사들고 나왔을 때, 우리는 지쳐있었다. 다리도 쉴 겸 낡은 다방에서 커피를 마신 후, 추암으로 돌아오자 이미 점심 때였다.

여자의 숙소로 끌려가 여자가 시키는대로 양파와 감자를 썰고 풋고추를 씻었다. 그리고 참기름이나 그런 것을 사기 위하여 슈퍼를 왔다갔다 했다.

한시간 넘게 걸려 밥과 먹을 것들을 해서 그냥 방바닥에서 먹기 시작했다. 여자가 밥을 먹다가 풋하고 웃었다. 그 바람에 밥풀이 튀었다.

"꼭 소꿉장난하는 것 같아서 그만..."하며, 괜찮다는 내 곁으로 다가와 옷에 묻은 밥풀을 하나씩 떼냈다.

밥풀을 떼내고 있는 여자의 하얀 귓볼과 목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났고, 린넨 셔츠 사이로 하얀 윗가슴이 보였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몰라 할 때,

"다 떼어낸 것 같아요."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식사를 했다.

그녀의 자태를 보며, 여자가 예쁜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새벽 햇살에 빛나던 여자의 모습에 이미 반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여자의 모습을 객관화하고, 쓸데없는 감정에 휩쓸리지 말자고 했지만, 여자의 모습은 방의 그늘 속에서도 빛이 났다. 그러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약간 살이 올랐다 할 정도로 숙성해서 터질 것 같아, 나보다 나이가 더 든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한참 어려보이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해변으로 나갔다. 뚝방에 동네 사람만 간혹 지나가는 해변에는 우리 둘 만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이나 했다. 농담을 하기도 했고, 지나간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거나, 있었다고 믿을 수 없는 자신의 사랑에 대하여 말했다.

형편없었던 지난 날들을, 그래서 지금 얼마나 더 형편없어졌으며, 앞 날에 대한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것에 대하여, 아무 감정없이 나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다 보니, 정말 형편없는 놈 같았다. 더 미칠 일은, 형편없는 놈이란 것은 사실이다. 자기를 합리화하고 긍정하지 못하자, 세상에 대한 갈증이 모래 밑으로 스며들고, 바다며 오후의 하늘이 무채색으로 퇴색되어 버렸다.

여자는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더 이야기를 해달라고 나를 바라보았다.

힘들었지만, 어린 가슴이 자랐던 합정동의 노을에 대하여 간신히 간신히 이야기했다.

"나 같이 형편없는 놈에게 노을마저 없었다면, 나의 인생이란 남아 있을 것이라곤 없었을 지 몰라요.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낱말들의 의미란, 나에겐 있지도 않는 허기와 갈증일 뿐, 찬란한 노래가 될 수는 없었지요. 그것이 인생이라면 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살만한 이유도 없지요."

다소 격앙되어 터무니없이 문학적인 수사를 덧붙여가며 지껄였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친구들이나 여자친구들, 거리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 모두, 그런 것들과 자신들의 인생에 대하여 아주 하찮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만큼 그들은 현명했고, 나는 어리석을 수 밖에 없었단 말입니다.

어리석고 모자르다는 것을 처참하게 느끼면, 강변으로 나갔습니다.

그럼 저녁이 오죠. 아주 천천히. 그래서 언제가 오후고 어디부터 저녁이고 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때가 옵니다.

그 사이에 새빨간 노을이 있었어요.

한강은 그 노을을 향해 흘러갔지요. 처음에는 주황색으로 흘렀고 다음에는 자주빛, 그 다음에는 어떤 색깔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어두운 색으로 흘렀고, 밤이 되었죠. 그러면 강변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 앞에서 보는 순교자의 무덤에 높히 자란 나무가지에 걸친 저녁은 그래도 내일은 미미한 빛으로 밝아올 것을 예고하곤 했습니다."

나는 계속 떠들었다.

"그런데 이제 합정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서쪽 창에 다가오는 노을을 본 지도 오래되었고, 더 이상 나를 위로해 줄 것이 서울에는 남아있지 않아요."

미친 듯 지껄이고 있을 때, 모래밭을 딛고 있는 손등 위에 여자가 손끝으로 뭐라고 썼다. 손등을 내려다 본 후, 여자를 보았다.

"정우씨. 그래도 누군가 정우씨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마세요." 여자는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안타까움과 동정심이 가득한 여자의 얼굴을 보자 수치스럽기도 하여, 더 이상 지껄일 수 없었다.

한동안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다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이 해변은 좁아요. 그리고 제가 묵고 있는 곳도 아시잖아요."

숙소로 올라가, 책을 폈다. 여자를 만났는데, 전처럼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가까운 곳에 나의 말을 들어 줄 아는 사람이 생겼다는 느낌이 푸근했다.

방문을 절반 쯤 열어놓고 책을 읽었다. <지상의 양식> 속을 채우고 있는 글들은, 너무 아름다워서 믿을 수 없었고, 단어들의 의미를 발라낼 수 없어서 몽롱했다. 책을 읽으며, 내가 직장에서 떨려났다는 것에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기로 했다. 아니 글에서 튀어나온 낱말들이 나를 어디론가 떠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책을 덮어놓고 민박집 위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멀리 묵호항이 보였다. 항구에는 시멘트를 하역하기 위한 사일로인 듯, 부두의 옆에 거대하고 둥근 건물들이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 뒤로 크레인 철탑들이 삐죽삐죽 솟아있었으나 흐릿한 대기 때문에 현실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으니 들릴 듯 말듯한 무적소리가 바다를 건너왔고 배 한척이 부두에서 안간힘을 쓰며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배는 부두 앞에서 한동안 뒤척인 후, 세시 방향, 태평양을 향해 조금씩 나아갔다. 그리고 흐릿한 안개 속으로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항구의 곳곳에 수은등 불빛이 하나둘씩 점등되기 시작했고 또 저녁이 왔다.

2008/06/24 19:00에 旅인...face
2008/06/24 19:00 2008/06/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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