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16 13:38 : 무지개, 24분지 1의 꿈

비정성시(悲情城市)란 비정한 도시가 아니라, A City of Sadness, 즉 '어느 슬픔의 도시'이다. 26살의 양조위가 벙어리로 나오는 1989년작 이 영화에는 정작 도시라고 할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무대인 지우펀(九份)은 대만 북단의 항구도시 기륭(基隆)의 동남쪽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는 마을이다. 가 보질 않아서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으나, 한국에서 드라마 <온 에어>가 방영된 후, 한국 관광객들로 이 조그만 산마을이 북적인다고 한다.

2000년 8월, 서울로 식구를 보낸 나는, 홀로 타이뻬이로 여행을 간다. 그리고 하루는 타이뻬이역에서 열차시각표를 들여다 보다가 불현듯 기륭으로 가는 열차표를 사게 된다. 그리고 낡은 열차에 올라 입을 꽉 다문 채 차창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철로변 풍경은 더러웠다. 습기에 모든 것이 삭아내리고, 개천변의 쓰레기 사이로 시커먼 또랑물이 흘렀다. 들뜬 열기 속에 부패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이 포모사(아름다운 섬)라는 별칭을 지닌 이 섬을, 이토록 추하게 만들었는가 했다.

아마 타이뻬이에서 부터 줄곧 느꼈왔던 것, '독재'였으리라. 죽은 독재의 잔재와 악취는 우리의 것보다 짙고 육중했다. 아름답고 진실된 것, 선함이 사악함에 의해서 능멸당하여, 폭압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거짓된 정의로 포장되었을 때... 새어나올 수 있는 것이란 신음과 썩어버린 진실과 골아빠진 美, 즉 추물이 아니었던가?

대만의 역사란 그런 것이었다. 대만의 짧은 역사는 우리와 늘 호흡을 함께 해 왔다.

H.하멜은 1653년 1월 네덜란드를 출발, 그 해 7월 대만에 도착했고, 유구열도를 따라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조난. 8월 중순경 제주도까지 밀려오게 된다. 그가 14년간 조선에서 살다 탈출한 기록이 하멜표류기이다. 이때 대만은 네덜란드의 땅(점령지)이었다.

이것이 일본과의 흑선무역이 포르투칼(마카오기지)과 네덜란드(대만기지)에 의하여 독점되고, 서양학문을 난학(화란학: 네덜란드학문)이라 한 단초이다.

중국역사 속에 대만은 펑후이(澎湖), 夷州, 琉球國 등과 함께 거론이 되지만, 당시만해도 대만에 사는 원주민은 필리핀 등과 유사한 남도어계였다(지금의 고산족). 원나라 때부터 행정기관을 두긴 했지만 실효적인 지배권은 의문시되는 가운데, 포르투칼에서 대만을 발견하고 Ilha Formosa(아름다운 섬)라 한다. 그 후 네덜란드가 남부 타이난(台南)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건설(1624년)한다. 스페인 또한 대만 북부를 점령(1626년)하였으나, 네덜란드에 의해 쫓겨난다(1642년). 네덜란드는 복건성 사람들을 끌어들여 플랜테이션 경영을 하는 한편, 아시아의 전초 기지로 활용한다. 즉 대만의 역사는 서구열강의 식민지 경영과 함께 시작한다.

대만의 타이난에서 서북 160해리(297Km)에 샤먼(廈門)이 있다. 샤먼의 또 다른 이름은 아모이이며, 아편전쟁 이후 난징조약에 따른 최초의 개항지의 한 곳이지만, 그 이전에는 왜구들의 은거지이기도 하다.(왜구가 등장하는 동방불패의 무대도 복건성 해안 일대다)

왜구를 단순 쪽바리 해적놈 쯤으로 우리는 이해하지만, 이들은 무역과 노략질을 복합 운용하는 집단이다. 왜구는 본시 쪽바리들, 주군를 잃은 군인(료닌)과 상인, 해적들로 이루어졌으나, 한두세기가 지나면서 중국인, 조선인이 가세하고 멀리 동남아 해적들도 가세하며,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해적질, 약탈, 인신매매까지 영역을 확대한다. 16~17세기의 경에는 이들 왜구는 朝 中 日 해적들의 통칭으로 변질한다. 우리 서해안을 노략질 할 때, 조선 해적이 물길을 안내하고, 중국의 동해안을 약탈할 땐, 되놈이 뱃길을 잡았다. 세종실록에는, '왜놈은 불과 한 두놈이고 우리 백성이 거짓으로 왜복을 하고 작당하여 난리를 피웠다'(주)고 기록되어있다.

이들 해적들이 서식하던 대표적인 곳이 샤먼이다. 복건성 남부(민남)는 예전부터 오랑캐 월의 유민들(오랑캐)이 사는 곳이며, 왕화가 미치지 않는 변경이라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미약한 가운데, 샤먼이 있는 만은 넓고 점점이 섬들이 늘어서 있는데다 만의 입구를 금문도가 수비하여 오목하여 해적들이 숨을 곳이 많고, 외부에서 공격해 올 시 만의 섬과 섬 사이로 빠져나가기가 용이하여 해적들이 웅거하기에 천혜의 요새다.

이 샤먼에 웅거하던 해적왕 정성공(鄭成功 : 1624~1662)이 바로 대만 현재의 역사와 직결된다.정의 아버지는 중국인 정지룡이며, 어머니는 다가와 시치자에몽(田川七佐衛門)의 딸, 즉 일본여자이며, 그는 나가사키에서 태어났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국제간 해상무역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준다.

7살에 아버지의 부름으로 중국으로 간 그는 난징 태학에서 학문을 배운다. 그의 나이 21세, 명이 멸망(1644년)하자, 당왕 융무제를 옹립, 반청복명을 노린다. 그는 후에 아버지의 해상권을 물려받아 금문, 샤먼 두 섬을 근거지로 연안을 공략하고 무역을 하며 반청의 기치를 들고 난징을 공격하였으나, 공략에 실패하고 샤먼으로 철수한다. 만청 정부가 1661년 연안 5성의 백성을 내지로 옮겨 정성공과의 연계를 차단하는 천계령(遷界令)을 펴자, 그는 타이완을 공략, 1662년 2월 1일 네델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정씨 왕국을 세운 후, 복건성 남부(민남)와 광동성 북부의 사람을 대거 타이완에 이주시킨다. 이들이 바로 본성인이자. 현재 대만 인구의 90%에 달하며, 복건성 남부지방 방언인 민남어를 쓴다.

정성공은 대만을 점령한 후, 이를 근거로 반청활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그 해 6월 급사한다. 그 후 강희제 때 삼번의 난을 계기로 정씨가 복건성 일부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결국 1683년에 청에 투항하고, 대만은 만청정부의 식민지 상태로 근대를 맞이한다.

이러던 중 조선의 난리 때문에 1895년 대만은 갑자기 팽호열도와 함께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동학운동 끝에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 시모노세끼 조약에 의거, 대만과 팽호열도가 일본에 할양) 대만에 진주한 일본의 일성은 "정성공의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대만과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누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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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51년의 일제 식민지를 거치고, 우리처럼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라는 작자의 얼룩덜룩 구겨진 목소리와 함께 광복을 맞이하는 것으로 영화 <悲情城市>는 시작한다.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의 카메라는 감정이 없다. 정지된 카메라는 1945.8.15일에서 1949.12월까지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냥 읽어내고,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것이 딥 포커스와 롱샷이 가져다 주는 미장센 효과일지는 몰라도, 그의 영화는 한 가족에 대한 한편의 기록영화같다.

해방에 따른 기쁨이 그 집 안과 그 마을에는 보이지 않는다. 또 벙어리 문청이 친구의 여동생인 관미에게 글을 쓰고, 관미가 또 그 글을 읽고, 다시 거기에 글을 써서 문청에게 주기까지, 카메라는 한가하게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양조위가 분한 문청의 얼굴이 선한 반면, 여주인공 관미의 얼굴은 예쁘지 아니하다. 그들의 표정 속에서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 또한 읽을 수 없다. 허우 감독은 관객의 슬픔과 분노와 같은 감정을 유도할 생각을 않는다. 단지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여줄 뿐이다. 주인공 관미의 나레이션 또한 아무런 애조없이 담담하다.

가족사에 앵글을 맞춘 그의 영화는 방안과 대청, 술집 안과 골목의 풍경, 그것도 화면의 일부는 방문에 짤리고, 담벼락에 짤린 것이 대부분이다.

하여튼 카메라가 이 풍진세상을 어찌 알겠는가? 카메라에 비친 세상은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그래서 카메라가 잡은 무덤덤한 풍경의 한 켠에서 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는 가를 애써 잡아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비정한 카메라 앞에서 임씨 집 안의 4형제는 행불(둘째), 피살(첫째), 실종(막내) 등으로 사라지고 셋째 만 정신병자가 되어 살아남게 된다. 풍비박산이 난 이 집의 균열의 어디까지가 대만의 현대사의 탓이고, 가족사의 탓이라고 구분짓기는 어렵다.

단지 막내이자, 벙어리 사진사인 문청의 사라짐이 광복과 국부천대(國府遷臺 1949.12.7일) 사이의 2·28 사건과 관련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4·19나 5·18과 닮아 있는 2·28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1945년 10월 25일 대만 주둔 일본군은 대만 진주 중국군에 정식 항복하고 이 날부로 대만의 국민당 정부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우리는 1945년 9월 9일 미 24군단의 하지중장이 노부유키 조선총독으로 부터 항복문서를 받고 미 군정시대로 들어간다) 이때 대만의 신임장관은 '진의'라는 매국노이자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미국무성의 백서를 보면, 진의와 그의 수행원은 교묘하게 대만을 착취했으며,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던 1947년 2월 27일밤, 타이뻬이시. 전매품인 담배를 몰래 팔던 노파를 단속반이 모질게 폭행한다. 모든 민중봉기는 꼭 그렇듯 주변사람들이 항의하자, 단속반원은 군중들에게 발포를 하고 시민 한명이 사망한다. 그 다음날인 2월 28일, 대만경비총사령관이 계엄을 선포하고 진의의 집무처에 항의를 위하여 밀려드는 시위대에 기총소사를 퍼부어 사상자를 내게 된다. 이에 전 섬 주민이 들고 일어나 방송국을 점거하고 궐기를 외쳤다.

이데 따라 참의원은 '담배 단속 살인사건 조사위원회'라는 웃긴 위원회를 세우고, 진의가 섬 주민에게 "① 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② 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③ 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④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함께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 이번 폭동문제를 처리토록 한다."고 공포하면서 3월 4일 이후 사태가 진정되는 듯 했다. 하지만 처리위원회의 요구사항이 정치개혁, 인권보장에까지 이르자 장개석에게 병력을 요청한다.

본토의 21사단이 3월 8일 새벽 두시 타이뻬이에 진주하면서, 섬 전역에 걸쳐 대규모의 학살이 전개된다. 3월 21일에야 진정된 이때의 대학살로 사망자는 3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때 문청이 관미의 오빠이자 친구인 관영과 함께 타이뻬이로 갔다가 벙어리인 탓에 분노한 사람에게 자신이 본성인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하여 맞아죽을 뻔 한다. 그리고 관영은 2·28 사건의 실패와 함께 산 속으로 숨어들고, 문청은 관영의 친구라는 이유로 옥고를 치른 후 관미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는 한편, 관영에게 운동자금을 댄다.

그 후 관영이 체포된다. 이를 안 문청은 관미와 아들을 데리고 도주한다. 어느 낯선 곳에서 일가족은 사진을 찍고, 3일 후 문청은 체포된다. 그 후 그의 소식은 없다.

이때가 장제스(蔣介石) 정부가 본토에서 패색이 짙자, 1949년 5월 21일 계엄령을 발표한 후 대만 내의 위험분자들을 색출하고 대량 체포가 시작된 시점으로 보인다.

모두가 죽고 사라진 어느 날, 남은 식구들이 식사를 마쳐 탕빈 자리에 "1949년 12월 대륙은 공산화되고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철수하여 임시수도를 타이뻬이에 정했다."(國府遷臺)는 자막이 떠오르며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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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발효된 계엄령은 38년이 지난 1987년 7월 15일 장징궈(蔣經國)의 명령으로 해제된다. 그리고 2000년 3월 민주진보당이자, 본성인(대만인)인 첸수이벤(陳水扁)이 총통이 됨으로써 본격 대만인에 의한 정부가 시작되지만, 민진당 정부의 부패, 경제정책 상 무능, 격화되는 양안관계 등에 따라 다시 국민당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아직도 대만의 남쪽은 민진당, 북쪽은 국민당을 지지하는 지역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허우 샤오셴 김독은 "나는 사람들이 태어나서 살고, 죽고, 헤어지고, 좌절하고, 재난을 만나는 것이 슬픔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일로부터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 그러한 과정을 나는 묘사하고 싶다. 사람들이 발휘하는 생명력, 그것이 바로 감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맞다! 그의 영화 悲情城市는 바로 그렇다.

여담...

임진란이 일어나기 몇년 전인 선조 22년 황해도에서 장계가 올라온다. 정여립이 전라, 황해 양도에서 일시 거병하여 역모를 도모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조정의 색출이 시작되자 정여립은 진안의 죽도로 도망을 가서 관군이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 아들과 함께 자결을 한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진짜 역모냐 송익필의 무고냐 진위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송강 정철의 주도로 물경 천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조선 최대의 사화인 동시에 정여립이 전주 출신이며 그의 대동계가 전라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전라도를 반역향으로 낙인을 찍는 계기를 만들었고, 호남지방의 양반들의 출사가 저지되었다.

택리지에 전라도는 주민들이 노래와 여자를 좋아하며 사치를 즐기며 행실이 가볍고 간사하여 학문을 중히 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는 싸가지없는 양반놈들에 국한할 때는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정여립의 난 이후, 호남의 인사들의 출사가 저지되었는지 확인할 바는 없지만, 벼슬아치가 못된 향반에게 할 일이란, 관리들과 친교를 맺고 땅을 넓히고 축재 밖에 달리 할 일이란 없다. 과거를 볼 필요가 없으니 하늘천 따지 학문할 이유없고, 천석이다 만석이다 돈은 지천이니 비단 바지 저고리 만들어 입고 합죽선을 흔들어가며 기방에 들어 네 이년들 풍악을 올려라! 속곳이나 점고하는 것이 다 아니겠는가?

이러다 보니 가장 비옥하고 넓은 경지면적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어느 지방보다 소작비율이 높고, 천석 만석의 갑부가 지천인 곳이 호남이 되었다. 이러다 보니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동학농민운동이 봉기하게 되었고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부수적으로 대만은 일제에 합병되고, 며칠안가 로일전쟁이다 뭐다 하다가 그만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 후 이 땅은 공출미다 뭐다 하며 군산, 목포를 통하여 군량미가 징발되고 수탈을 더해간다.

그러다 보니 늘 이곳은 소수의 힘있는 사람들에 억압당하는 민중들의 봉기로 점철되는 대지가 되었고 자다가 모로 누워도 좌익이요, 빨갱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꺽인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들의 텅빈 밥그릇이었고 삼일 굶은 자식들의 퀭한 눈동자일 뿐이었다.

이 호남이란...

늘 우리에게 끼니를 제공해주었고, 구로동과 청계천에 어린 누이들의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주었으며, 울산과 구미 공업단지에 산업인력을 제공해주었음에도

그들은 늘 가난했고 멸시받았으며, 결국 1980년 5월 18일에는 총부리를 겨누고 저들에게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적도라고 했던 것이다.

주) 倭人不過一二而本國之民假著倭服成黨作亂(세종실록)

20090314 봄


참고> 悲情城市

2009/03/16 13:38에 旅인...face
2009/03/16 13:38 2009/03/1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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