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16 21:01 : 황홀한 밥그릇

황석영씨 이야기

그저께 <하루...및 잡담>에 황석영씨에 대한 짧은 글을 올렸다가 그만 내렸다. 그저께는 그만 우울한 날이 되고 말았다.

나 같은 찌질한 사람은 세상을 굳건하게 딛고 큰 소리도 치지 못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흐리다. 그럼에도 그 굴곡된 시절 속에는 내 가슴을 대신하여 말해주거나 그 시절의 번지수를 밝혀줄 사람은 희소했다. 그들은 늘 감방에 있었거나 연금 상태, 아니면 망명처럼 외국을 떠돌았다.

1974년은 지금 올리고 있는 <녹슨 시절>이 시작하는 해이다. 입시과열을 막겠다는 명목 하에 이른바 고교 입학을 <뺑뺑이>라는 도박판으로 만들고, 무수한 파행 끝에 대한민국 교육을 '이 모양 이 꼬라지'라는 현주소에 이르게 한 단초를 제공한 한 해였지만, 황석영 씨의 중단편 소설집 <객지>가 출간된 기념비적인 해이기도 하다.

그 해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11월인가? 황석영씨의 <객지>를 읽었다. 머리로 쓴 글이 아닌, 몸으로 쓴 글이 어떤 글인지 알게 되었다. 그의 책을 읽으며, 우리가 한치 앞도 안보이는 절망의 23시를 지나고 있으며, 독재라는 폭력 아래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비굴하게 살리라는 것을 간신히 알게 되었다.  그 후로도 우리가 표류하고 있는 시대가 어디쯤인가를 그는 더듬더듬 알려주었다.

내가 보잘 것 없는 나날을 보냈다면, 그는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황석영, 그는 영웅이었고, 우리가 동시대를 살고, 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암울한 시대에 허락된 조그만 기쁨이었다.

(보수 + 진보) / 2 = 중도 ?

좌파는 진보, 혁신 또는 사회주의적 사상이나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를, 우파는 보수, 자본주의적 사상이나 경향을 말한다. 하지만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절대적인 정치적 이념이나 운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보수나 진보나 이데올로기적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하지만 이런 상대적인 면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좌익이니 빨갱이가 되는 나라가 이 나라였다. 해방이 되고, 진보와 좌익이 그토록 철저하게 유린당했음에도 이 나라에는 정작 보수도 우익도 없었다.

문민정부, 참여정부에 들어서면서 보수와 진보의 논의가 출범했고, 새는 한 날개로 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작년은 한나라당이 집권을 한 해다. 홍세화씨는 작년 한해를 보내던 12월 한 칼럼에서 "광신은 그 자체에 열성을 내장하고 있다. 증오도 마찬가지이며 사익 추구가 그 뒤를 따른다. 공익·사회정의·연대·평등에는 열성이 내장되어 있지 않다."고 침중한 목소리로 진보의 좌절에 대해서 말하는 한편, 왜 올드 라이트도 아닌 뉴라이트라는 단어가 횡행하는 가를 묻는다. 작년은 촛불집회도 있었지만, 그동안 가려져 있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어 모호한 보수, 실체없이(자기논리없이) 진보를 질타함으로써 그림자로만 존재했던 수구보수가 하얗게 분칠을 하고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한 해이기도 하다.

작년 한 해동안 내가 본 것은 국민과 진리와 정의 속에 발을 내리지 못한 채, 돈에 굴복하고, 외세에 기대고,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한, 끊임없는 독설, 뻔뻔한 변명, 화려한 수식, 그리고 지독한 고집 속에서 표류하는 정국이었다. 그러한 표류는 그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바닥이 당위의 자리가 아닌, 헛 것인 탓에, 앞으로도 지속되며 멀미에 시달려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럴 즈음에 황석영씨는 엇그제 MB의 중도 실용에 동의를 한다.

진보논객들의 MB정권이 보수를 넘어선 수구 언저리에 있다는 그 성마른 목소리를 접어놓고, 보수의 대척점인 진보가 어디에 둥지를 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진보는 한마디로 한나라당이나 뉴라이트가 진보라고 하면 진보이지, 진보 자신의 목소리로 당당하게 서있는 진보는 보이지 않는다. 진보란 보수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또 다른 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할진데, 보수, 진보 모두 얼굴이 없는 이 나라에서 중도란 도대체 무엇인지 우매한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또 대운하 사업, 영어몰입식 교육, 일제고사, 고교등급제, 값싼 미국 쇠고기라는 실용이 어떤 그늘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쪽 이웃에서 소를 잡다.

엇그제 황석영씨의 기사를 접했을때, 갑자기 주역의 수화기제(水火旣濟) 속의 한 구절이 떠 올랐다.

동쪽 이웃에서 소를 잡는 것은 서쪽 이웃에서 소박한 제사를 지내어 그 복을 받느니만 못하다.(東隣殺牛 不如西隣之禴祭 實受其福)

이 구절은 역사적으로 볼 때, 동쪽(陽剛)의 殷나라의 폭군 紂에게 봉사(殺牛: 큰 제사)하는 것보다, 서쪽(陰柔)의 제후국과 선린(약: 작은 제사)을 기하는 것이 낫다는 뜻일 것이다.

이 글을 우리 사회에 대입해 보면. 東은 九五 양강인 만큼, 권력과 돈이 있는 기득권자. 더 넓게는 미국과 일본 등의 외세를 말할 수 있다. 西는 六二 음유로 비천한 자. 짓눌리고 억울하며, 나날의 밥그릇이 걱정인 자들을 말할 것이다.

그러니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제사를 올려야 하겠는가?

동쪽에 빌붙어 소를 잡고, 때론 양심과 영혼을 팔아야 할 것인가? 서쪽과 친하려면 닭 몇마리면 충분하고, 그것이면 축제가 될 것이며, 행복이리라.

여태까지 서쪽에서 민중의 광대였던 그가, 어쩌자고 이제 소 잡는 칼을 들고 동쪽으로 가겠다는 것인가?

나는 황석영씨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정말 알고 싶다.

20090516에......

2009/05/16 21:01에 旅인...face
2009/05/16 21:01 2009/05/16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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