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17 17:17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그 곳에 간 적이 있다. 하늘이 맑아 낮에도 별이 바라보인다. 떠돌아 잡을 수 없던 말(言)들이 시고 달콤한 향기로 가득하게 열리고, 詩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곳, 산과 산이 눈 앞을 가려도 대륙의 저쪽으로 빛을 안고 흘러가는 강이 보이고, 노을이 언제나 서쪽 해안을 붉게 적시는 곳, 거기를 '거리'라고 했다. 세상은 꿈이라서, 산문은 그 곳에선 시든다. 잘려진 나무가지들을 손으로 갈라 땅바닥 위에 놓으면, 때론 꽃이 피고, 하늘의 별들이 선회했다. 때론 그림이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점(占)이라고 하기도 했고, 끝나지 않는 노래라고도 했다.

그 노래 속에는 보편적 진리란 없다고 한다. 하늘과 대지가 오래되어 까마득하고, 산맥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서 있되, 때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사람들이 모여 산다. 산다는 것은 때론 진실이고, 때론 거짓이지만, 육중하여 다 거리(巨理)라고 현자들은 말한다. 거리에선 다만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사랑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거리의 남쪽, 언덕 위에는 성이 있다. 성의 망루에 올라 하늘을 보면 너무 드높아 차라리 시꺼멓고, 지평선을 바라보면 동서남북으로 사각진 것이 아니라, 둥글었다. 가을이 오면, 신은 광야를 거쳐 태양이 사라지는 곳을 향해 먼지와 긴 그림자를 남기며 순례를 한다고 한다. 신이 지나는 계절에는 사제들이 성의 모서리의 탑으로 올라가 긴 나발을 여장(女墻)에 걸쳐놓고 불었다. 음계가 없는 단조로운 나발소리는 낮고 길게 울었다. 소리는 멀리 퍼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마치 들 저쪽에서 누군가 나발을 부는 것 같았다. 나발소리가 울리는 오후 네시,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들고 기도를 올리던지, 동구 밖으로 나간다. 그들은 이마 위로 손을 올려 햇빛을 가리고 신이 들판을 거니는 모습을 바라본다. 신을 본 사람도 있는지, 해가 진 저자에는 신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신의 모습은 말하는 자들마다 달랐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 이야기로 노래를 지어 부르곤 했다.

사암으로 지어진 성벽에 아침이나 석양의 낮은 햇빛이 날아와 부서진다. 부서진 빛은 발광하며 성 주위를 감돌아 언덕 위는 광휘에 휩쌓였다. 광야의 끝에서 바라보아도 광휘는 뚜렷하여 금빛 구름 같았다. 지평선 서쪽에서 금빛 구름을 본 이방인들은 밤이 되면 거리로 흘러들어왔고, 오전 나절에 거리로 흘러드는 자들은 동쪽에서 빛의 구름을 보았다고 했다. 이방인, 순례자들은 모두 해가 있는 곳에서 거리로 왔다가,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성채는 초원과 광야를 떠도는 지친 순례자들과 이방인들의 이정표였다. 그들은 성벽이 발하는 빛을 따라 와서, 성의 마당을 둘러싼 사각형의 주랑에서 모포와 돗자리를 펴고 머물다 가곤 했다.

때때로 성으로 올라가면, 먼나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의 언어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금붙이 위에 그려진 황홀한 무늬이기도 했고, 알 수 없는 글자로 가득한 책자나, 철컥이는 칼날의 날선 다마스커스 문양이거나, 햇빛을 가리기 위해 머리에 두른 천 사이로 보이는 피로와 허기에 가라앉았으면서도 또 다른 지평선에 미혹된 눈동자이기도 했다. 그들의 눈 속에는 세월과 지나온 풍경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역청의 색깔이 빠진 육중한 나무문과 문루 아래로 난 길다란 아치형의 복도의 벽 곳곳에, 세상의 온갖 문자로 그려진 글들이 쓰여있다. 고향 사람이나 그리운 사람들이 보지 않을까 혹은 광야에서 헤어진 동료에게 남겨논 글들이었다. 알파벳과 아브자드, 알레프벳 그리고 오래된 그림문자들, 심지어는 녹도문자, 가림토라는 것이 결승마저 있었다. 쓰여진 지 천년이 지난 글들 위로 수백년이 지난 글이 덧쓰여지고, 며칠 전 새로 쓴 글씨가 덧새겨졌다. 글들은 대부분 읽혀지지 않은 채 그리움이 된다. 글의 색깔이 희미해지고 잊혀질수록, 아무도 읽을 수 없을 즈음이면, 죽은 글자들은 번지없는 영혼이 되고 소멸되었다. 읽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나온 길에 대한 이야기는 뚜렷했지만, 앞으로 나갈 길에 대한 글자는 주춤거렸고 흐릿했다. 그래서 모든 길은 하늘로 돌아가는 길처럼 아득했다. 세상의 중심이자 끝인 이곳을 사람들은 스쳐지나는 '거리(Strada)'라고 했다.

그늘 아래서 햇볕에 까맣게 그을은 이방인들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담배를 피우는 마당을 지나고, 쪽문을 지나면 사각형의 샘이 있는 팔각형의 정원이 있다. 정원을 향하여 나 있는 일곱개의 문(팔각형의 한면은 이방인들의 마당과 통해 있다)을 통하여 안을 들여다 보면, 천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오래된 책들이 쌓여 있다. 지식이란 어둡고 음산하며 덮덮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는데, 성 안의 누군가가 이방인들로 부터 사들인 책들을 손이 닿지도 않는 높은 곳까지 쌓아올렸다. 하긴 어느 한 문설주에는 "천년동안 쌓아놓은 지식이라도 오늘 하루에 비길 수 없다."라고 빛바랜 그림문자로 쓰여 있다.

정원의 가운데는 가로 세로 오 규빗의 장방형의 구덩이가 파져 있는데, 깊이는 십 큐빗 정도였다. 바닥에는 어둠 가운데 맑은 빛을 발하는 샘이 있다. 그 샘은 마시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하늘을 담기 위한 것으로 밤이면 무수한 별들이 그 샘으로 내려왔다.

별들이 내려오는 시간이 되면, 정원으로 새어드는 모든 빛들은 꺼지고 나이가 수백년은 먹었을 것 같은 노인들이 샘 가로 나온다. 그들은 샘의 수면 위에서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고, 먼동이 터올 무렵 서로 의논하며 오래된 책장을 펼쳐 그 위에 뭔가 쓰곤 했다.

거리의 모든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하다.

나의 나이는 두살이 갓 지났다. 육신의 나이는 오래되었지만,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없다. 한 육십쯤?

이년전 어느 날,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눈을 떴다. 온 생애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잘 자고 난 느낌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지만, 그 아침의 햇살이 생애의 첫 경험이었다. 나의 과거는 하나의 단일한 것으로 통합되었다. 그것은 무(無)였다. 과거가 온통 지워져 버렸다는 것을 알기까지 꽤 시간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불현듯 눈물이 흘렀고, 그 눈물에 떠밀려 온 몸을 떨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통곡하기를 그칠 즈음, 사람들이 들어왔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자 나는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고, 담배를 피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 내가 누구인지 조차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세월이 나를 스쳐지났는지 모르지만, 전혀 모르는 세상의 끝머리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나는 거기에 있었다.

아무런 과거가 없는 사람에겐 미래 또한 가늠할 수 없다. 내 앞에 놓인 지금은 텅비어 있었고, 아무 것도 없는 그 속으로 나의 미래에 대한 공포가 밀려들어왔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를 보며, 사람들이 뭐라고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르는 언어였다. 그 중 한 사람이 나의 얼굴에 깃든 공포를 보자, 다가와 아무 말없이 나를 껴안고 등을 두드렸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나의 볼에 입을 맞추던가, 아이들은 침대 위에 꽃이나 사탕과 같은 것을 올려놓으면서 작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 후 몇개월동안 거리를 배회하거나, 성으로 올라가 멀리서 온 이방인 중에 내가 아는 언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를 묻곤 했다. 그러나 내가 쓰는 말을 아는 자는 없었다. 어느 먼 우주를 날아와 갑자기 이곳 거리에 나는 내동댕이 쳐졌을 지도 모른다.

이집 저집을 떠돌며 밥을 얻어 먹었으며, 밥을 얻어먹은 후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준다거나, 뒷뜰에서 장작을 패거나, 아니면 설겆이를 돕거나 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나를 나티라고 불렀다. 길게 말하면 '우미 카르밤 나티'인데, 그 뜻은 <머리가 텅빈 사람> 혹은 <머리에 바람이 든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티는 비었다, 혹은 바람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이 늘 마음에 든다.

거리에 살면서 더 이상 나의 과거를 기억하고자 않게 되었다.

20090831경에 쓰다가 내팽개친 글

2012/01/17 17:17에 旅인...face
2012/01/17 17:17 2012/01/17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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