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4 19:27 : 무너진 도서관에서

이 글은 2008년 11월에 나의 불교의 한글 번역 방식이 광역이라고 하자 범어 직역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글이 되는 셈이다. 나는 최근 불경의 번역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새로이 불교에 접하는 분들에게 텍스트와 번역본을 선택할 때, 몹시 주의를 기울이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번역의 원본이 되는 텍스트도 중요하고, 텍스트의 해석 또한 중요하여 서양에서는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것이 발전했지만, 우리나라의 불교의 한글번역 사업은 내가 아는 한 그런 방법론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천칠백년의 불교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불교 술어에 대한 사전적 정리가 부재한 상태에서 출범한 관계로 번역의 술어조차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역경사업이 전개된 셈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남지심씨의 우담바라라는 소설 뒷면에 있는 반야심경의 번역을 보게 되었는데, 도무지 그 뜻을 새길 수 없어 이따위 것을 읽느니 차라리 몇 글자 안되는데 내가 번역을 하겠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반야심경 하나를 번역하는데 약 3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기간동안 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동안 불교에 대하여 나름대로 공부한 것들을 재정리해볼 수 있는 시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 반야심경 번역의 방식을 나름대로 광역(기존의 해석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렇게 붙임)이라고 했고, 반야심경의 번역을 바탕으로 화엄일승법계도의 법성게를 번역한 바 있다. 하지만 법성게의 번역 방식은 반야심경처럼 엄밀하기 보다, 현학적인 방식인 득의망상(得意忘象), 이간어번(以簡御繁)의 심법을 사용하였지만 본의와 상통한다고 본다.

특히 대승불교는 경전마다 가르침이 달라, 교상판석을 통하여 오시팔교로 나누는 등 범위도 방대하고 진리에 대한 어프로우치 방식 또한 다르다는 특징을 갖는다. 게다가 논장류로 불교를 공부한다고 해도 본체론의 공관학, 심리적인 측면에서 구사, 유식, 기신론 등을 배우는데 다대한 시간이 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런 분야에 좋은 책을 만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최근 은정희 교수의 대승기신론에 대한 책은 이러한 논장류도 이런 번역을 할 수 있다고 보여주는 좋은 전범을 마련하고 있으나, 어느 정도 불교에 대한 기초소양이 없으면 읽기에는 난해한 점이 있다.

그래서 입문서로 추천한다면, 야스퍼스의 불교관과 같은 책이 좋다고 보여진다.


○○○님의 질문 <힌두에서 떨어져 나온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갈 때는 산스크리트어로 가서 중국어로 번역 되었고 우리는 중국의 1차 번역인 한문 불경을 2차로 중역을 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또한 모든 불경은 여시아문 즉 내가 들었다로 시작되는데 석가 당시에 제자의 느낌과 이후 몇 천 년의 세월에서 번역, 중역, 삼역으로 내려 오면서의 오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광역을 논하실 정도라면 직접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습득 번역을 해보심은 어떠하실지요?>에 대하여

1. 텍스트의 문제

원시불교의 경전 중 최고(最古)의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경전 성립시기를 보면 BC3세기, 근본불교(석가의 교화의 진면목에 접하고자 하는 신념에서 불교의 뿌리가 되는 釋尊直說의 가르침을 지칭)운동의 소의경전인 阿含經의 경우에서 볼 때, 결집에 의한 문서가 아닌 Agama(전승: 아함으로 음역됨)을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이며, 초기경전임에도 경으로 부집된 것이 BC1세기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대승경전의 경우는 모두 세존의 설하신 바가 아닌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반야부의 경우 대품반야계열의 경전들이 BC100~AD100년경에 출현했고, 반야심경등의 경우는 중관학파가 성립된 이후인 AD350년경에 지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경전의 개경귀인 여시아문은 불교경전 자체가 그 뿌리를 세존에게 돌릴 수 없는 한참 후대에 지어진 것인 바, 경전의 권위를 높히기 위하여 부처와 함께 했던 아난다(경)와 우팔리(율)가 마하가섭(승인자)에게 <이와같이 저는 들었습니다>라는 식으로 가르침의 실존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4차에 걸쳐 있었다는 결집은 경전결집보다 오히려 세계불교대회의 성격이 짙었다고 보여지며, 당시 세존의 말씀은 인도인들의 특성 상 구전되어갔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아함경의 이름이 전승(Agama)이라고 불리워졌다고 보여집니다.

까닭에 원전으로 소급하여도 세존 당시의 원음이 아니라는 점은 하나의 숙제로 남습니다.

2. 한역(1차 번역)의 문제

(팔리어직역 : 이와같이 나에 의하여 들려졌습니다) → 如是我聞(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반야심경의 광역을 할 때, 小本係 당 현장역 반야심경, 구마라습역을 참고했으며, 범본도 구해보았으며, 大本 심경계의 역본과 범본 또한 대조 참고하였습니다. 결과 다른 경문의 경우 나습역이 원전에 가장 근접한다는 중평이었지만, 심경은 원본에 문제가 있었는지 일부 구절에서 번역 상 문제를 볼 수 있었지만, 현장역은 해석이 너무도 완벽하여 현장역을 통해 중역하여도, 범본의 직역과 대차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반야심경 한역에 있어 가장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는 색즉시공의 경우를 보면,

rupan na prthak sunyata, sunyataya na prthag rupam. yad rupam sa sunyata, ya sunyata tad rupam

공성은 모양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고, 모양이 있는 것은 공성과 다르지 않다. 모양이 있는 것 그것이 공성이며, 공성인 것 그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다.(= 不異色 色不異, 色卽是 卽是色 : 현장역 色不異 不異色, 色卽是 卽是色)

여기에서 rupa(모양)를 形이라고 하지 않고 色이라고 했느냐는 뉘앙스적인 문제는 남습니다만, 본체계의 숨겨짐에 반한 현상계의 드러남을 형으로 할 것인가 색으로 할 것인가는 역자의 선택의 문제이며, 나습역에서도 rupa는 色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는 색성향미촉법의 용어가 통일된 탓에 색으로 고착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광역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바로 (sunyata 혹은 sunya)의 문제였습니다.

나가르주나는 "공성은 모든 그릇된 견해를 쓸어버린다고 붇다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見에 빠진 자는 치료하기 어렵다고 말한다."라고 공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공견이란 <없다, 비었다>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심경에서 말하는 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으로 광역을 전개했습니다.

3. 한글역(重譯)의 문제

우리나라의 한글 성서를 보면, KJV(The King James Version), NASV(The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IV(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등의 영어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라틴어로 된 초기 불가타본이나, 그리스어 헬라어본은 필요에 따라 주석처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상기의 버전들은 비록 초기의 텍스트와 다른 언어로 쓰여져 있긴 하지만, 번역의 엄밀성과 누적된 연구의 결과로 텍스트에 대한 신뢰성, 교리와의 일치성 등에 있어서 전세계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경의 경우도 중국 당나라에 와서 과거 격의불교(범어의 술어를 노장의 단어로 대치 : 그 결과 공과 무 등이 중국불교에 많이 쓰임)에서 탈피하여 논장류의 연구가 본격화되고, 교학을 바탕으로 불경 번역의 정밀성을 높히고, 교세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산문의 작업의 결과가 재가(속세)에 흘러들고, 재가거사들의 불교에 대한 지식은 다시 산문을 흥성케 했습니다. 그리하여 소본 반야심경만 해도 6종의 번역서가 존재하며, 그 번역서 중 텍스트가치를 따져 각자 취사를 하게 되며, 현장역을 가장 중시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불경 또한 현대의 성서와 같은 시스템으로 활용한다면, 연구와 해석에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증식시킬 수 있습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에 수록된 불경의 경우, 중국에서도 가장 엄선된 텍스트를 추려서 경판이 만들어졌으며, 과거 인쇄술이 없어 사경작업 상 발생하던 脫誤字 문제를 교정하여 가장 엄밀한 판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의 한글화 사업에 있어서 큰 문제였던 것은 과거 한문에 토씨나 다는 현토 수준의 번역을 벗어나지 못한 작업이었다는 것입니다.

한번 화엄일승법계도에 실린 글을 아무 곳에서 골라 하나 올려봅니다.

<문: 위에서 말한 증분(證分)의 법과 연기분(緣起分)의 법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 차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무슨 뜻이냐 하면, 증분의 법은 실상으로 줄여 설한 것으로 오직 증(證)하여 알게 된 것이기 때문이요. 연기분의 법은 뭇 연(緣)으로 부터 생긴 것으로 자성이 없다. 본(本)과 다르지가 않다. 그러므로 차별이 없다.> [삼성세계사상 11 한국의 불교사상 1993년 판 300쪽]

이것을 알아듣겠습니까? 불법이 너무 어려워서 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 글은 철학박사이며, 당시 동국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장이라는 이기영 박사가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을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번역이 아니라, 똥 싸다가 만 것입니다. 저는 이런 개떡같은 글을 몇년이나 읽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조속히 개선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위의 화엄일승법계도의 글은 약 천삼백삼사십년전에 쓰여진 논문인 만큼, 개념과 술어가 명확해야 하며, 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해소해나가야 하는 것이 번역자가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 해야 하는 선행작업임에도 전혀 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글역의 문제는 원본의 텍스트나 중역의 문제가 아니라, 위와 같은 번역의 문제입니다.

4. 광역의 문제

팔만대장경의 한글화 아니 대중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며, 계속 수정 보완되어야 합니다. 또한 범본(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 경전의 번역도 계속되어야 할 작업입니다. 그리고 불교용어의 현대화 작업도 시급히 서둘러야 할 작업 중 하나입니다.

제가 하는 광역은 이러한 작업과는 다릅니다. 저는 학자도 번역자도 아닙니다. 또한 불자도 아닙니다. 단지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아마추어입니다. 그래서 저는 재야사학자가 강단사학자에 대하여 엄밀하지는 않지만, 역사에 해석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듯, 불교 텍스트의 번역도 이렇게 할 수도 있다라는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 뿐 입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이 하나의 돌맹이가 되어 파문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한문도 간신히 해석하고 있는 수준이라, 산스크리트어 등 범어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은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역은 저만 할 수 있는 독특한 것이 아니며, 불교에 대해서만 아니라, 고전, 기독교 등의 모든 것에 걸쳐 자신의 관심을 표명해 나가는 그런 작업들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이류 올림


참고> 광역 관련 포스트

반야심경 : 경문과 번역, 지혜에 대한 말씀, 프라즈나파라미타의 노래의 미주, 나의 사견

법성게 : 법계도-1, 법계도-2, 법계도-3, 종합(화엄일승법계도)

* 법성게의 경우, 賦의 序辭로 부치기 위하여 광역한 것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함.

20090914

2009/09/14 19:27에 旅인...face
2009/09/14 19:27 2009/09/14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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