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29 12:51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우리는 아주 오래 함께 살았다. 스무 몇 해를 함께 산 아내보다, 일년 반 동안 우리는 더 오래, 아주 닳아버리도록 함께 살았다. 우리가 함께 보낸 하루하루들은 더듬더듬 와서, 문득 가버렸다.

“벌써 밤이에요.”
“그래 밤이군.”

우리가 그토록 오래 살았음에도 간혹 밤중에 일어나 나의 가슴을 더듬어보고, 아잉은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왜? 내가 도망갔을까 봐?”
“네, 가끔은 아저씨가 없어졌을까 무서워요.”하고 허리로 파고 들었다.

봄과 가을이면 강 하구로 날아온 도요새 떼가 만까지 내려와 선회를 하고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때론 알지 못할 철새들이 건너편 해안에 몰렸다가 먼지처럼 날아가기도 했다.

새떼들이 나는 날들은 석양이 더 붉고, 바다 위에 걸쳐진 구름은 길었다. 계절이 바뀌는 지 바람의 방향은 바뀌고, 갈매기들은 바삐 날았다.

아잉을 데리고 읍내로 나가 사진을 찍었다. 아잉은 함께 찍자고 했지만, 여권사진은 함께 찍을 수가 없다. 그녀에게 머리가 하얗게 세서 아버지처럼 보인다며 싫다고 했다.

오십이 되도록 세치 하나 없던 머리는 일년 사이에 그만 반백이 되었고, 십년은 젊어보이던 얼굴은 중년을 지나 초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사진을 찍은 그녀를 데리고 인감을 내기 위하여 읍사무소로 갔다. 처음 본 그녀의 주민등록증에는 흐릿해진 소녀의 사진 밑에 <정란애>라고 쓰여 있었다.

<정란애>란 이름을 얻은 후, 그녀의 십년은 외로움과 가난 그리고 모욕과 학대로 꽉 찬 것이었다. <부 란 아잉>으로 그녀를 돌려놓고 싶다. 빈롱 거리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친구와 함께 하얀 아오자이 차림으로 야자수 밑에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놓고 웃는 그녀의 사진 한 장만 얻고 싶을 뿐이다. 그것을 위해서 나는 뭐라도 지불할 용의가 있다. 외로움도 좋고, 가난도 좋다.

비싸다고 징징거리는 아잉을 끌고 제과점에 들어갔다.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시킨 후,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읍의 한쪽 구석에 있는 시계방에 들어가 서울에서 내려올 때 차고 있었던 시계를 풀었다. 육백만원짜리 명품시계를 주인은 한참을 들여다 본 후, 요즘 디자인이 아니다, 보증서가 없다 하며, 삼십만원을 불렀다. 나는 오십을 불렀고, 삼십팔만원에 낙찰을 보았다. 결혼하는 딸아이의 예물로 써야겠다며, 케이스가 있다면 좋을텐데... 그는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시계는 아내가 이년이 넘도록 계를 들어 사 준 시계였다.

제과점에서 돈을 지불하자, 어디에서 돈이 생겼냐고 아잉이 자꾸 물었다. 시계를 팔았다고 했다.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시계는 돈이 없을 때 팔려고 산 시계야. 가지고 있어서 뭐하려고.”

가지 않겠다는 아잉을 끌고 시장으로 가서 옷을 샀다. 시장의 양품을 취급하는 상점 앞에서 아잉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안 입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와서 바꿔야 한다. 바꿔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무조건 사줄 거다. 안 입어본다는 것을 바보같은 짓이다 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잉은 나의 눈치를 살펴가며 놓았다 집었다 하며, 바지와 셔츠를 골랐다. 한번도 물건을 흥정을 해본 적 없던 나는, 깎고 깎아 육만원을 주었다. 옷값을 계산하고 나니 호주머니가 홀쭉해진 것 같았다.

아잉은 집에 가는 내내 새 옷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가끔 쇼핑백의 아가리를 열고 그 사이에 옷이 달아나지나 않았나 몇 번인가 들여다 보고, 수줍게 몰래몰래 웃었다. 집에 다가오자, “아저씨 옷도 사야 되는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혼자 가서 사겠다고 말했다.

창 밖의 무심한 풍경을 보았다. 무심한 풍경이 좋았다. 풍경에 마음이 있다면 눈을 감아야 할지도 몰랐다. 단 한 사람의 가슴을 알아도 이토록 가슴이 아린데, 저 넓은 세상이 지닌 풍경의 마음을 어떻게 읽을 것이며, 어떻게 감내할 것인가? 풍경은 오히려 무심하여, 산을 키우고 강을 내서 유정한 것들의 마음을 품고, 우리를 기어코 살게 했다.

며칠 후 읍내로 나가 아잉의 여권사진을 받아왔다. 사진 속의 여자는 웃고 있었지만, 굳어있었다. 그 중 두장을 꺼내 하나는 빈 지갑에 갈무리하고, 하나는 집의 어디엔가 놓아둘 요량으로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다시 호주머니의 사진을 꺼냈다. 아잉은 웃고 있었지만, ‘아저씨는 저 없이 어떻게 살려고요?’하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아잉은 아직 자신을 고향으로 보내려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2007/06/29 12:51에 旅인...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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