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16 18:01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1. 夢中文

5갑자를 꿈에서 보내고 아침으로 돌아오다 잃어버린 부묵(副墨)을 제작하기 위하여, 마른 날들의 뚜껑을 열어 두 숟가락을 덜어놓고 지나가던 망상을 두방울 섞은 다음, 죽은 쥐가 갉아먹은 시간의 조각(26시 64분: 태어나지조차 않은 것들의 옆을 스쳐가는 시간이다)을 태워 흠향하고 탁자를 치운다. 마분지를 내려놓으면, 사유(思維)라는 것이 두둥실 떠오르는데... 97.2% 정도는 무용하다.

가진 지식이란 유해하고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쓸데없으며, 나의 실존은 있으나 마나이고 사는 방식은 가는 데까지 가보는 것이다.

몽중에 밥을 먹고 떼돈을 벌어도 깨어나면 무효하다. 그러니 꿈에서 얻은 궁극의 지혜를 간직한 문자 또한 세상의 빛을 받으면 우스개요 지랄이라 그 놈이 꿈과 아침의 무간(無間)에 찔러놓았으리라. 꿈의 일이 세사에 관여할 일은 아닐진데, 말짱한 정신으로 꿈을 조합한들 무슨 효험이 있을건가? 비몽간(非夢間)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행위야말로 무용한만큼 우둔이다.

없음이 무극(无極)의 가생이로 놀러가 무시(无始)를 흔들어 깨운 탓에 문득 어미의 태 중에 들어 천지사방을 만나 인두껍을 뒤집어 썼으니 본시 내 고향은 태허다. 하여 허무가 하품을 하여 지수화풍, 사대육신을 만들었고, 이 놈의 정신이란 본시 공()이다. 바퀴벌레나 천지가 동류임은 물론 육신없이 떠도는 것들, 귀신이나 거짓부렁이나 진실이라는 것이나 가상공간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 곳이 태충(太沖)이고 無가 만연(曼衍)한 것이니 너나 나는 본시 헛 것이라. 세상이나 꿈 속 한 자락에 보광(葆光)이 있다 한들, 헛 것에 뿌리를 내리고 울고 불고 할 수 있으랴?

왜 사는 지 모른 채 사는 데까지 살고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 산 것이고 숙명이다.

나의 우둔함을 방 한쪽 구석에 몰아놓고 대신할 즐거운 일이나 해야할 일을 찾지 못한다. 24시간이란 늘 넘치는 분량이겠으나 때로 태어나지 않은 것들의 곁을 지나는 시간마저 산다. 중력을 상실한 시간은 겹치고 구겨지며, 사물은 껍데기를 잃은 채 창새기가 보일 정도로 투명해져 여기에서 쩌어기 지각을 뚫고 대양을 바라볼 수 있고 미리내 저 편까지 보이는 데, 저 놈의 풍경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음율로 이루어졌는데, 음부는 현명(玄冥)하여 검은 가운데 누런 빛이었다. 때로 가위가 검은 실끄댕이를 풀어 낄낄거리고, 골목에서는 쥐들이 역적모의를 위하여 수채구멍으로 걸어들어가고, 피묻은 몽땅 빗자루가 골목을 지나 전봇대에 오줌을 누며 욕설을 한다. 아무튼 그 놈의 음악이 죽일 놈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뭐라 하면 좋을까? 꿈의 기억을 만들기 위하여, 아득한 태고에 무당과 유목민이 썼을 지도 모르는 부호를 모아 거기에 인디언이나 피웠을 담배연기와 뒤섞는다. 분명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은 아니다. 그 탓에 산세베리아는 열어논 문 틈으로 스며든 찬바람을 못견뎌 동사해버렸다. 문자가 생기기 이전, 땅바닥에 그려졌을 점과 작대기와 동그라미. 이것들로 꿈의 문자를 만든다. 미친 짓이다. 사람은 때때로 미친다. 산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다. 하지만 이를 능멸하거나, 침뱉어서는 안된다. 그러잖아도 생의 치욕에 잇빨을 갈고 울부짖는데 너희의 삶은 그리 떳떳하고 찬란하더냐?

20100116

2010/01/16 18:01에 旅인...face
2010/01/16 18:01 2010/01/1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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