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02 15:51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동생과 나는 생일이 일주일 벌어지는 세살 차이다. 하지만 싱가포르 상해 등지로 전전하다보니 일년에 한두번 만나는 동생은 형인 나보다 늙어보인다. 나는 머리숱이 많고 세치도 없는데다 얼굴도 팽팽한 데, 동생은 머리의 한쪽이 슬슬 빠지기 사작했고 얼굴에 주름이 많이 갔다. 동생의 나이든 얼굴을 보면 동생의 착한 마음을 세월이라는 것이 할퀴고 간 흔적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동생은 나에게만 화를 내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부러워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형이 자신처럼 틀에 맞춰 살지 않고 개판 오분전이거나, 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은 구석이 있다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취직을 하고 얼마 안된 때였다. 같은 방을 쓰고 있던 동생은, 아니 그것보다 동생 방에 내가 얹혀 살고 있었다. 저녁 후에 동생은 책을 읽고 있었다. 무슨 책을 읽는지 몰라도 동생은 며칠동안 그 책을 보면서 킬킬거리거나 때론 아주 큰소리로 웃거나 했다.

"너 미쳤냐?"

놈은 그것이 아니야 하곤 다시 정색을 하고 책을 읽었다.

책의 표지를 보니 신예작가인지 이외수라는 요상망칙한 이름의 작자가 쓴 '장수하늘소'인가를 읽고 있었다.

"재밌냐?"
"응, 주인공이 아주 독특한 사람이야."
"어떤 사람인데...?"
"꼭 형같은 사람이라고 할까?"
"그럼 또라이?"
"맞아! 그런데 형은 자신이 또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
"그냥!"

우리는 그 날 간만에 형제 간에 긴 이야기를 했고, 동생이 나를 단순히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동생의 단정한 세계를 부러워하는 만큼, 동생도 나의 독특한 세계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간신히 알았다.

하지만 그 후 이외수의 소설을 읽고 내가 알아낸 것은 내가 이외수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그들보다 더 초현세적인 면이 있기도 하지만, 동생이 알고 있는 것보다, 나는 집요하고 훨씬 견고한 세계 속에 자신을 가둬두고 살고 있다.

아무튼 나의 기억은 오래 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1961년 10월부터 나의 기억은 시작한다. 그러니까 딱 만 세살부터이다.

기억이 시작하는 달까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 해 그 달, 동생이 태어났다. 하지만 너무 어린 관계로 기억들은 포말과 같이 나타났다가 망각의 어둠 속으로 접혀들곤 한다.

기억이 계기적 질서를 갖고 지속되고 통합되는 싯점은 다섯살이나 여섯살때 부터인 것 같다.

그 싯점에 할머니가 계시는 두메산골 함양에 갔고, 할머니에게 미운털이 박힌 관계로 얼마 있지도 못하고 서울로 쫓겨난 시기이기도 하다.

나의 기억은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기억의 파편들을 지속적으로 연결짓고 검증해나가는 절차들을 반복해나갔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엄마! 우리가 십계를 본 곳이 명보극장의 이층 난간 자리가 아닌가요?"

어머니는 한동안 기억을 더듬다가 "그걸 어떻게 아니?"라고 물은 뒤, "명보극장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난간자리인 것은 모르겠다."

찰톤 헤스톤이 나오는 이 영화의 개봉일은 네이버에 1973.6.16일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1956년에 미국에서 초영된 이 영화는 1962년~1964년 사이에 분명히 국내에 들어와 초연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 내용을 기억할 수 없지만, 바다가 갈라진 후 이집트 병사들이 바닷물 속에 휘말리는 장면을 보았고, 나는 이층 난간의 원통형 신쭈(황동)가름대 위에 볼을 대고 그 시원한 감촉을 즐겼던 기억이 뚜렷하다.

우리 식구가 서울로 이사와 처음으로 산 곳은 사근동이다. 기억을 더듬으면 한양대 언덕 뒷편에 있던 집에서는 중량천이 가까웠다. 까닭에 개구리가 많았고 때론 두꺼비도 골목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세살배기가 어떻게 개구리를 잡았는지 몰라도 마당의 모래밭에서 개구리를 뒹굴리거나 밀짚을 개구리의 똥구멍(그것이 똥구멍인지조차 모르겠다)에 밀어넣고 바람을 분다거나 하는 가혹행위를 자주한 것 같다. 어린 나는 동네 어귀의 세탁소에 가서 다림판 밑으로 기어들어가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다리를 몰래보거나 세탁소의 한쪽 구석에 앉아 손님들과 주인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지금도 그 세탁소 속에 감돌던 냄새와 집에서 세탁소에 이르는 길(어려서인지 몰라도 골목이라기에는 너무 넓었다)을 부분적으로는 기억할 수 있다.

기억은 장롱 밑의 뭔가를 보다가 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일지도 모르는 기억도 있다. 신발장을 올라가다가 벌에 쏘여 떨어져 울었던 일, 제 깐에는 높은 장독대에 올라가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엄마~ 나 봐요"하고 소리치던 기억들이 있지만, 장롱 밑을 보다가 울었다는 것이 최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기억 이전은 깜깜하고 막연하다는 것이다.

빛이 가득한 방 안에 누워서 어두운 장롱 밑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그것이 <나>라는 것, 장롱 밑의 먼지에 뒤섞여있는 어둠이 무섭다거나, 장롱 밑으로 뭔가 굴러들어갔는데 손으로 잡을 수 없어서 신경질이 났기 때문에 운 것은 아니다. 외롭다기보다 심심한 것 같은 약간 미식거림이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데, 도무지 그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득한 망각의 시간을 헤치고 나와 그만 울었던 것이다.

그 막연한 오열의 정체는 엄마의 부재로 부터 비롯한 것이었다.

그 기억은 포말이 꺼지듯 사라지고 태고와 같은 망각을 지난 어느 날, 누군가 나를 불러 깨웠다.

"엄마가 온단다. 동생 마중가야지?" 아마 아버지였을 것이다.

어두운 골목길로 나가 엄마가 가슴에 커다란 것을 안고 오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안고 있었던 것은 바로 동생이었다.

그 후 나의 기억은 사라지고, 포말과 같이 단편적인 기억 만 간헐적으로 날 뿐이다.

우리 식구가 서울의 까마득한 변두리에 살게 된 것은, 왕십리에 전차 종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셨다. 불현듯 서울행 열차를 탔고 서울시 임용고시를 보셨다. 아버지는 그 시험에서 수석을 했고, 서울의 삼대공립이라는 수송국민학교의 선생이 되셨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일학년이던 누나와 함께 전차를 타고 하염없이 먼 광화문까지 출퇴근을 했다. 그 후 누나의 학년이 올라가고 아버지께서도 출퇴근시간이 너무 길어서인지 학교 근처인 적선동으로 셋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적선동에 살 때, 나를 세번이나 잃어버리고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개량한옥집의 문칸쪽에서 살았다는 것만 기억난다.

기억이 없는 것은 이 시기에 할머니와 함께 지내던 형이 서울로 돌아왔고, 좁아터진 방에서 형과 동생이 쌈박질이나 하는 것을 보지 못한 어머니가 삼촌편에 나를 할머니 곁으로 보냈다.

좌우지간 몇개월을 나와 함께 산 할머니는 "천하에 저 숭악헌 놈하곤 다시는 못살것다."며 고향으로 내려온 삼촌편에 달려 다시 나를 서울로 돌려보낸다.

서울로 돌아왔을때 지금은 늙어죽었지만, 천연기념물인 백송나무가 동네의 절반을 넘도록 가지를 크게 벌리고 있는 통의동으로 이사를 했다. 골목 사이로 인왕산이 보였다.

이곳에서 학교들어가기 전인 6살에서 중학교 1학년 1학기까지 살았다.

20100202

2010/02/02 15:51에 旅인...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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