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10 12:56 : 걸상 위의 녹슨 공책

어린 시절의 동생에 대하여 말하기란 아득하다. 동생이라기엔 애틋하여 강아지같기도 했고, 동생의 눈물 저쪽에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동생은 왜 그렇게 착했는지 알 수 없다.

동생이 아끼고 쓰다듬어 주어야 할 강아지같아서인지 몰라도, 태어나 집으로 돌아온 날 이후로 동생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어느 날 대형사고가 터지면서 동생은 뚜렷하게 기억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우리집에는 방이 4개였는데, 방 둘은 다다미와 냉골이라 거의 쓰지 않고 삼촌들이 오거나 하면 쓰곤 했다. 안방과 건너방은 다다미를 걷어내고 온돌을 깔았다. 건너방의 옆에 부엌이 있었고, 부엌으로 통하는 문 옆에 난방 겸 취사용으로 아궁이가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동네 친구와 함께 부엌에서 놀고 있았다. 문 옆 아궁이에는 물을 올려놓았는데, 김도 나지 않을 정도로 물은 뜨겁게 데워져 있었다. 동생은 부엌에서 나는 인기척 때문인지 문을 통해 기어 나오다가 굴렀고 그만 다리가 솥에 빠졌다.

동생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하얗게 질렸고, 나는 어떻게 할 지를 몰랐다.

"엄마아~ 엄마아~ 큰일 났어요!"

어머니가 뛰어와 동생을 솥에서 건져내 방에 눕혔을 때, 화학섬유로 된 바지는 녹아 살과 함께 뒤섞여 있었고 동생은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동생의 다리를 본 어머니의 눈에서 파란 불빛이 번쩍하더니 이불에 동생을 뚤뚤 말아 아무 소리도 않고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골목 밖으로 나가 어머니와 동생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어머니는 날이 저물 즈음에 찬 냄새를 뚝뚝 흘리며 들어와 동생을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한동안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린 후, 상자를 찾아 커다란 봉지에서 꺼낸 붕대와 꺼즈, 습포제 등을 정리했다.

동생의 한쪽 다리는 습포제로 둘러싸여 있었고 붕대 사이로는 숩포제에서 새어나온 기름과 같은 것으로 범벅이었다.

병원에 가서 바지를 가위로 잘라내고 들여다 본 동생의 다리는 엉덩이 밑에서 복사뼈까지 살이 녹아내렸다고 한다. 의사는 녹아내린 살을 잘라내지 않으면 허벅지와 장딴지의 살들이 엉겨붙어 결국 무릎을 못쓸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의 살을 잘라낼 수는 없다고 버팅겼다. 어머니는 아들의 살이 붙지않고 아물도록 손을 써본 뒤 안되면 그때가서 살을 잘라내든지 하자고 했다.

의사는 상처가 아물지 않고 원상회복이 되도록 계속 습포를 해야 한다. 조금만 잘못해도 살은 굳고 서로 엉겨붙울 것인데, 그것은 병원에 입원시키고 간호원이 달라붙어 몇달을 해도 안될 일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간호원이 한번 갈아붙인다면 그동안 자신은 두번, 세번이라도 하겠다며 화상에 대한 사후처치 요령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 후 어머니는 동생을 눕혀놓고 하루에도 몇번이고 습포를 대고 거즈를 갈았다. 날이 지나면서 살 속에 박혀있던 섬유조각들이 빠지고 동생의 살들이 굳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살이 굳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식구들이 그만 두라고 해도 개의치 않고 습포제를 갈았고, 기도를 했다.

어머니의 노력 탓인지 늘어났던 살이 점차 자리를 잡고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살들 사이로 땀구멍이 날 즈음에도 어머니는 약을 바르고 거즈를 갈았다. 아버지와 누나가 그런다고 새 살이 돋겠느냐고 해도 어머니는 집요하게 거즈를 갈았다.

일년이 넘도록 거즈를 갈은 후 어머니는 어느 날,

"더 이상은 자라나면서 지워질거다. 여기까지가 애미가 한 것이고 그 다음은 하느님께서 해 주실 일이다."며 거즈 갈기를 멈췄다.

동생의 다리의 늘어졌던 살은 다 아물고 곰보빵의 껍데기같은 붉은 흉터 자국만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하게 허벅지와 종아리 옆에 남았다.

그 화상자국도 해가 가면 점차 줄어들어,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반바지를 입어도 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지금은 동생의 허벅지에 엄지손가락만한 자국이 점처럼 남아있다.

어렸을 때, 우리는 간혹 동생의 다리의 흉터의 길이를 자로 대고 재곤 했다.

"엄마 이제 사쎈치로 줄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어머니의 사랑의 힘을 확인하곤 했다.

우리 형제가 확인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생은 약골로 태어나 눈물구멍이 막힌 채 태어났다. 그것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뚫었다.

막힌 눈물구멍을 뚫어서 그런지, 어린 동생은 걸핏하면 울었다. 우리는 동생을 기어코 놀리고 우는 동생을 달래주기를 좋아했다. 우는 동생을 안아주면 동생은 울기를 멈추고 품 안에서 새큰새큰 잠이 들거나 언제 그랬냐는듯 웃곤 했다.

동생은 거의 반벙어리였다. 네살이 되어도 아버지를 '따~'라고 불렀고 자기 딴에는 뭐라고 중얼거리곤 했는데, 우리는 알 수 없었다. 동생이 뭐라고 하면 거꾸로 '밖에 나가고 싶다고?"하고 물었고,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면 동생은 또 울었다.

그러면 우리는 동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고민을 했고, 때로는 울든 말든 나 몰라라 했다.

그래서 어린 동생의 눈 가에는 늘 눈물자욱이 마르지 않았다.

동생이 말이 안되었던 것은 혀뿌리가 보통사람보다 짧아 그렇다고 했다. 의사는 혀뿌리를 조금 절개하면 발음이 제대로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는 의사 앞에서 동생에게 입벌려봐 하고 몇번이 혀 밑을 들여다 본 끝에 그냥 동생을 데리고 왔다.

"왜 자르지 않고요?" 하고 묻는 우리에게, "네 새끼라면 함부로 자르겠니? 나는 가슴이 아파 못한다. 두고 봐라 내가 저 녀석을 반듯한 사람 만들거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어머니의 눈에서 우리는 결기에 서린 눈빛을 보았던 것 같다.

당시에 우리집에는 사람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동생이고 하나는 나였던 셈이다.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이롱 엄마다.

당신께서 세상에서 제일하기 싫은 것이 자식들 도시락 싸는 것이며, 밥하는 것은 물론 살림일체가 다 고통이라는 그런 분이셨다. 게다가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음식은 나와는 상극이었다. 어머니는 떡과 같은 진밥을 즐겼고 나는 꼬두밥을 고집했다. 나는 늘 밥그릇을 뚜껑을 열고 "또 떡이잖아?"라고 말했다. 진밥보다 수제비의 밀가루 냄새는 더 싫었다. 밀가루 냄새보다 더 싫은 것은 (어머니가 귀찮아서 멸치를 건져내지 않은 탓에) 다싯물에 불어서 꽁치만해진 멸치 시체가 그릇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멸치시체를 건져내 밥상 위에 늘어놓았지만, 여지없이 그 놈의 멸치는 건데기 사이에 숨어있다가 내 입 속으로 기어들어와 소중한 나의 밥맛을 잡쳐버리곤 했다.

"제발, 엄마! 멸치가 죽은 것을 안보게 해줘요."
"칼슘이다. 아이가 자라는데 다 좋다. 잔말말고 먹어라. 싫으면 니가 건져내고..."
"에이씨 안먹어 밥줘!"

이렇게 투정을 부린 끝에, 남들은 다 수제비나 국수를 먹고 있는데, 나만 한쪽 구석에서 간장 종지와 김치를 놓고 밥을 먹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밥상에서도 늘 외로웠다.

그런 나의 고집스러운 꼬라지를 보시며, "꼭 저 놈 때문에 밥을 두번 차리게 된다."라는 말까지 얻어들으면서 말이다.

하여튼 어머니께서는 몹시 사교적이어서 동창회라면 자식들이 한번 쯤 굶는 것도 인생살이에 도움이 된다면서 뛰어가셨고, 식구들을 집에 홀랑 남겨놓은 채, 친구들과 함께 명산대찰은 물론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에 쌍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제주도까지 놀러갔다.

어머니에게는 늘 잔치와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수시로 우리 집에 들락거렸고, 친척들도 뭔일이 있으면 아이고 누님이요, 형수님이요 하며 우리집으로 왔다. 고교동창회 간사 자리는 도맡아했고, 교회에서는 집사, 하여튼 무지하게 바빴고 결론은 집에서는 불량한 주부였다.

"엄마 어디 가셨니?"
"몰라요. 혹시 돈 만들러 가셨는지도 모르죠."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찾는 사람들에게 삐약삐약 그렇게 말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우리 집은 몹시 가난했다. 그렇다고 그 후에 잘살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머니는 늘 돈이나 끼니 때문에 걱정을 했다.

"엄마, 어디가세요?"
"느그들 멕이려고 돈 만들러 간다."하며 바깥으로 나서곤 했다.

우리는 어머니가 돈을 빌리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 날 저녁 만이라도 우리의 밥상을 풍성해졌고, 봉지쌀이 쌀독에 부어지는 그 뿌듯함을 알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없던 그 시절, 아버지가 번듯한 선생이면서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것은 군부정권 집권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지방 소학교 출신의 사범학교 합격생이다. 아버지께서 전주사범을 합격하자 진도의 학교에선 현수막이 걸리고 빵빠레가 울리고, 섬마을 사람들이 학교로 몰려왔고 어험! 진도도민 여러분, 반도의 도서지방 최초로 아무개가 어쩌고 저쩌고 했다는 것이다.

해방되던 해에 아버지는 선생이 되셨다. 6.25 때는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학교와 교실을 정부와 군에서 접수한 탓에 산능성이에 천막을 치고 아이들을 가르쳤기에 당시 LIFE지에 푸른교실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백두산 호랑이'이라는 사람이 부산지역의 징집관이었다.

"너 직업이 뭐야?"
"학교 선생입니다."
"그럼 애들을 가르쳐야지. 징집면제!"

그 말을 듣는 순간, 사관학교를 가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서 사범학교를 간 아버지는 한편으로 다행이고 합편으론 섭섭했다고 한다.

여하튼 어찌저찌하여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와 임용고시를 거쳐 수송국민학교에 교편을 잡았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시가 있었다. 입시의 열기에 편승하여 선생들은 방과 후에 과외를 하여 쥐꼬리만한 월급 외에 벌이를 하곤 했다. 서울 삼대공립학교의 선생님이라는 것과 임용고시 수석을 했다는 입소문 등이 가세하여, 아버지의 과외벌이는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국가최고재건회의에 있었던 큰외삼촌이 하루는 아버지를 불러냈다.

"조만간에 서울 시내의 선생님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을 것이다. 자네도 손을 써놔야 될 것 같네. 생각이 있다면 내가 연줄을 알아보겠네."

당시 덕수국민학교를 중심으로 삼대공립학교에는 자유당 때부터 정부고관대작이나 갑부집 자제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사친회다 뭐다 학교 내에 치맛바람이 거칠게 불었고, 또 선생들도 연줄이나 돈을 써서 이들 공립학교의 선생이 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군사정권은 학원 내에 건전한 교육풍토를 진작시킨다는 명분 하에 물갈이를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큰외삼촌의 말을 듣자,

"형님, 나는 떳떳하게 임용고시를 거쳐 수송의 선생이 되었고, 촌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니, 개의치 마쇼!'라고 큰 처남의 제안에 툇짜를 놓았다.

아버지는 수송국민학교에서 이삼년인가 교편을 잡으신 후, 어느 날 느닷없이 수색이라는 곳에 있는  어느 국민학교로 발령이 났다.

아버지는 우리가 잠든 사이에 출근을 했고, 밤이 깊은 후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하루는 아버지가 학교로 나를 데리고 가신 적이 있다. 대여섯의 나이 때문인지 몰라도 수색은 하염없이 멀었다.

버스를 두세번인가 갈아탔는데, 내 기억으로는 무학재를 너머 홍제동인가에서 한복을 입은 시골노인네들이나 허름한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렸고, 거기에서 갈아탄 버스는 노란 먼지를 피우며 신작로를 따라 또 하염없이 갔다. 길 옆의 풍경은 60년대의 시골 바로 그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수색의 모습은 전란통의 피난민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의 학급의 선생 책상에 앉아 있거나, 학교의 운동장을 홀로 거닐면서 하루를 보냈다.

수업시간이 되자 책가방도 없이 교실에 들어서는 학생들이 보자기를 풀어 책을 꺼내는 것을 보았고, 그들의 옷이 거지들의 행색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점심시간이면 학생 몇명이 복도에서 푸대자루를 들여왔다. 아버지는 자루 속에서 옥수수빵을 꺼내 한명당 두개씩 주었다. 하나는 학생들의 점심이었고, 또 하나는 그들의 저녁거리였다.

그날 나도 아버지와 학생들과 함께 옥수수빵을 먹었다. 까실까실한 빵은 맛있었다.

아버지는 수색으로 발령이 난 후, 아이들이 옥수수빵을 먹는 자리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을 수는 없다고 어머니께 도시락을 싸지 말라고 하셨다.

출근하시는 아버지에게 옥수수빵을 하나만 갖다 달라고 졸랐지만, 아버지는 "아이들의 밥이다. 네가 먹고 싶다고 가져오면 누군가 한명은 그날 저녁을 굶어야 한다"시며, 끝끝내 가져오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후일, 수색에 근무하시는 동안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급봉투에는 푼돈 만 들어있었다고 한다.

"선생 똥은 개도 안먹는다는 것이 괜한 말이겠니?"라시며, 아버지의 차비를 빼면 봉급은 절반으로 줄고, 술이라도 한 잔하면 월급봉투에는 동전 만 남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돈을 빌려와 식구들을 먹였고, 늘 돈 문제로 쩔쩔매셨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집으로 몰려드는 삼촌이며, 아저씨, 외삼촌 등의 끼니를 마련했고, 그 탓에 우리집에서는 수제비를 뜨는 날이 잦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일을 걱정하시기 보다, 오늘 자신에게 할애된 조그만 행복을 즐기셨고 늘 기도를 하셨다.

2010/02/10 12:56에 旅인...face
2010/02/10 12:56 2010/02/10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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