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26 07:26 : 찻집의 오후는

가을님에게

보내주신 메일을 뒤늦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짜여진 일정과 뒤늦게 운동을 하느라 없는 시간마저 쪼개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답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무엇 하나 마무리를 못하는 미온적인 자세 때문인 지도 모릅니다.

메일로 답신을 하려다가 그보다는 가을님께서 제 글에 대하여 적시한 문제점(개선점)들에 대해 딴 분들도 공통된 느낌을 갖지 않을까 하여 가을님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가을나라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이 점을 넓으신 마음으로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부도발생’에 깊은 관심을 갖고 아낌없는 질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을님께서 해주신 말씀과는 다를 지는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가다듬어 작은 그릇이나마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아마추어로서의 편안한 즐거움, 즉 수다라던가 신세 한탄의 장으로서 가을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서 각설하고 말씀드리자면, 제가 글을 쓸 때의 기분은 절박감보다는 공허감이었습니다.

기나긴 불안과 긴장의 시간의 지나고 마침내 불안과 긴장을 가져다 준 실체를 마주하게 될 때, 아마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거나 아니면 단지 실체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공허감을 느낄 것입니다. 아니면 IMF의 후유증으로 거론되었던 그 둘이 적절하게 짬뽕이 된 심리적인 공황 감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1년여를 끌어온 예고된 부도였다는 점이 제가 침잠된 마음을 갖게 된 결정적 요인일지도 모릅니다. 높다란 곳에서 외줄을 타고 있을 때, 자신이 떨어지면 뼈가 부서지지 않을까, 잘못하면 머리를 다칠지도 모른다 하고 걱정을 하지만, 떨어져 버리면 더 이상 고민할 여지없이 엄청난 통증만 남을 뿐입니다.

따라서 부도발생이라는 사태는 제게 고통을 주었지만 결론이었고, 더 이상 상황으로 저를 몰고 갈 성질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와 같이 무책임한 투로 말씀을 드린다면 너는 자신의 직무를 해태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지도 모르지만, 부도대금 회수라는 상황은 별도로 엄존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해답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도가 왜 패륜적인가를 저는 감각적으로 느꼈습니다.

법인격이라는 형식적인 존재의 장송곡이라는 부도가 자연적 존재의 죽음과 같이 장엄할 수 없다는 현실은 국가나 기업이나 죽지 않아야 윤리적인 명제를 충족시키며, 형식적인 존재에 아낌없는 신뢰를 주었거나 아니면 가솔들의 입에 풀칠을 위해서 때론 자존심과 인격마저 포기를 했는데……

결국 회사가 배신을 했고 죽었으며, 살아남은 자들의 생존과 가족의 안위를 뒤흔드는 사태로 몰고 갔으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의 사멸보다 더 지독한 썩는 냄새들 때문입니다.

망해버린 회사에 가서 앉아 있으면 죽은 회사의 망령이 배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란스러운 전화소리와 사람들의 움직임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침묵과 먼지의 무게보다 더 육중한 그림자입니다.

그 자리에서 나와 저들의 이해관계는 균열(파탄)되어 버렸고, 단지 불청객이자 말을 걸어줄 필요도 없는 절대타인인 내가 거기에 정말로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습니다. 밀려드는 소외감과 힐끔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그 회사 직원들에 대해서 채권자로서의 당당함보다는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까뮈의 ‘전락’에서 주인공이 유럽의 끝자락, 어느 항구의 술집에서 세상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그 회사의 사람들과 모든 것을 쳐다보았습니다. 모든 광경들이 우습광스럽고 어긋나 있으며, 한 기업의 멸망을 보면서, 이제 자기 자신의 전락(파멸)마저도 담대하게 수용할 수 있다는 그런 느긋한 기분으로 말입니다.

또한 말씀해 주셨듯이, 서두의 왜 사느냐에서 던져진 존재의 부분이 글 전체에 부조화를 주고 있음은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쇠심줄 같은 신경을 갖고 있다고 해도 부도가 난 후 심리적인 부담감과 나날이 엄습해오는 피로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최근의 불경기로 영업이 위축되고 부하직원들의 의욕마저 저하되어 자신감을 고취시키고 방향을 세워 주어야 하는 싯점인 데, 닥친 부도는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그래서 불현듯 지친 저의 삶에 대하여 왜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결코 사색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닌 고달픈 나날에 대하여 퍼붓는 저주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企投(던져진)된 존재라는 시시껄렁한 명제가 ‘왜 사느냐’라는 에 오버랩 되면서 인생에 대하여 그럴 듯한 이야기가 전개되었고 나름대로 심리적으로 위안이 되었기에 가슴 속에 접어두기 보다는 글에 적어놓고 어느 때인가는 다시 한번 환기해보자 하는 의도가 있었는 지도 모릅니다.

하이데거가 해석학적인 명제로 세계 내 존재인 개인의 실존적인 좌표를 이야기한 것이겠지만, 저는 그런 것보다 부조리의 인간이라는 측면, ‘적지와 왕국’에 근접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뛰어난 영성을 갖고 태어난 위대한 존재라면, 인간에게 위대함은 없습니다. 위대함은 인간이 지닌 자연스런 속성이기에 위대함은 무의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별 볼 일없는 지상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던져졌다는 사실, 그리고 눈을 씻고 찾아봐야 인간의 위대성은 없고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의미가 없다는 것에서 왜 사느냐에 대한 의미가 투명하게 릴리프 되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비참하고 살만한 의미가 없으며, 인간의 비굴함과 교만, 타락한 양심과 야비한 자기합리화, 기아와 질병, 기타 등등의 음울한 부조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의지 그 자체로 위대하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 속에 깃든 가식과 허위를 투명하게 조망함으로써 절망을 맞이하지만 그래도 살겠다는 의지야 말로 “왜 사느냐”의 답이며, 자신이 던져진 적지에서 절망을 넘어서 자신의 왕국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삶의 무의미성으로부터 존재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밖에 없다는 파라독시컬한 해답을 얻었고 크나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찻집과 성전에서 왜 사느냐의 해답이 도출되어 나올 수 없고, 절망과 비참함, 삶에 대한 절실함으로부터 세상을 껴안을 수 있다는 것이며, 그때야말로 황무지와 같은 세상이 처절할 정도로 아름답고 찬란함을 인생에 던져주고 있다는 역설에 직면했습니다.

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듯한 궤변에 동의를 않는다면 그것은 그렇다는 것이지만, 제가 소설이라는 산문문학에 있어 가장 사랑했던 작가 ‘까뮈’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점에서는 자못 성취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짧게 써도 되는 것을 횡설수설 장황하게 늘어놓아 가을님 및 가을나라 식구 여러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머리를 어지럽게 한 점 양해바랍니다.

그렇지만 가을나라에는 제 이 글이 용납되리라고 믿고, 가을님께서 바라듯이 보다 성실한 글, 그리고 뭔가를 향하여 성취해 나가는 글을 쓸 수 있도록 가일층 매진해 나가겠습니다.

늦은 답신을 용서바랍니다.

내다봐 올림

2004/05/26 07:26에 旅인...face
2004/05/26 07:26 2004/05/26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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