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변화를 겪고 있다. 그래도 마음 속은 고요하고 따스하다.
오늘은 강 가에 있는 도서실로 갔다. 넓은 창 가에 앉아 강물에 겨울 오후의 빛이 스미는 것을 보며, 책을 읽었다.
이 곳의 여름밤을 기억하니.
한 낮의 무더위를 보상하는 듯 서늘하게 젖은 공기.
흥건히 엎질러진 어둠.
플냄새. 활엽수들의 수액냄새가 진하게 번져있는 골목.
새벽까지 들리는 자동차들의 엔진소리.
뒷산과 이어지는 캄캄한 잡풀숲에서 밤새 우는 풀벌레들.
그 속으로 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어.
희랍어시간 79쪽
이 글을 읽었을 때 강물 위로 감귤빛 햇살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에 맺혔던 한기가 무릎 위로 슬며시 올라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강의 문장은 이미 가슴에 엎질러져 흥건했다. 마저 다 읽기로 한다. 서서히 장님이 되어가는 희랍어 강사와 말(言)의 날카로운 의미에 질려 그만 실어가 된 여자. 그녀는 어렸을 적 불어를 배우면서 실어에서 풀려난 기억을 더듬어 아무데도 쓸데없는 희랍어를 배운다.
강사와 수강생에 불과하던 그들은, 불의에 안경을 잃고 볼 수 없게 된 강사를 여자가 집에 데려다 준 때문에 강사와 하루밤을 보내게 된다. 거의 볼 수 없는 남자와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여자가 물끄러미 앉아 보내는 개와 늑대의 시간. 남자는 “거기 계세요”라고 물으며 어둠 저 편 어디에 앉아 있을 실어의 여자에게 자신을 이야기한다. 여자는 대답하지 못한다. 단지 속으로…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플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 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같은 책 161쪽
그들이 입맞춤을 하게 된다는 사실은 논리도 필연도 아니다. 단지 난잡한 우연이고 고독한 탓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진실에 근사하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같은 책 174쪽
저도 큰 변화중인데 마음 속은 더 복잡하고 춥습니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네요.
마지막 문장은 정말 근사합니다.
가끔씩 멋진 글을 대할때마다 감동을 받지만 그런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질투가 날 때도 있어요. ㅎㅎ
저도 강이 내려다 보이는 도서관에서 근사한 글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복잡한 마음이 좀 고요해질지도…
그동안 한강 씨의 소설을 몇권 더 읽었습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과 같은 끔찍한 소설들과 붉은 꽃과 같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문장은 너무 아름답지만 소설들의 상황은 너무 가혹하여 문장이 상황에 덮혀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숨막힐듯한 그녀의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과 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
나의 삶에서 시각과 청각은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한강의 책을 읽으면 마음이 먹먹해져서 저리도 여린 몸에서 저렇게 처절한 문구를
저렇게 쓰는 그녀의 담담함에.
그래서 사는 게 힘든거구나 이유도 모른체
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한강의 글을 읽으며 참 잘쓰는구나 했지만, 그녀의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끔찍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희랍어 시간이라는 소설은 참으로 여름에 읽기 좋을 만큼 문장이 서늘하여 약시의 선생과 실어증의 여자의 고독이 내 가슴 속으로 저며드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녀가 최근에 시집을 낸 모양인데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한강의 책을 처음 접한것은 <검은사슴>이란 책이었는데 너무 오래되서 제목이 맞는지
생각이 잘 안나네요.
골짜기 사이에서 만나는 사슴의 모습에서 절망을 표현한 그녀의 절망은
이미지가 그려지면서 어떠한 절망을 느끼면 저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의 절망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저렇게 단아한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글쓰기가 그녀의 숙명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는 그녀의 책들을 찾아서 읽었고 그때마다 느끼는 슬픔은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슬픔이라 슬퍼하기도 싫은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최근 책들은 읽어보지 못했고 그런 슬픔이 안스러워 읽지 못했었던것 같네요.
그러다 접한 <희랍어 시간>이란 책이 읽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저는 ‘희랍어시간’을 인터넷 연재로 읽고 다시 책으로 읽었습니다. 그녀가 쓴 다른 소설보다 월등히 나았던 것 같습니다.
신체적인 불구(약시)나 구체적인 증상(실어증)이 정신적인 증환보다는 훨씬 정상적이라는 느낌이거나 동정적 시선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아주 맑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