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래간만에 황석영씨의 소설을 읽었다.
처음으로 그의 소설을 만난 때는 1974년이었다. 중학교 때 집의 마흔 몇권짜리 한국문학전집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다. 그때 만 해도 그는 신예작가였던 셈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한국문학을 거의 끝내고, 외국소설 쪽으로 방향을 옮겨가고 있었다.
1974년 겨울방학에 시작되던 무렵, 황석영의 중단편 모음집 <객지>를 만났다.
객지를 야금야금 읽었다. 하루에 중편이나 단편, 한편씩 읽었다.
그리고 유신의 엄동 아래, 우리나라가 몹시도 을씬년스럽다는 것을 가까스로 알았다.
그 책을 읽었던 겨울방학은 <삼포 가는 길>처럼 유독 추웠다.
그 후 그의 소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리고 이철용인가 하는 사람의 이야기인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그의 소설 읽기를 마쳤다.
그의 소설은 자연주의를 지향했고, 르뽀문학과 같은 향취를 지니고 있었다. 빈민의 삶과 교착된 월남전선의 한계 상황 속에서도 황석영의 글은 늘 서정적이었고 그만큼 문학적이었다.
그러나 <꼬방동네 사람들>을 읽고, 그가 문학적 서정을 포기하고 르뽀를 지향한 것이 아닐까 하고 더 이상 황석영씨의 소설 읽기를 포기했다.
그의 글 읽기를 마친 후,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들어섰고, 광주항쟁이 일어났고 동유럽의 장벽이 허물어졌으며, 장길산은 여전히 쓰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읽은 황석영의 글은 <삼국지>를 번역한 것이 다였다.
그리고 80년대, 90년대를 접고. 2008년 어제, <바리데기>를 읽었다.
그동안 그의 <오래된 정원>을 읽고는 싶었다.
바리데기는 70년대의 짧은 체험 현장의 치열한 울림은 없다. 장대하고 서사적인 곡조였다. 한 가족이 뿔뿔히 흩어지고 죽어가고, 바리데기 자신이 중국을 지나 영국에 까지 이르는 그 지옥과 같은 시간들이, 저 세상 속의 생명수를 찾아가는 처참한 시간들과 겹쳐지면서, 과거의 아픔으로 응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 속에 이개지면서 죽음의 세상인 서천으로 서천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제 지방공항에서 책을 사서 두시간 만에 책 읽기를 마쳤다. 예전의 그의 글을 읽던 속도에 비하여 폭발적인 스피드로 읽었지만, 그의 글의 폭은 넓고 유역이 광대해서, 이제 늙은 대가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보다 나는 그의 오래된 글들이 좋다.
참고> 바리데기
오래된 글들은 한번 읽어보고싶네요. 어머니께 한번 여쭈어 보아 좀 부쳐달라고해야겠습니다. 그런데 MB스러운 발언이라니 궁금한데요?
MB스러운 발언? 저도 잘모릅니다.
하지만 저 나름대로 정의를 내린다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런 진정성도, 자신에 대한 반성도, 가슴도 없이 하는 말.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중도나 실용이라고 할 때, 단어 속에 아무런 이념이나 노선도 없는, 단지 보수를 국민들이 싫어하니까 중도,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 실용이 낫기 때문에 실용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고 할까요?
황석영씨의 문장은 황순원씨 이후 제일 아름다운 미문이라고 합니다.
Pingback: Ordinary, but Spe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