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그리움에 대한 흔들리는 시선

…implosion

여름의 잔열이 가시지 않은 가을 오후,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 들어섰고 김태균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났습니다. 물빛을 들여다 보다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막연한 의혹에 빠졌는데, 그것은 아마

이렇게 그릴 수 있음에도…

이 시대의 회화를 비롯한 조형예술은 어떤 이유에서 눈에 반역하며 추상화되고 관념화되었느냐 와 같은 구상화이면서도 떨림의 유역은 어째서 다른 것인가 하는 의문일 것 입니다.

미술이란 지난 두 세기 동안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갖가지 의미가 덧붙여져 새롭게 태어난 단어입니다. 이 기간은 귀족의 어두운 서재 혹은 거실에 유폐되어 있던 그림이라는 것이 시장에서 대중들에게 전시되고 세인들의 평가와 함께 가치가 매겨지는 시기인 동시에 ‘감성적 인식에 관한 학문’이라는 美學이 나온 시기와 일치합니다.

대중화를 바탕으로 독특한 미적 현상을 제공하기 위한 기법이나 양식적인 측면에서 미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다중이 간직한 익명의 시선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보는 사람의 즐거움을 위한 미술이기 보다, 사유하는 미술,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미술, 그래서 자신의 권위와 자기만족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듯 했습니다.

결과로 미술은 자신의 눈으로 작품을 마주하고 마음의 울림을 들어야 할 감상이,  타인의  평론이나 권위있는 매체에 귀를 기울이는 耳鑑에 의해 압도되는 기괴한 관념론이 되었습니다.

가슴을 적시기에 예술은 너무 멀리 갔거나, 눈을 즐겁게 하기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미술은 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김태균 작가의 작품을 만났던 것 입니다.

구상작품이라는 점과 극명한 화면은 현대미술에 대한 반역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물빛에 발목을 담고 침묵하고 있는 하늘과 수면에 흔들리는 헐벗은 가지가 젖은 낙엽과 다시 몸을 합하는 정경은 문득 하늘을 그립게 했고, 곁에 다가왔으나 잊고 있었던 가을을 맞이하러 갤러리의 문을 열고 길거리로 나서게 했습니다.

김태균 작가의 작품은 팝 아트 이후의 극사실주의와 맥락을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

내면적인 추상의 길을 미술이 더듬어왔다면, 팝 아트는 구상적이되, 대중에게 개방된 통속적인 이미지, 즉 상표∙만화∙사진 등에서 모티브를 찾고 현대인의 감수성을 노골화해 왔습니다. 극사실주의는 팝 아트의 뒤를 이으며 超寫實主義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극히 정밀하게 실재를 模寫한다는 명칭은 이들 그림을 폄하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모사나 복제물에 대한 사유는 복합적이고 다른 의미를 내포합니다. 

들뤼즈는 ‘시뮬라크르는 모델을 뛰어 넘어 새로운 자신의 공간을 창조해가는 역동성과 자기정체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이는 플라톤 이후의 이데아의 모사인 현상에 대한 멸시를 극복하고, 더 나아가 기호와 가상공간이 현실을 뒤덮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뮬라시옹과 그 결과물인 시뮬라크르의 위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아울러 內破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문 탓에 어느 시인은 “아무튼 나 없는 빈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고 뫼비우스 문법으로 중얼거립니다.

극사실주의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혹은 시공간이 절대적으로 압축된 순간을 물리적인 시선으로 냉담하게 모사합니다. 사진보다 정밀하게 모사된 풍경은 생경하고 적막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입니다. 딥 포커스로 응시가 사라진 풍경 속에는 오욕칠정에 흔들리는 인간의 시선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계와 같은 시선으로 극명하게 모사한 풍경은 하이퍼 리얼리티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작가의 작품을 극사실주의라고 부르는데 하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그림에는 잔잔한 풍경을 앞에 놓고 흔들리는 서정적 시선이 있습니다. 초침과 초침 사이에 숨막힐 듯 결박된 화면이 아니라, 고요하지만 지축이 흔들리는 미미한 파문과 고였다가 다시 흘러가는 개울의 흐름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작가를 서정적 사실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구상적 전통에 충실하다는 것, 기본적인 기법으로 견고하게 작업하여 군더더기가 없는 것을 작품 구석구석에서 목도할 수 있으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보다 오히려 새롭고 서정적이라는 것은, 예술의 전통인 감성을 천착하고 기본에 충실해야 怪에 흐르지 않고 새로운 것이 발현 가능하다는 우리 선조들의 法古創新의 정신과 맥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the face of a wind

올해 작가가 가을 계곡에서 건져온 물빛은 다른 해보다 더 잠잠합니다.

가을날의 풍경을 들이키고 다시 토해내는 맑음이 아니라 우기같았던 올 여름에 넘쳐흘렀던 계곡물 탓에 마주할 수 없었던 개울의 바닥을 세상의 풍경 속으로 건져 올리는 고요입니다.

첫 해 ‘부암동, 물빛 그리움’에서 물빛이 토해낸 늦가을의 서늘한 하늘을 엿보았다면, 작년 ‘부암동, 물빛 그리움Ⅱ’에서는 늦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물빛을 만났습니다. 올해의 물빛은 첫해와 작년의 절반의 물빛이거나 아니면 이미 가을물 때를 지나 갈수기에 접어든 물빛인지도 모릅니다.

여태까지는 작가가 인도하는 한두 평의 작은 계곡의 물빛에 반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매료된 것은 풍경보다 거기에 깃든 고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절대 정적 속에 깃든 우주와 같은 곳에서는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도 무시무시한 정적 속에 흡수되고 들리지 않습니다.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 낙엽이 바위와 땅을 긁는 소리, 거미가 거미줄을 잣고, 지렁이가 땅 밑에서 우는 소리 등 갖가지 소음들이 정적 위로 켜켜로 쌓여야 마침내 들리기 직전인 고요에 이릅니다. 그래서 고요는 들리지 않고 삼삼엄엄합니다.

바위 위에 떨어지는 햇볕의 소리는 쨍~하는 높은 음자리이지만, 먹먹한 검은 물빛이 그 소리를 정적으로 끌어당겨 무화시킵니다. 그 옆으로 수면의 밝은 면은 가청주파수 이하로 배음을 이루면서 캔버스 위에 기압골을 형성합니다. 기압골을 따라 수면 위로 물결이 일고 잔가지와 바위의 그림자가 수면 위에 낮고 길거나 가파른 주파수를 그리며 오선지 위의 음표처럼 얽힙니다.

아직 소리는 들리지 않고, 풍경은 삼엄하지만……

개울 위에 낙엽이 한 잎 떨어진다면? 

순간! 

고요 위로 파문이 번지며 빈 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소리, 밀려온 개울물이 바위 틈으로 흘러가는 소리, 가을 햇빛에 그림자가 허무하게 꺼지는 울음들로 넘칩니다.

인위가 자연 속으로 풀려가는 지점을 만나게 되면 미칠 것 같습니다. 고대의 구조물이 무너지고 뜰 한구석에서 햇볕의 이력과 비와 바람의 역사에 풍화되어 인위와 자연이 소실되며 몸을 뒤섞는 국면, 데생에서 명도 사이의 골이 좁아지면서 사물의 면과 면이 뭉개지고 평형화되어 경계가 나른하게 풀려나가는 사태를 첫 입맞춤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김태균 작가의 작품은 제 기대에 반합니다. 면과 면 사이가 뚜렷하고 선분이 선명하며 화해하지 못한 사물의 질감들로 극명합니다. 반하여 그림은 뭉개지거나 雜하지 않습니다. 작가가 연필스케치, 붓스케치, 초 중벌 채색을 한 후, 마무리 채색을 하고 한두 번 붓질을 더해가는 매 단계마다 숨가쁠 정도로 얇게 얇게 색을 들여갑니다. 그 과정에서 빛에 색이 섞여 뭉개지는 것을 기피한 탓에 평형화에 이르지는 못하지만, 사물의 계면들 사이가 뚜렷하고 화면의 소리는 청아합니다.

계면 사이의 선분, 개울이 좁은 바위 틈을 지날 때 뒤틀어진 수면에 반사되는 빛과 그림자의 짧거나 긴 선분들은 다양한 음률로 고음과 저음의 움직임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것은 약동하는 자연의 힘을 부여하고 정지된 화폭을 애니미즘적인 상태로 인도하지만, 속성은 고요입니다.

이제 작가는 바닥에 가라앉은 개울물에서 눈을 들어 나무로 시선을 옮깁니다.

나무는 바람의 부류라고 합니다. 나는 것들은 나뭇가지 사이에 깃들고, 사람들은 바람과 햇볕이 드는 높은 가지에 풍장을 지냅니다. 바람이 불어야 잎과 가지를 흔들며 소리를 치고, 물과 대지의 자양분 뿐 아니라 들을 건너온 바람의 소식을 기다리며 나무는 자랍니다.

물빛 고요에서 시작한 작가의 여행은 이제 숲의 고요를 깨치고 맑은 소리로 나아가는 듯도 한데, 작가의 나무 가지에는 바람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숲에 적요함만 가득합니다.

그 적요는 빛 사이로 그늘이 쌓이고 그늘 사이로 빛이 스미는 방식으로 퇴적된 것이라서 여간해서 나뭇잎이 흔들리고 숲이 수런대며 깨어나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캔버스에 귀를 대고 바람의 소식을 기다려 보려고 합니다.

2011년 시월에…

전시회 소책자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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