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암동, 물빛 그리움 -2

그 정적들은 그것이 그늘에서 생긴 것이냐
햇빛에서 생긴 것이냐에 따라 그 질이 다르다.

– 알베르 카뮈 –

볕이 따스해져 아지랑이가 피거나, 빨갛게 익은 고추를 마당에 가득 널어놓은 정오 무렵, 마당으로 나가 응달과 양지 사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문득 그늘인지 볕인지 알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거기를 망량(罔兩)이라고 하며, 그림자의 그림자인 셈이다. 이 망량을 바라보다 보면, 홀연 정적을 만나기도 한다.

김태균 씨가 올해에 보여주는 부암동 연작의 물빛은 작년보다 경쾌하지만 수런스럽지 않고 계곡은 더욱 고요하다. 뜬금없이 망량이 떠오른 탓이며, 작품을 대하고 참 조용하다고 속삭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여 있는 물빛이 잔잔한 까닭이라기보다 망량의 유역이 더 넓은 탓인지도 모르며, 화양구곡은 너른 개울물이 바위와 여울에 뒤채여 소란스러울 만도 한데, 봄빛 속의 적요는 오히려 삼엄하다.

월간아트뉴스 초대기획전으로 작년에 열렸던 『부암동, 물빛 그리움』의 연작을 마주 한 이후, 김태균 씨의 작품에서 마주하는 것은 단순한 풍경이나 하늘을 머금은 물빛만은 아니었다. 습기에 젖은 나뭇잎이 삭아가는 알싸한 내음과 가을 햇볕에 하얗게 바래는 바위들이 토해내는 묵은 먼지냄새. 이들 냄새를 더듬다보면 세상에 잠시 널어놓은 반 평짜리 생애 속으로 까마득한 정적이 스며들고, 결국 생이란 쌓아올리기보다 낭비하기 위하여 있다는 세상과의 조촐한 화해에 이르게 되는데, 정적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기에 만연한 추상으로는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다.

추상이 지닌 밀도 높은 강박으로부터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적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서는 환원을 통하여 구체의 풍경으로 이완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그림을 맞이하여 관객의 정서가 활짝 열려야 되는데, 추상에서 마주하는 미적 체험이란 감도가 높고 폭발적이긴 하지만 그리움의 저변에 번지는 아날로그적인 여유와 미세한 떨림은 삭감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김태균 씨는 그런 지점에 구상작품을 갖고 등장했는데, 그의 작업은 장인의 그것처럼 엄밀하고 정교하다. 그의 그림은 마치 사진기의 조리개를 f11로 최대한 좁혀 피사계의 심도를 끌어올림으로써 풍경화에서 중시되는 원근보다는 사물의 명료성을 천착하고 있는 것 같으며, 화각을 넓혀야 할 풍경화임에도 줌을 당겨 오목한 화각으로 그린 탓에 정물화 같다. 이런 이율배반 때문인지 몰라도 여느 풍경화와 사뭇 다르며 명상적이다. 캔버스의 올이 낱낱이 드러날 정도로 채색이 얇고 투명하지만 풍경이 깊고 그윽한 것은 가을을 담고 있는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부암동, 물빛 그리움-2』가 또 다시 열렸다는 것은, 한 작가의 기획이 중단되지 않고 작업대에 오르고 있으며 새로운 관객과 비판에 직면하고자 오늘을 맞이했으며, 내일『부암동, 물빛 그리움』이 또 다른 풍경으로 다가올 것을 예고하는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움을 간직한 채, 약간의 초조함과 기대감으로 그의 또 다른 연작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2010년 가을의 가운데에서…

전시회 소책자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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