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그리고 이야기들

나는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 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의 섬 중…>

섬 이야기(Island Story)를 보자, 한선주선생의 일련의 작품들은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작품은 작가의 기도에 명백히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적 체험이 오브제와 결합하여 작업의 속에서 퇴적되고, 색이나 질료들이 시간들 속에 불순하게 섞이는 것이어서, 작업이란 늘 인위가 자연 속으로 용해되는 집요한 과정이거나, 자연을 인위 속에 습합시키는 과정이어서 늘 위태하다. 관람자 역시 작품을 해석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 마주하는 자신의 내적 체험을 작품과 함께 새로 직조해가는 절묘한 과정 속에 서 있을 뿐이다.

한선생이 오브제로 사용하는 닥섬유와 색의 스밈은 느림과 빠름의 변주이며, 번짐은 눈에 잡히지 않는 섬유질의 배향과 관계되어 통제되기보다, 번짐의 흐름과 색이 제대로 먹었느냐 아니냐는 작가 자신의 만족과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작품들이 그렇겠지만, 그녀의 작품은 기획될 수는 있어도 재현될 수 없는 독특함을 간직한다.

쪽빛을 배우기 위하여 창포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보성강을 지나, 갯벌이 넓었던 벌교에서 그와 함께 보냈던 시간 틈에서 서서히 바래어가는 하늘의 색이 기억난다. 물발이 오른 꽃물에 천을 담갔다 건져 잿물을 씻어내고 볕에 널면 쪽빛을 토해내는 데, 그 색들은 늘 새롭고 순간마다 다른 것이었다. 그 작업은 주술적이었고 햇볕과 바람과 꽃물들이 섞이는 시간들의 향연이라, 그 고장의 갯벌 위로 순간마다 아로새겨지는 빛의 흐름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고대의 문양과 직조를 발견코자 작년에 우리는 태양이 하늘의 가운데 멈추어 서서 그림자마저 소실되어버리는 안데스 고원으로 갔다. 메마른 고원을 달려 쿠스코에서 에스파냐의 성당 앞 광장에서 분수대를 만난 순간, 갈증과 투명해져 가는 하늘에 어리둥절해 하며 광장의 화강암 포석을 따라 시장으로 흘러들었고 갖가지 색으로 치렁한 아레키파를 입은 케추아족의 후예들이 좌판에 늘어 놓은 손때 묻은 수공예품을 보았다. 원초적인 문양들 사이로 코발트빛과 바이올렛의 상감되어 희미하게 떠오르고, 피사로의 총칼 아래 사라진 문명의 잔해를 잉카의 타피스트리의 문양 속에서 마주했을 때, 우리는 원초적인 단순성에 그만 경탄하고 말았다. 우리가 바라본 것들을 뇌리 속에 각인시키고자 했으나 다시 도시로 돌아온 나는 남루의 일상에 빠져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한선생의 작품은 고고학적인 함축미을 간직하며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한선생의 근작은 중앙토의 황색 바탕에 북쪽의 검은 색이 가미되어 금빛으로 발광하던 모노톤이었다. 도회적이며 일본의 정원처럼 단아하여, 그늘의 길이 만큼 침묵의 골이 깊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번의 작품은 그렇지 않고 나에게 동화적이란 느낌과 체온이 느껴진다.

안식년을 맞이한 한선생을 만나기 위하여 얼마 전 브루니로 갔다. 그것은 섬, 섬, 섬으로의 여행이었다. 계절과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이 엇갈리는 적도를 지나 대륙이라 불리우는 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시 남쪽 섬, 타즈매니아, 거기에서 도항선을 타고 조그만 섬에 당도했다. 거기가 브루니였다. 

그녀가 세들어 산 곳은 바다를 향하여 삼면이 통유리로 된 스위스 조각가의 집이다. 집 앞 바다는 세루리안 블루로 청정했다. 남빙양에서 흘러온 차디찬 조류는 타즈매니아와 호주의 비좁은 사이를 채우고 태평양으로 스며들고 있었고, 해안의 바위에는 전복과 청각, 파래 등이 긴장된 생명력을 간직한 채, 고독한 몽상가를 유혹하는 섬의 풍광과 뒤섞이고 있었다.

세상의 끝처럼 외롭고 아름다운 섬에서 만난 그녀의 일상은 가끔은 타즈매니아에 있는 대학에 가서 강의를 하거나, 찬거리를 위하여 채마밭을 일구고, 굴과 조개를 채취하며, 뒤뜰에서 계란을 찾고, 외로운 이웃을 찾아가 담소를 즐기거나 아니면 거실에 앉아 주어온 나뭇가지를 벽난로의 불 위에 얹고, 바다와 섬의 자락들이 하루와 계절,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새로운 색들로 채워지고 지워져가는 것을 오랜 시간동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 브루니의 자연은 때론 하루에도 열두번 비가 내리고, 그 사이로 열두번 해가 비친다 할 정도로 변화무쌍하며, 수풀 속에 사람들이 묻혀 살아서 도회적이었던 그녀의 몸에서 바다 내음 속에 부푼 흙냄새가 났고,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었다. 거실 한 켠에는 산책하다 주워온 온갖 오브제 – 조개, 돌, 지푸라기, 이름 모를 야생꽃, 고사리, 바다 모래에 자연스레 다듬어진 나무 조각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쓰잘데기 없는 것일 수도 있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마치 기억의 보물처럼 곱게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타스매니아에서 있었던 초대전에서 이 오브제들이 녹아들어가 닥섬유의 질긴 소자와 잘 어우러져 그곳의 바람, 햇빛, 자연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 낡고 오래된 건물을 예술가들의 작업장과 갤러리로 따듯하게 만들었던 그 공간에 디스플레이 되었던 작품은, 마치 바다의 신을 향한 제례의식처럼 바닥에 차려놓았었다.

섬을 떠난 한선주선생의 새로운 섬 이야기에는 전작이 보여주었던 모노크롬의 정적인 색조를 덜어내고, 우리의 정색인 오방색의 중 동쪽의 푸른색과 남쪽의 붉은 색, 서쪽의 하얀 색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비록 이야기 속에 다른 대륙의 숨결이 섞여 있다고 하여도, 그 이야기를 담는 소자는 결국 한지인 닥섬유이다. 

섬 이야기라는 제목을 보면서 한선주 선생이 어떤 심상을 갖고,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것은 그가 조우한 세계가 그녀의 몸을 관통하면서 직조한 독특한 체험이기에 타인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밀물에 나라는 체험의 해안에 와 닿은 작품들을 통하여 나의 보잘 것 없는 언어로 말할 뿐이다.

한선주의 섬 이야기는 닥섬유에 습합되어가는 푸르름으로, 섬이라기에는 차라리 대양과 같은 모습으로 오목하며, 각각의 바다는 자신들의 붉은 신화들을 바닥에 간직하고 있다. 그 전설들은 질긴 닥섬유에 물고기와 새의 모양으로 누벼져 물그림자 아래에 가라앉아 있다. 그녀가 사용한 오브제들은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질서의 틀에서 벗어나 거칠지만 역동적인 리듬으로 선명하다.

이러한 선명성은 작업실에서 벗어나 잉카의 고원에서 마주했던 태양의 무늬결과 잉카나 마야문명에서 볼 수 있는 형상과 기호, 매듭, 새, 물고기 등의 이마쥬가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다가 무심히 이 그릇에 또 다른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갯벌 위에 번져나가던 노을의 모습과 섬과 섬을 건너 또 다른 섬에서 맞이했던 대양의 숨결들이 그녀의 체내에 스미고 잉태된 건강한 생명력이 떠오르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녀의 섬 이야기는 약동하며 새로운 음조로 나의 가슴에 차오른다.

보잘 것 없는 이야기로 한선생의 작품의 오의를 훼멸한 것 같아, 불립문자로 지은 효봉선사의 오도송의 일부를 올려본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엔 고기가 茶를 달이네

2007.12.30일에 씀

전시회 소책자의 글

참고 : 갤러리 찰나, 개관 1주년 ‘한선주 섬유조형전’ , 제주도에서 만난 ‘섬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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