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들이-D

1+D. 예감

해무가 자욱했다. 바다의 아침은 축축하고 냉랭했다. 낮이 되면 무더울 것을 안개 속을 뚫고 내려앉는 햇빛 속에 깃든 냄새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유치하고 자명했던 어린 날들은 이미 끝나 있었다. 다가 올 나날들이 더 이상 고요함과 조화 속에 머물지 않을 것이고, 어지러움과 기대하지 않았던 슬픔으로 물들어 버릴 것을 예감했다.

그때 안개를 헤치고 너는 왔다. 그 순간, 그만, 예감이 맞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너와 나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사이에 놓여있을 허무하고 우울한 것들을 이미, 전부 다, 알아버렸다.

여름은 가고, 또 가을이 지나가고, 그렇게…

2+D. 노을과 묘지

그때 강변으로 나가 노을이 지는 것을 함께 보지 못했던 것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묘지’1지금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지만 당시에는 선교사 무덤이라고 했다. 나는 순교자의 무덤이라고 늘 생각했다. 간혹 묘지로 들어서는 철제 쪽문이 열려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미루나무와 야트막한 나무들 아래, 낙엽과 풀들 사이로 묘석들이 누워 있었다. 가을 오후에 들어서면 쓸쓸해서 묵상이라는 것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위로 자란 미루나무 몇그루가 황금빛 오후를 맞이하며 짙은 그림자로 서서 바람에 대하여 사색하는 모습을 어째서 당신께 한번도 보여주질 못했는지.

3+D. 알고리즘과 오욕칠정

세상은 오온2五蘊: 色·受·想·行·識에서 色을 빼면, 의식작용(수상행식)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色(외부의 사물)을 느끼는 사물의 이차성질 또한 관념(識)이다. 결국 우리가 아는 세상은 형성된 관념(識)의 소산3一切唯心所造일 뿐이다. 세상이 불합리한 것은, 우리의 의식이란 것이 코기토적인 관념과 기괴하고도 외설적인 마음(심리)이 마구 뒤섞여 있는 탓이다. 이외에 제3의 알지 못하는 무엇4神이나 영혼 등인가가 있을 수는 있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인공지능(AI)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사물과 움직임에는 특정한 알고리즘(algorithm)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유전자와 사람의 사유 또한 알고리즘(신의 섭리)에 기반하며, 우주 또한 알고리즘에 기반한 시뮬레이션의 결과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영혼이나 마음 또한 거대한 알고리즘의 산물이라고 한다.

AI 공학자들은 처음에는 로봇의 움직임에서 생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는 알고리즘 개발하겠다고 달려들었다. 고양이를 예로 들면, 고양이를 인식하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만들었다고 큰 소리를 치는 순간, 알고리즘으로 포착되지 않는 고양이는 늘 있었고, 이들 예외 앞에서 알고리즘은 오류메시지를 내고 시스템은 처리불능상태를 맞이한다. 이제는 예외에 따른 오류를 데이터의 량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수억장의 고양이 사진을 시스템에 업로드하고, “이것들이 고양이다.”라고 한다. 이제 개별적인 예외를 알고리즘이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라는 사태를 수억분의 일(예외/고양이 사진)이라는 무한에 가깝게 수렴시키고, 무한 속에서 출현하는 예외라는 사태를 다시 수억장의 고양이에 대한 학습을 통한 경험치로 부터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로 알고리즘은 변화한다.

구글 딥마인드에서는 정교한 알고리즘을 알파고5AlphaGo : AI가 아니라 구글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라고 되어 있다에 심어넣은 뒤,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량의 바둑 기보(棋譜)를 쏟아붓고 바둑을 학습시킨다. 알파고는 데이터들과 알고리즘의 변주를 통하여 바둑돌의 수와 그 수가 다음 수에 미칠 영향을 다양하게 시뮬라시옹하면서, 승리를 시뮬라크르해 나갔다. 알파고는 2016년 3월에 이세돌 9단과 호선으로 맞붙어 4승 1패로 이긴다.

이제 코기토의 영역을 넘어, 오욕칠정으로 AI를 물들일 수 있을 것인가?

바둑이 알파고에게 가능했다면, 소설과 시 혹은 각종 심리학에 관한 연구보고서들을 쏟아부어 AI에게 감정과 같은 것을 학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고전문학을 집어넣는다면, 품위있고 절제된 감정을 보유한 재수없는 AI가 될 것이고, 카톡의 대화를 집어넣는다면 그럭저럭 이 시대의 젊은이와 흡사한 AI가 될 것이다. 만약 심리학에 관한 각종 자료를 입력한다면, 미친 AI를 만날 수도 있다.

‘인류멸망보고서’6임필성, 김지윤 감독작, 2012.04.11 개봉라는 맹랑한 옴니버스 영화를 보았다. 영화 1부에는 로봇 RU-4(출가 후 법명은 인명)가 깨달음을 얻고, 승려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부좌를 틀고 입정에 든 자세나 설법 시 안출해 내는 법문이 너무 그럴 듯해서, 깨달음이란 중생인 사람보다, 마음이 없는 로봇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당나라 때의 고불, 조주스님께 한 중이 여쭙는다. “로봇(개)에게도 불성이란 것이 있습니까?” 스님께서는 “없다”고 한다.7趙州和尙 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아픔을 느끼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아픔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중생들에게, 아픔이 무엇이고(苦), 아픔이 어떻게 생기며(集), 아픔의 치유란 무엇이고(滅), 어떻게 아픔을 치유할 것인지(道)를 알려주려고 하셨을 따름이다.

AI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로봇인 인명선사 또한 아픔을 느낄 까닭이 없다. 그런 로봇에게 부처님의 사성제나 깨달음 따위란 무의미하다. 이미 아픔이 없는 탓이다. 희노애락같은 것 역시 로봇에게 필요치 않다.

문제는 자신의 번뇌조차 어쩔 줄 모르는 인간이, AI도 자신처럼 아파하고 오욕칠정에 물들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4+D.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란 뿌리에서 부터 밖으로 번져가며 환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너는 달랐어. 주변의 빛을 자신 속으로 빨아들이며 빛나고 있었기에 오히려 주변은 어둠에 휩쌓이고 있었지. 물론 웃음 속에 네가 물고 있던 치열교정기는 완전한 아름다움에 이르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긴 했지만 말이야.

5+D. 쓸고 간 자취

낙엽이 지지 않은 마당에는 비질한 자국이 잔잔하고,
조용한 낮에는 지나가신 당신의 자취만 우묵합니다.

6+D. 다른 사람의 바램

“모든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자크 라캉의 말은 어렵다. 그래서 비근한 예를 든다면, 서로의 몸을 탐하는 연인들은 자신이 느끼는 쾌감보다 상대의 쾌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흡족하게 일을 마친 후, 그들은 좋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좋았느냐고 묻는다. 이렇게 우리는 타자의 욕망은 물론 쾌락마저 욕망한다.

반면, 자신의 욕망이나 쾌락을 욕망하지 않는 탓에, 욕망을 채우고 채워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타자의 욕망이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장할 것 같은 아귀도 속에서 허기진 채 살아가는 것이다.

7+D. 그녀와 그녀들

남자들에겐 자신 만의 뻬아뜨리체가 있는 법이다. 나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속엔 두 명의 뻬아뜨리체가 있다.

8+D. 주이상스(jouissance)

존재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멸망을 택하고야 마는, 온갖 외설적이고 자기모욕과 수치에 뒤덮여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신 속의 음울한 명령(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쾌락)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욕망의 중핵이 있다.

이 지점에서 오르가즘에 다다르거나, 괴물이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타자) 속에서 분출돼 나올 수도 있는 괴물과 다다르면 안되는 자신의 오르가즘이 두렵다. 하지만 명령은 말초신경을 핥는 것 같은 향락(jouissance)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9+D. 파두와 곡비

파두8Fado : 포루투갈의 대중가요를 듣는다. 듣다보면 가수가 내 대신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곡비9哭婢 : 예전에, 양반집 장례 때 행렬의 앞에 가면서 곡을 하는 계집종에게 바라듯, 슬퍼지기 위하여 울음이 더 깊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그래서 파두에는 눈물(Lagrima)이라는 단어가 흔하다. 파디스타 Mariza는 리스본에서 열린 콘서트(Ao Vivo Em Lisboa)에서 ‘내 땅의 사람들'(Gente da minha terra)을 부르다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무대 위에서 울고 만다. 그녀가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의 슬픔은 그렇게 애절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겨우 알 수 있었다.

D++. 추신

이 글들은 변명이 아니다.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을 사랑하기 위하여, 70원 짜리 우표를 붙여 본제입납10本第入納 : 본집에 들어가는 편지라는 뜻으로, 자기 집으로 편지를 보낼 때 겉봉에 자기 이름을 적고 그 밑에 쓰는 말으로, 세상에 띄우는 편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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