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들이-E

E#-1. D minor

그리움이 있는 곳은 다양한 노래가 뒤덮이고 무수한 풍경들이 드리웠을 것이나… 저는 한 줄기의 그늘과 하나의 음계로 노래할 수 있을 뿐 입니다. 제가 낼 수 있는 유일한 음인 ‘라’의 위치는 높낮이가 없어서 나란합니다. 다만 반음표로 길게 숨을 늘이거나, 십육분음표로 숨가쁘게, 혹은 속삭이거나 소리치며, 젊었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노래하기 보다, 제가 서 있는 이 곳이 얼마나 외지고 어두운 가를 이야기할 뿐 입니다.

E#-2. 모순의 해석법

모순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변증법은 그 성격을 달리한다.

지젝(Slavoj Žižek)은 어떤 화해나 종합적인 관점이 아닌, 헤겔 자신이 말한 ‘모순(오랑캐, 유태인)은 모든 동일성(우리 민족, 독일 민족)의 내적 조건’이라는 인식을 생산한다고 한다.

이 명제를 통하여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은 언제나 불일치로 분해되며, 이 불일치야말로 그 관념이 애초에 존재하게 된 필연성임을 주장한다고 한다.

  • 테제(these, 定立) : 모든 영화는 훌륭하다.
  • 안티테제(antithese, 反定立) : 타이타닉은 형편없다. — ‘테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역할
  • 종합(synthese) :
    • 일반적인 종합(동일성의 변증법) : 대다수의 영화는 훌륭하다.
    • 지젝식의 종합(차이의 변증법) : 모든 영화가 훌륭한 것은 ‘타이타닉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모든 영화가 훌륭하다는 것이냐? 그럼 타이타닉을 봐라. 다른 영화들은 타이타닉처럼 형편없지 않다.

아무런 차이와 갈등이 없는 일반적인 종합에 대하여, 지젝식 종합의 진실은 바로 모순(antithese) 속에 있다. 형편없는 영화(타이타닉)라는 차이를 모른다면, 어떤 영화가 훌륭한 지 변별하지 못한다. 안티테제(모순)는 규칙(모든 영화는 훌륭하다)을 입증하는 예외다. (형편없다는) 안티테제가 없다면, (훌륭하다는) 테제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안티테제는 테제에서 분기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적으로 선행하며, 테제가 존립할 수 있는 근거다.

즉, 오랑캐나 유태인이라는 이질적인 존재(모순)가 없다면, 우리 민족이나 위대한 게르만 민족이라는 자기 인식 또한 없다. 따라서 히틀러나 독재정권이야말로 유태인이나 빨갱이를 필요로 한다. 유태인은 실체가 있는 민족(자기동일성) 외부의 존재이지만, 해방정국에서 한국전쟁을 지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빨갱이는 우리 내부에 아무런 실체가 없는데도 살의(殺意)에 가까운 증오의 대상으로 존재해 왔다.

이런 동일성의 내적 조건을 규정하는 예외에 의한 종합이라는 방식말고, 제3의 방식이라는 것도 있다.

  • 테제 : 당신을 사랑한다.(진실)
  • 안티테제 : 당신을 미워한다.(부인)
  • 종합 : 사랑한다는 진실이 자신을 압도하여, 부인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이와 같은 부인은 헤겔의 ‘동일성의 변증법’이나 지젝의 ‘차이의 변증법’을 만들어 내기 위한 안티테제가 아니다. 미워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지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고통과 쾌락이 포개져 있는 ‘향락의 변증법’을 그려낸다.

사랑은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이다. 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외줄기의 감정이 아니다. 여러 타래의 복합적인 감정과 본능 그리고 성적 충동 따위가 DNA처럼 꼬여있는 법이다. 사랑에 빠지면,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또 자신 속에서 분출하려는 외설적인 욕망을 마주한다. 과연 이것이 사랑일까? 견딜 수 없는 욕망에 다리를 비비꼬지만, 수치심 때문에 드러낼 수 없다. 상대를 더듬고, 숨막힐 정도로 껴안고, 입 맞추고 깨물어주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지같은 욕망을 불러 일으킨 상대 또한 자신과 같은 욕망(사랑)이 있는 것인지, 있다면 뜨거운지, 차가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인정하자니 미칠 것 같고,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불러일으킨 그/그녀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것을 넘어 그녀/그를 미워할 수도 있다.

사랑(욕망)이 강렬할수록, 부인은 더욱 강한 법이다. 그래서 못견디게 사랑했던 상대방의 느닷없는 첫 키스가 (부끄럽게도 자신이 너무 간절히 원했던 탓에) 충격적이라서 상대방을 밀쳐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의 중핵에 다다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순수하며 또한 외설적인, 그래서 벌거벗은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상대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 사랑이다.

E#-3. 말없는 여자

그녀는 말이 없었다. 몇 시간동안 수다를 떨었다 해도 다를 것이 없다. 몇개월을 만났지만, 어렸을 적에 그녀가 어떤 학교를 다녔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부모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지, 앞날의 꿈이 무엇인지 들은 적이 없다. 그녀에겐 아무런 역사가 없다. 뭔가 내가 물으면, 웃기만 했다. 그녀는 그저 막막했고, 매일 만나도 길에서 문득 마주친 사람처럼 아무런 맥락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하얗게 몰랐다.

사랑한다고 나에게 말해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아무런 이력도, 맥락도 없이, 그렇게 외롭게 사랑에 다다를 수 없었던 탓에…

그렇게 그녀는 말이 없었다.

E#-4. 色…

여자를 性의 관점으로 소인수분해하여 드디어 남는 그 단어가 色이라고 했을 때, 그 색이란 무슨 색이었을까?

붉은 피가 모세혈관의 끝에서 하얀 피하지방 밑으로 사라지는 모딜리아니적인 색 만으로는 부족하다. 연분홍빛이 백색으로 사멸할 즈음, 청동의 녹과 같은 정맥이 살 밑으로 언듯 비치고 각각의 색들이 중첩되면 비로소 무르익은 살색이 된다. 그래야만 클림트적이며 더욱 관능적인 냄새가 우러나는 법이다. 그 색은 허벅지의 안쪽이나 팔과 겨드랑이처럼 주름진 방향에서 어두워지는데, 흐린 날에는 도자기의 유백색의 그늘로 가라앉기도 하고, 화창한 날이면 살빛 위로 간간히 뿌려진 녹청 혹은 노란 모자이크 조각들이 뒤섞여 반짝거리는 것 같다.

E#-5. 허울

“환상이란 이런 허울(semblance)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안쪽의 실재를 은폐하고 있는 가면이 아니라, 가면 뒤에 뭔가 숨겨져 있다는 착각이다” 1HOW TO READ 라캉, 177쪽라고 지젝은 말한다. 만약 그것이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숨기기 위한 가면이라면 그것은 허울이 아닌 것인가?

하지만 내가 허울이라고 부르는 것은 라캉의 ‘정초적 말'(founding word)과 관련된다. 우리는 일상에서 타자(모르는 사람), 그 불가해한 심연을 맞이한다. 그 심연의 실체는 타자성이 지닌 기괴함과 어두움으로 물들어 있다. “이 남자/여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만큼 자신 속의 그 괴물과 같은 힘으로 나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관계를 정립하여야 한다.” 그래서 “당신은 나의 애인/친구이다.”라고 선포한다. 이러한 정초적인 말을 통하여 서로 간의 상징적 동일성을 구성하고 서로 공언된 존재(애인/친구)를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안다고 하며, 타자가 지닌 불가해한 심연을 회피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허울이란 이러한 ‘정초적 말’과 같은 상호 간에 아무런 선언적 의례없이, 홀로 일방적으로 관계를 정립하는 것 중 하나를 말한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자기 혼자 남몰래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짝사랑일테지만, 터무니없이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치장할 경우, 그것이야말로 허울이다. 짝사랑의 경우 타자성은 아름다운 환상 2단테의 뻬아트리체나 짝사랑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환상이다에 의하여 가려지지만, 허울의 경우 안에 알지 못할 뭔가 3정초적 말로 선언되지 않았기에 무정형의 기괴함으로 뒤덮힌 타자라는 괴물 감춰져 있을 것이라는 착각 탓에 마주하기가 더욱 무서울 수 밖에 없다.

E#-6. 가을 수심(秋思)

마른 덩쿨, 앙상한 나무, 저녁 갈가마귀,
작은 다리, 개울, 민가,
황량한 길, 찬 바람, 비쩍마른 말.
저녁 해는 서쪽으로 기우는 데…
애끓는 이 하늘 가에 서 있다. 4枯藤老樹昏鴉, 小橋流水人家, 古道西風瘦馬. 夕陽西下, 斷腸人在天涯.

이는 元曲(원나라 때 희곡)이다. 천정사(天淨沙)란 한 때 유행했던 노래 이름(曲牌名)다. 당시에는 한 곡의 노래에 여러 가사를 붙여 불렀다. 이제는 노래는 사라지고 가사들만 남았다. 여기의 가을 수심(秋思)은 ‘천정사’에 단 대표적인 가사(小令)로 마치원(馬致遠)이 지었다. 문장이 되지 않는 명사들의 나열 만으로도 늦가을의 외롭고 시린 심사가 그냥 드러난다.

E#-7. 가을과 영원

어렸을 적에는 크고 아득한 것을 바랐습니다. 자신은 유한하면서도, 또 유한함이 베푼 한 조각조차 온전케 하지 못하면서 어쩌자고 그랬을까요.

당신을 떠난 한참 후 였습니다. 사무실 난로 밑에서 귀퉁이가 타 들어간 잡지를 보았습니다. 펼친 잡지에는 프랑시스 잠의 ‘애가 14’ 5

내 사랑이여 하고 당신이 말하면
내 사랑이여 라고 나는 대답했지요

눈이 내리네요 하고 당신이 말하면
눈이 내리네요 라고 나는 대답했지요

아직도 하고 당신이 말하면
아직도 라고 나는 대답했지요

이렇게 하고 당신이 말하면
이렇게 라고 나는 대답했지요

그 후 당신은 말했지 사랑해요
나는 대답했지 나는 당신보다 더 라고

여름도 가는군요 당신이 내게 말하고
이제 가을이군요 라고 나는 대답했지요

그리고 우리들의 말도 달라졌지요

어느 날 마침내 당신은 말하기를
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데…

그래서 나는 대답했지요
또 한번 말해 봐요…
다시 또 한 번…

(그것은 어느 거대한 가을 날 노을이 눈 부시던 저녁이었다.)

< 애가 14 / 프랑시스 잠 >

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두운 난로가에 쪼그리고 앉아 몇 번이나 읽었습니다.

한숨으로 읽기를 마쳤을 때, 겨울 창에 아침 햇살이 들어차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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