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 간 일들

1. 아프진 않지만 안 아프다고 할 수도 없는…

여름이 시작한 6월부터 몸의 한 쪽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무엇이, 몸 어디를, 어떻게 깍아먹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뱃 속 어딘가에 문제가 있고. 그 때문에 등에 통증이 점점 켜져가는 것이 아닐까 했을 때, 대상포진이 생겨났다. 아파서 죽는다던데, 견딜만 했고 포진이 생긴 범위도 작았다. 약을 먹자 대상포진은 곧 나았다. 하지만 항바이러스약과 함께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딸려들어온 진통제와 항히스타민제 그리고 수면안정제 따위로 까무룩 잠이 들고 기운을 차리지 못하여 일주일 가까이 자리에서 누워 지냈다. 가까운 슈퍼에 다녀오는 것조차 숨찼고, 몸 속에서 탄내가 허파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일주일 넘게 누워 있었지만 몸을 추수를 수 없었다. 겨우 일어났지만, 이미 몸은 축이 났다. 다시는 아프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잠이 문제인 것 같았다. 그러잖아도 짧았던 잠은 올해에는 자정에 잠이 들어도 새벽 두시 반이면 불쑥 깨어났고, 한 두시간 둥안 TV를 켜 놓는다거나, 책을 읽거나, 딴 짓을 한 뒤,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낮엔 졸았다.

아무래도 잠이 문제인 것 같다고, 잠이 드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두 세시간 자고 난 후 문득 깨어난다, 미치겠다고 했다. 의사는 나에게 맞을 것 같다며, ‘쿠에타틴정 12.5mg(major 트란퀼라이저)’을 처방해 줬다. 한번 먹어보고 경과를 보자고 했다. 약을 먹고 11시경에 잠이 들었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어서 문득 깨어났다. 깨어나 각성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지옥을 경험했다. 모든 말초신경과 모세혈관들이 아리아리했다. 그 느낌의 주소는 몸 속이 아니라, 몸 바깥 알 수 없는 어디였다. 숨결의 마디 마디를 면도날로 저미고 그 사이로 설탕과 소금을 뿌려대는 것 같은 느낌은 밤새 계속될 것 같았다. 견딜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시간이 마치 저 깊은 바다 속에서 수면에 이르기까지의 숨넘어가는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몽롱한 의식을 각성 상태로 빨리 전환하기 위해서 불을 켜고, TV를 켠 후, 깊은 숨을 토해냈다. 의식과 다른 감각들이 살아나자, 그 느낌은 둔감해지고, 견딜 만 했다. 그 기분나쁜 느낌에서 벗어날 때까지 다시 잠에 들 수 없었다. 새벽 4~5시가 돼서야, TV를 켜 놓은 채, 간신히 잠에 들었고, 다음 날에 한번 더 약을 먹었을 때는 지옥같은 느낌은 없었지만, 문득 깨어나는 증세는 같았다. 즉 약효가 없었다. 의사는 그럼 수면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수면검사센터로 가서, 각종 센서를 머리에 부착하고 복부에는 호흡측정장치 그리고 손가락 끝에는 맥박과 산소포화도를 재는 장치를 치렁치렁 달고, 밤새 나를 비추는 카메라 앞에 누워 뒤척였다. 나의 맥박과 호흡과 뇌파와 뒤척임들이 전선을 타고 흘러가 기록지에 각종 파형을 밤새도록 그렸다.

결과는 수면 무호흡/저호흡지수(AHI지수)가 54.3이라고 한다. 정상이 5 이하, 경증이 5~15, 중등도가 15~30, 중증이 30 이상이라고 한다. 나의 AHI지수는 극히 심각했다. 그러다 보니 혈중 산소포화도가 79%라는 것이다.

코를 별로 골지 않는다고 하니, 나와 같은 AHI지수라면 코도 골지 않는다고 한다. 수면제를 처방해도 깨어난다고 한다. 나에게 있어 잔다는 것은 ‘물 속에 빠져 있는 상태’라고 한다. 질식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수면제의 약효 때문에 계속 잠을 잔다면, 질식해서 죽을 수도 있다. 살기 위해서 나의 뇌는 각성 대기상태이며, 몸에 이상이 생기면 살기 위해서 문득 깨어난다는 것이다.

내일을 위해서 자야 한다는데, 나는 살기 위해서 깨어나야 한다.

자면서도 숨을 정상적으로 쉬자면 양압기가 필요했다.

양압기(陽壓機)의 압력을 처방받기 위하여 다시 한번 각종 장치를 부착하고 양압기를 쓰고 수면검사를 해야 했다. 양압기를 인수하기까지 두 주간동안 체력은 더 떨어졌다.

이제 밤이 오면, 양압기를 뒤집어 쓴 후 공기가 주입되는 호스를 둘둘 말고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 양압기에 뜨는 AHI지수(Event)를 보면, 높으면 5~6, 낮으면 0에 수렴하기도 한다.

아직도 체력은 바닥상태이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도 수면시간은 길지 않고 두세시간을 자고 난 후 다시 깨어나고 다시 자곤 한다.

아프진 않지만 안 아프다고 할 수도 없는 나날들이다.

2. 책들…

과연 책이란 무엇일까. 각종 기호와 텍스트와 이미지를 모으고 기록하고 읽을 수 있도록 저장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며칠동안 슬라보예 지젝과 씨름을 했다. 헤겔의 차이 변증법과 라캉을 둘러싼 주체의 해석문제, 실재계의 텅빔이라는 난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계는 결국 기표가 기의와 연결점을 찾지 못하여 의미가 정박하지 못한 채 영원히 표류하는 것이라면, 기호와 텍스트 그리고 이미지 또한 해체되고 영원히 차연될 뿐이라는 것, 그래서 책의 기호와 텍스트와 이미지는 바스러져 내리고 책 또한 해체되어 먼지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나는 지젝의 저작들을 이해하기 보다는 무엇을 위해서, 무슨 목적으로 지젝은 헤겔의 동일성 변증법을 차이의 변증법으로 비틀기 시도를 했으며, 라캉의 그 기괴한 실재계를 들여다보려고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살펴보기 전에 잠시 여유를 두기 위해, 2006.10월에 사두었지만, 책의 두께와 난해함 때문에 읽기를 미루고 또 미루었던 ‘천 개의 고원’을 펼쳤다.

두서없이 아무 편이나 읽어도 된다고 하기에, 앞에서 부터 읽기보다, 읽기 쉽다는 2편,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와 6편,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읽었다.

한 면 정도를 읽고 나자, 나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자본주의와 분열증2’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이해하려고 하면 조현병1정신분열증의 새로운 명칭이다. 앞에서 지옥을 경험했다고 한 ‘쿠에타틴정 12.5mg(major 트란퀼라이저)’은 조현병 치료에 쓰이는 강력신경안정제이나 수면안정제 등에 사용한다.에 걸리고 말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정신나간 책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음악을 듣는 것처럼 읽기로 했다. 앞의 문장은 지나간 앞의 문장이며, 지금 읽는 글귀는 지금 들리는 글귀다. 앞 뒤 문장 간 시계열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맥락 따윈 신경쓰지 말자. 그랬더니 읽을 만 했을 뿐 아니라, 재미도 있다. 의미와 문장들이 피어나고 지는 순간 순간들이 화음을 이루더니 한편이 끝났다.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토록 빽빽한 문장 속을 거쳐왔음에도,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글의 내용이나 구절들이 아니라, 낱말들의 질감과 문장들의 표면의 거칠기 그리고 문장 위를 뒤덮는 오해와 망상들의 협주들 뿐이었다.

이런 읽기 또한 즐거운 것이 아닐까. 이 따위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미쳐버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심심할 때마다 한편 한편씩 읽어서 1,000쪽(본문만 976쪽, 속 표지와 인덱스, 해설, 용어대조표 등을 포함하면 1,016쪽) 짜리 이 책을 다 읽어볼까 싶다. 그런데 ‘천 개의 고원’ 중 한 개의 고원이라도 넘거나 건너갈 수 있을까?

3. 사연들

섬과 안개‘를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기억의 실체에 좀더 다가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시 쓴 것이 역사적으로 당시의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논리적인 필연에 가깝다. 그런데 현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에 가까울수록 더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필귀정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목도하기란 어렵다. 현실은 우발적이다. 여기에서 우발적이라는 것은 아무런 맥락없이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연기적이라는 뜻이다. 논리적이라거나 인과적이라는 것은 “~이 없다는 것으로 가정할 때”, “다른 조건은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따위로 사태를, 실험실 조건처럼 A라는 원인을 함수에 투입하면 B라는 결과값이 나오도록, 단순화했다는 뜻이다. 우주가 탄생했을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쌓이고 쌓인 인연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지금의 나(我)는 없다. 지금의 나 또한 어떤 실체가 없다.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엠마 샤플란의 ‘La Notte Etterna’을 틀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 기분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我)와 나의 기분조차 어떠한 실체나 항상성이 없다. 이렇게 세상은 재현불가능한 곳이자 거품과 같은 곳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 과거 또한 현재의 가설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구성될 성질의 것 또한 아니다.

그런데 y는 어쩌자고 그렇게 먼 곳까지 흘러간 것일까? 그것도 다 인연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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