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같은 영화인 '율리시스의 시선, 1995' 중 마지막 독백은 이러하다.
오디세우스(로마명 율리시스)는 트로이로 간 지 20년 만에 아내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아내 페넬로페와 결혼을 하고 왕이 되려하는 구혼자들 때문에, 아내조차 모르게 변장한 채 이타카로 귀환한다.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페넬로페와 만나지만, 아내는 오디세우스가 그녀의 남편임을 아직도 의심한다. 그래서 페넬로페는 "우리 침대를 원래 있던 곳으로 옮겨놓으라"고 주문한다. 오디세우스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침대는 방에서 자라나고 있던 나무를 베어 만든 것으로, 뿌리가 땅에 박혀 있어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재회한다.
1994년 늦은 가을의 여행은, 단벌의 옷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살아갈 수 없는 발칸의 현실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35년만에 돌아온 나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핀도스 산맥을 넘었던 탓에 옷은 술과 땀, 그리고 먼지에 절었다. 역과 이정마다 추억들로 질척거렸고, 여인과 관계를 갖거나 사람과 우의를 맺었던 탓에,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발칸의 현실은 세기와 세기에 걸쳐 종교와 민족이 서로를 저주하고, 세계대전이 휩쓸고 지면서 왕조와 체제가 엇갈린 탓에 사람들은 망명과 피난을 선택하거나, 머물지 못하고 그 곳을 떠돌고 있었다. 저격병은 조준경 위로 나타난 값싼 목숨의 뒷덜미를 향하여 탕! 방아쇠를 당기곤 하는 그 땅, 조물주가 만든 큰 혼돈 속을 뚫고, 마나키스 형제가 남긴 현상조차 되지 않은 세 권의 필름을 찾아나설 수 밖에 없었다. 가는 길마다, 마나키스 형제가 겪었던 개인사와 나의 젊은 추억이 착잡하게 얽히고, 내전과 포격으로 그 곳의 현실은 뼈마디를 꺾는 것처럼 아팠다. 대지는 황폐했고, 문명은 무너져 내렸고, 잎이 진 늦가을 풍경은 잿빛이었다. 적의 눈길과 총질이 두려운 사람들은 햇빛보다 안개를 기다리며, 폐허의 그늘 밑에서 죽어가야 할 자신의 삶의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마나키스 형제의 미현상 필름을 찾기 위하여, 그리스의 플로리나에서 택시를 타고 출발한 나는, 알바니아의 고리치아, 마케도니아의 모나스티르에서 열차를 타고 스코페, 불가리아의 소피아, 노비 이스카르, 체르벤 디아크, 니코폴을 지난 후, 다뉴브 다리를 건넌다. 루마니아의 터뉴 마그렐리와 로시오리 드 베디를 지나 부쿠레슈티에서 환승을 한 후 흑해의 콘스탄차에 당도한다. 하지만 야나키스가 유배되었던 필리포폴리스는 가지 못했다. 당연히 에게해로 흐른다는 에브로스강 또한 보지 못한다. 매달리던 여자를 콘스탄차에 버려두고 레닌의 거대하지만 조잡한 이데올로기로 급조된 전신상이 실린 바지선에 올랐을 때만 해도, 나는 여행이 아픈 것임을 알지 못했다. 콘스탄차에서 출항한 바지선은 바다 곁으로 난 수로를 따라 다뉴브강으로 올라갔다. 다뉴브강에서 강에 흐름을 있다는 것을 잊었다. 다뉴브는 게르마니아(독일)에서 동쪽으로 흘러 흑해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시속 5노트인 바지선의 속도로 거꾸로 게르마니아로 흐르는 것 같았다. 역류하는 강의 이름이 도나우일지도 모른다. 강의 길이는 2,860km, 해발 3~4천m에서 강물이 발원한다고 해도 강의 경사도는 제로에 수렴하는 0.001도이다. 어디에선가 물이 차오르고 어디론가 물이 빠지는 것일 뿐, 결코 흐르는 것이 아니다. 승선한 지 3~4일이 지날 무렵, 트란실바니아 알프스와 발칸산맥 사이의 협곡, 아이언 게이트(鐵門)에 당도했다. 밤이었고, 거기서 부터 세르비아였다. 3국 국경수비대의 경비선이 바지선 위로 써치 라이트를 비추며, 어디로 가며, 누가 탔느냐고 물었다. 게르마니아로 가며, 아무도 없다고 했다. 날이 밝았다. 나는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베오그라드는 음울했지만, 별 일 없어보였다. 하지만 보스니아 전선에 일이 있는지 특파원들이 죽치는 도시의 술집은 소란스러웠다. 영화보관소 소장을 소개시켜 준 친구 니코는 사라예보로 간다는 나에게 허가증이 없으니 사바 강과 지류를 타고 가라고 했다. 사바 강을 거쳐 드리나 강을 거슬러 올라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사라예보 포위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건물들은 포격에 무너졌고, 폐허의 그림자 속에서만 사람들은 간신히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저격수가 도시의 이곳 저곳에서 도로 쪽으로 총구를 내놓고, 조준경 위에 시민이 보이면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Pazite, Snajper!’(스나이퍼 조심)이라는 푯말들이 시내 곳곳에 보였다. 마침내 나는 필름을 보관 하고 있는 이볼 레비를 만났다. 그에게 "필름을 가둬둘 권리가 없다"고 소리치며, 여행에 지친 나는 포격당한 건물처럼 무너졌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90년 가까이 현상이 불가했던 필름은 마침내 현상되어, 금세기 초부터 갇혀있던 '시선'이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 날(1994년 12월 3일), 시내에는 안개가 끼었다. 안개 탓에 저격병도 어쩔 수 없는 이 날, 사라예보 시내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시민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춤추거나, 연극무대가 열렸다. 이볼 레비의 가족들과 나는 강 가로 산책을 갔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안’ 병력인지, '발칸의 도살자 밀로세비치'의 부하들인지 모를 병력이 강 가의 안개 밑에 움크리고 있었다. 나를 남겨두고 안개 속으로 걸어들어간 이볼 레비의 가족들은 “조물주가 만든 혼돈” 탓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에게 학살 당하고 만다.
나는 피로와 눈물과 배신을 뒤로 하고 세 권의 필름을 학살의 땅에서 구출해 나온다. ‘아비델라 마을의 베짜는 사람들, 1905’이 그것이다.
S-1.
35년 동안 망명했던 나는 플로리나(그리스 마케도니아 주의 도시)에 도착한다. 1994년 겨울이었다. 거기가 종착역일 줄 알았다. 도착했을 때, 그 작은 도시는 나의 영화 때문에 들끓고 있었다. 종교단체와 광신자들은 나의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시민들은 추위와 비로 범벅이 된 거리에서 우산을 든 채, 스피커조차 없이 거친 벽 위에 뿌려지는 희미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도 나오지 않는 화면을 그들은 바라보고 있지만, 정작 나는 영화 때문에 온 것은 아니다. '밀토스와 야나키스 마나키스 형제'의 첫 작품, 현상이 안된 채 남아있다는 세권의 필름을 찾으러 왔다. 하지만 필름은 없었다. 대신 친구는 "시장은 겁을 내며 회피하고, 주민들은 둘로 갈라져 있고, 언론은 자네를 찾으려고 해"라며 택시를 잡아주었을 뿐이다. 택시를 타려고 할 때, 광신자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내려왔고, 시민들은 우산을 펼친 채 골목을 돌아나왔다. 그 둘 사이로 시위진압경찰이 군화발 소리를 내며 대오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 사랑했던, 사랑했을 지도 모르나, 기차역에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S-1(그녀 1)가 홀로 시위대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간 나는 "돌아왔다고 말하고 싶은데, 뭔가가 나를 붙잡는군요. 여행은 안 끝났소, 아직..."이라고 울먹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 곁을 떠나갔다. 할 수 없이 택시에 올라 무작정 필름을 찾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택시는 알바니아 국경에서 멈췄다. 할머니가 내게 다가와 고리치아(코르처 : 알바니아)의 동생 집에 간다며 태워달라고 한다. 그녀는 큰 가방을 들고 있다. 내전 이후로는 동생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것이 벌써 47년이 되었다며, 그리스에선 자신을 난민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가방 안에는 "상상할 수 있는 건 다 있죠. 산 것도 있고 훔친 것도 있고, 가스 버너, 통조림, 청바지, 담배, TV, 밀가루..."등이 있다고 했다. 국경을 넘었다. 우리가 도착한 알바니아에는 눈과 고요만이 있었다. 할머니를 고리치아 시내에 내려주었다. 그 곳은 와 본적이 없던 것처럼 풍경이 까마득하다. 택시에서 내린 할머니는 두려움 탓에 두리번거릴 뿐 이었지만, 나는 갈 길이 바빴다. 하지만 택시는 핀도스 산맥의 중턱에서 폭설 때문에 멈춰선다. "저기 산너머가 스코페(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의 국경입니다. 버스로 두 시간이면, 모나스티르(마케도니아, 현 비톨라)에 도착을 하죠." 택시운전사는 그렇게 말한 뒤, "친구가 되고 싶군요. 우리 마을에선 친구가 되려면, 같은 술잔으로 마시고 같은 노래를 들어야 돼요"라며 나에게 술병을 건냈다. "그리스는 죽어가고 있소. 우린 죽어 가는 사람들이고, 깨진 동상들 속에서 3천 년간의 우리 시대는 다 끝이 난 거요"라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택시 안에서 노숙을 했다.
S-2.
나는 모나스티르로 갔다. 그 곳의 영화보관소에서 S-2(그녀 2)에게 "아테네 영화보관소에서 마나키스 형제의 기록을 조사하라고 해서 왔다"고 나를 소개했다. "마나키스 형제의 미현상 필름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전부 세 권이죠"라고 했다. 그녀는 스코페에 내가 찾는 것만 빼고 다른 자료들은 다 있다고 했다. 나를 따라 나선 S-2와 함께 열차에 올랐다. 그 열차는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스코페를 지나, 불가리아의 소피아를 거쳐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로 가는 특급열차였다. 열차가 스코페에 정차했지만, 나는 내리지 않았다. S-2는 스코페인데 내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대신 그녀에게 "2년 전 한여름에 촬영장을 물색하러 델로스에 갔었다"고 했다. 그 적막한 곳에서 올리브 고목 나무가 쓰러졌고 그 바람에 땅에 묻혀 있던 아폴로 흉상이 드러났다. 걸어가다가 아폴로의 출생지라는 그 전설의 장소에 이르렀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눌렀다. 하지만 사진들은 온통 까맣게 나왔다. 사진을 계속 찍었지만, 마찬가지로 까맣게 나왔다. 이 세상에서 블랙홀로 사라지듯이... 태양이 바다 너머로 저물면서 나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화보관소에서 제안을 받고 나는 흥분했다. 탈출구였거든요. 뭔가를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S-2에게 말했다. 나의 표정 때문인지 목소리 탓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격렬하게 포옹했고, 서로의 입술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열차는 불가리아 국경에서 정차했다. 불가리아 당국은 내 여권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열차에서 내린 나는, 야나키스가 사형 대신 감형을 받아 필리포폴리스로 추방된 것을 기억해 냈다. 여권을 살펴 본 불가리아 당국은 나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필리포폴리스로 간다고 했다. 불가리아 당국은 이제 '플로브디프'라고 부른다고 정정하면서 세관을 통과시켜주었다. S-2는 그럼 "부쿠레슈티, 필리포폴리스 중 어디로 가실거죠"라고 물었다. 나는 무심결에 "망명기간 중에 야나키스는 매일 여기에서 강을 바라봤지. 에게해로 흐르는 이 에브로스 강(마리차 강)을 말이오"라고 대답했다. 다시 열차에 올랐다. S-2는 "무슨 강이라고요?"라고 물은 뒤, "이해를 못하겠어요. 내가 왜 이럴까요? 안아 줘요. 날 구해 줘요"라고 다급하게 매달렸다. 열차는 필리포폴리스가 아닌 소피아를 지났고, 노비 이스카르, 체르벤 디아크, 니코폴을 지나 다뉴브 다리를 지나 루마니아로 들어섰다. 터뉴 마그렐리와 로시오리 드 베디를 지난 후 부쿠레슈티에 도착했다. S-2는 불가리아가 루마니아에게 마나키스 형제의 필름을 넘기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S-2는 "그런데 왜 왔죠"라고 나에게 물었다. "발 길이 닿는대로 왔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1944년 섣달 그믐에 어린 나는 부크레슈티에서 어머니를 만나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콘스탄차로 갔다. 콘스탄차에서 2차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희망을 간직한 채, 친척, 가족들과 함께 1945년을 맞이했다. 1948년에는 최후의 국왕 미하일이 폐위되면서 음울한 분위기 속에 새해를 맞이하더니,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1950년을 맞이하면서 그리스로 이민을 가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사진을 찍는다. 콘스탄차에서 S-2와 함께 밤을 보낸 나는 부두로 나갔다. 부두에서는 공산정권 몰락 후 해체된 거대한 레닌 동상을 바지선에 싣고 있었다. 나는 배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배는 오데사에서 출항하여 이 곳 콘스탄차를 들러 다뉴브강을 따라 약 2천 8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게르마니아(독일)로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상은 수집가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배를 타고 세르비아로 가려고 한다. S-2는 내전 중인 것을 모르냐고 묻고 여행용품을 사오겠다고 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울었다. 왜 우냐고 묻는 그녀에게 "내가 우는 건...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서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물건을 사러 간 사이, 나는 출항하는 배에 다급하게 올랐다. S-2는 멀리에서 떠나는 내 모습을 바라본 것 같기도 하다.
바지선은 다뉴브강을 거슬러 5노트 정도의 속도로 나아갔다. 바지선에 실린 레닌 동상을 보기 위하여 강변에는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일부는 모자를 벗고 동상에 묵념을 올리기도 했다. 바지선은 천킬로 이상을 역행하여 세르비아 루마니아 사이의 협곡인 철문(Iron Gate)을 지나 세르비아로 들어선다. 써치라이트를 켠 3국 국경수비대의 경비를 뜷고 국경을 넘은 배는 베오그라드에 정박했다. 부두에서 친구 니코를 만났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취재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베오그라드 영화보관소장 요비지차를 만났다. 그는 미현상된 필름을 동생 밀토스에게서 샀다고 했다. 하지만 20년 동안 그 필름을 현상할 수 없었다. 몇년 전 사라예보에 있는 동료이자, 현상 전문가가 가져갔는데, 그만 1992년에 전쟁이 터졌다. 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그를 뒤로 하고 사라예보로 가기로 했다. 술집에서는 보스니아 전선에 무슨 일이 있는 지 기자들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니코에게 "자네들 언론인들은 교전지역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다. "기삿거리나 뉴스가 필요한 대부분의 특파원들은 베오그라드 외곽의 군부대에 가서는 기사를 날조하지, 직접 교전지역에 들어가는 사람은 몇 명 없다'고 했다. 나는 사라예보로 가겠다고 헀다. 제 정신이냐고 묻던 그는 말했다. "허가증이 없으니 강을 이용하게. 배로 사바 강을 따라 지류를 타고 사라예보로 가게. 유고에는 강이 많지. 위험하니 조심하고!"
S-3.
거룻배에서 S-3(그녀 3)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그녀는 나를 그레코라고 했다. 필리포폴리스 경찰이 나를 찾고 있다고 했다. 배가 호수 가인지 강 가인지에 이르렀는데, 물과 언덕 위에 집들은 모두 잿더미였다. 거기가 필리포폴리스라고 했고 강의 이름을 에브로스라고 했다. 그녀에게 이끌려 들어간 집 또한 불에 탔으나, 그녀는 저녁을 마련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벌거벗고 있었다. S-3는 강 가에서 더러운 내 옷을 빨아 불에 탄 나무가지 위에 널었다. 총성이 울렸다. 그녀는 다급히 집으로 돌아와 총성이 울린 곳을 가리킨 후, 벌거벗은 내 몸을 보고 웃음 지었다. 나무궤에서 다른 사람의 옷을 꺼내주었다. 그리고 강 가로 나가 거룻배의 바닥에 도끼질을 해댔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나는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녀는 "여보"라며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배가 부두에 부딪혔을 때, 나는 배 밑바닥에 잠들어 있었다. 한 번, 두 번 부딪히더니, 배는 멈췄다. 잠시 철썩대는 물소리만 들렸고,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깊은 땅 속에서 울리는 듯한 공허한 소리였다. 머리를 들어보니 사방에서 대형 건물들이 폭격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건물들의 시커먼 창문들이 나를 보는 것 같았고, 지평선에는 검은 구름이 자욱했다."
S-4.
여기가 사라예보냐는 나의 물음 저 멀리에서 포성이 울렸다. 사람들은 내 질문에 대답없이 짐을 든 채 이곳 저곳으로 도망쳤다. 두려움은 포성과 총성과 더불어 마음 속에서 울려퍼졌기에 사람들은 여기, 두려움을 피해서 무작정, 어디엔가로 가야했다. 나 또한 사람들이 포성을 피하여 꿈틀대는 흐름을 따라, 결국 이볼 레비가 있는 곳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저는... 멀리서 왔습니다. 당신이 소장하고 계신 마나키스 형제의 미현상 필름 3권을 찾아왔습니다." 이볼 레비는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소"라고 놀라면서도, "그 필름을 갖게 되었을 때, 난 흥분했죠. 오랜 화학 공식을 찾는 도전이었죠. 여러 배합을 여섯 달간 시도했고, 계속해서 용액을 바꾸었죠. 밤새도록 좁은 현상소에서 액이 내는 소리에 귀기울였소. 어떤 때는 노래처럼 들렸소. 마치 노래처럼... 정말이지, 노래 같았어요"라고 말한다. 일이 잘 진행되어가던 중 전쟁이 나서, 그는 현상작업을 그만 두고 영화보관소를 지켜야만 했다고 한다.
지친 나는 그에게 "당신에게는 권리가 없어요. 가둬둘 권리가 없어요. 그 시선을 말이오. 그건 전쟁과 광기와 죽음이니까요.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당신은 권리가 없어요"라며 울먹였다. 이불 레비는 "지치고 마음이 상했군. 여기에 누워요. 잠이 필요할 테니 쉬어요. 자야 해요. 지금은 자요, 어서 누워요. 얘기는 내일 합시다"고 했다. 그는 나 때문에 마지막 시도를 한 것 같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볼 레비의 딸인 S-4(그녀 4)가 아빠를 찾아왔다. 그녀는 "당신은... 아주 낯이 익어요. 예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 같아요"라고 말한 후, 그런 말을 한 것이 쑥스러운 듯 집에서 아빠를 기다린다고 전해달라며 떠났다. 그때 실험실 안의 용액이 노래를 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볼 레비가 돌아왔을 때, 용액이 노래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 날은 1994년 12월 3일이었다. 실험실에서 나온 이볼 레비는 몇 시간 만 있으면 현상이 끝날 것이라고 했다.
거리에서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렸는 데 한참이 되었던 것 같다. 이볼 레비는 "난 안개를 느꼈어요. 이곳에서는 안개가 최고의 친구지요. 이상한 말이죠?" 하지만 "이 도시는 안개가 낄 때에만 정상적으로 된답니다. 저격병들이 돌아가 버리니까." 그리고 "안개 낀 날이 이곳에서는 축제일이니 축하를 합시다." "필름이 있으니 우리도 축하하죠. 당신 말대로 금세기 초부터 갇혀 있던 '시선'이 드디어 해방이 되는 것은 중요한 사건이니까요."
우리가 밖으로 나갔을 때, 폭격에 지친 사라예보를 안개가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거리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한쪽에서는로미오와 줄리엣의 2막 2장 발코니 장면을 하고 있었다. "로미오, 로미오, 왜 당신은 로미오죠?" 피로가 가시지 않았는지 그 소리를 들은 나는 "헤어짐은 달콤한 슬픔이니, 날이 샐 때까지 안녕이란 인사만 하겠어요. 당신의 두 눈에는 잠이, 가슴에는 평화가 깃들기를! 내가 그 잠과 평화가 되어 쉬고 싶소"라고 읊고 있었다.
그때 S-4가 춤추시겠냐고 물었다. 나와 함께 춤을 추는 그녀에게 날 기다리겠냐고 물었다. S-4는 "고향을 싫어하는 것은 나쁜 건가요? 겨울에는 비와 진흙 때문에, 여름에는 먼지로 여기가 숨막혀요"라고 말했다. 나는 "돌아와서 당신을 데리고 가겠소"라고 말하며 기차소리가 들린다, 가야 한다고 했다. S-4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다시 오겠다고 말해달라고 했다.
안개 속에서 나타난 이볼 레비는 "안개 낀 날은 축제일이라는 말을 이제 알 것 같소?"라고 말하며 가족들과 강변으로 갔다. 비데와 다샤, 아이들이 안개 속에 사라졌고, 엄마와 S-4(나오미라고 했다)가 안개 속으로 아이를 찾으러 들어갔다. 그때 안개 속 저쪽에서 거친 트럭소리가 났고 군화와 쇠붙이 등이 철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강 가를 산책했을 뿐이에요." 아이들 엄마의 소리가 났다. 이볼 레비가 나에게 "여기 있어요. 무슨 일인지 보고 오겠어요"라며 안개 속으로 들어간 후, "강 가를 산책하고 있었어요"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물주가 만든 큰 혼돈이오. 선생, 큰 혼돈 말이오!"라는 굵은 목소리가 들린 후, 안개 속에서는 공기를 뒤집는 역겨운 총소리가 탕! 탕! 탕! 울렸다. 그때마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또 다른 총성이 울렸다.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학살에 대하여 "이럴 수 밖에 없소, 다 조물주가 만든 혼돈이니까"라고 변명처럼 투덜댔다. 그리고 트럭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엔진의 비린 시동소리가 났다. 나는 안개 속으로 주춤 주춤 걸어들어갔다. 거기에는 아이들의 죽엄과 이볼 레비와 S-4의 아득한 죽엄 위로 안개가 스쳐지나고 있었다.
내가 피로와 눈물과 배신을 뒤로 하고 그 학살의 현장에서 가져온 세권의 필름은 '그리스, 아베델라의 마을의 베짜는 사람들, 1905'이라고 한다.
S-5
S-5, 당신은 테오가 그렸던 20세기의 끝자락, 1994년과 내가 헤매었던 발칸산맥과 핀도스산맥, 스타라플라니나 산맥이 종횡으로 가로놓인 발칸반도를 누비고 다뉴브강을 거슬러올라가는 그 공간이 접합되는 것이 어떤 비극인지 잘 모를 것이오. 그것은 정처없는 여행이란 비극이 될 수 밖에 없다는 흐릿한 진실과 통하는 것이라오. 이제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조차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누추한 여정의 끝에서 내가 눈물을 지었던 것은, 거기에는 육체의 증거도, 사랑의 증거도 없는 탓에 나는 어떠한 모험의 이야기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오.
오디세우스의 귀환은 비극에 해당할 수 없을 테지만, 나의 짓무른 시선은 발칸의 고통과 질곡을 눈물로 목도한 탓에, 그녀들과 헤어지고, 버리고, 미쳤다고 하고, 마침내 그녀가 발칸의 도살자 슬로보단 밀로세비치가 짓거렸을 것 같은 '조물주가 만든 혼돈' 끝에 학살당한 탓에 비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오. 하지만 내가 사랑한 당신은 아직 건재하다니 다행입니다.
테오의 영화가 지겹다고 한다면, 당신은 잘모르겠지만, 테오가 영화가 아닌 연극을 연출했기 때문이오. 테오는 발칸의 음울한 풍경을 무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살아갈 수 없는 시간들 속에서 과거와 현재, 이념과 현실들을...엮어가며, 연극적인 대사로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이오. 그래서 테오의 영화는 크게 과장된 몸짓과 그로테스크한 표정, 때때로 의미를 알 수 없지만 부동자세로 한 곳을 바라보며 서 있는 군중이나 한때는 이념이었던 거대하지만 싸구려의 석상들이 자주 등장하곤 하오. 그래서 나는 나의 여행기를 쓰면서, 테오의 극본에 있는 대사를 살리는 것에 집중하였오. 그의 극본의 대사는 "따옴표"로 처리해 놓았오. 영화 속의 엘레니 카라인드로우의 음악 또한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가 그러하듯 비명과 같이 가슴을 저미는 것이라오.
테오는 이제 저 세상으로 가고 없으나, 그가 남긴 지겹고 음울한 영화를 보면서 발칸의 산맥과 무너져 내리는 도시들과 강물을 거슬러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묘미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라오.
어짜피 우리는 조물주가 만든 혼돈 속을 거닐고 있으니까...